< -- 95 회: # 7 -- >
그리고 그를 만났다.
"선물을 빨리 주고 싶었어. 텔의 뜻처럼, 네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달아나라고, 얼마든지 도와주겠다고, 있는 힘껏 돕겠다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어."
"……."
툭툭. 라니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그리고 또 한 방울의 눈물이 또르르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한 방울 한 방울 이어지던 것이 라니의 눈 깜빡임 한 번에 주르륵 흘러내린다.
"바보같이. 내가 널 찾아 헤매고 있을 그 시간에 네가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
나는 망설이다 가만히 손을 들어 라니의 볼을 닦아주었다.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손등에 묻어나는 라니의 눈물방울이 무척이나 뜨거웠다. 그리고 그날 날 찾으며 울었을 것이 분명한 라니의 눈물도 이렇게 뜨거웠을 거다. 배롤린 남작에게 팔려 돌아온 날 아침, 날 보며 엉엉 울었던 라니의 눈물은 지금처럼 뜨거운 것이었다.
"미안해, 유나."
"괜찮아."
"정말정말 미안해."
"정말 괜찮아."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해주었다. 괜찮다고. 사과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이 라니를 더 힘들게 할 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니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또르르 또르르. 나는 손등으로 거듭 라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계속, 계속, 몇 번이고 닦아주었다.
"네가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라니와 시선을 마주하며 웃어보였다. 가능한 활짝 웃어보였다.
"네가 미리 알았더라면 너는 무슨 짓을 저질렀더라도 막아줬을 거야. 너라면 그렇게 했겠지. 그 걸 의심했던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어. 잊었니? 그 전에도 넌 나를 구했었다는 걸."
"그 짐승으로부터 말이지."
그 짐승이 라니의 오빠인 론이라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네가 배롤린 성에 미련이 없다는 걸 알아."
우린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라니의 눈빛은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나와."
하루라도 빨리 그 곳에서 나와야 한다. 그래야 라니가 살 수 있다. 나는 몇 달 전, 거리에서 우연히 보았던 라니의 외로움과 그 공허했던 눈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루이 토킨 공자는……."
사랑으로 결혼하는 거라 믿어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귀족들 사이의 결혼이란 것이 사랑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는 드문 것이라 들어왔지만 그건 귀족들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라니에게 아무하고나 결혼하라는 말 따윈 할 수 없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라니에게 라니가 원치 않은 일을 하라고 등을 떠밀고 있는 꼴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루이 토킨 공자가 라니를 사랑한다고 했던 것이다. 무척이나 이기적인 사람답게, 그 말 한마디에 나는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루이 토킨 공자는-."
"그만."
"응?"
"말하지 않아도 돼."
조심스럽게 루이 토킨 공자에 대해 입을 열려던 내 말을 라니가 막아섰다. 난 사실 무서웠다. 라니가 내게 화를 낼까봐. 하지만 라니는 화를 내지 않았다. 내가 알던 모습 그대로, 늘 보아왔던 바른 자세 그대로 그리고 바른 눈으로 나를 그저 쳐다볼 뿐이다.
"그와 관련된 얘기는 내가 그분께 직접 들을게.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것에 대한 결정도 내가 내릴게. 너는-."
라니가 가볍게 숨을 몰아쉰다. 그건 힘겨워 내쉬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말을 고르는 그런 다정한 멈춤이었다.
"너는 내 결정을 기다려줘. 그리고 내가 어떤 결정을 하던 간에……지켜봐줘."
그리고 웃는다. 비록 얼굴에 환히 번지는 그런 미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라니가 웃었다. 그 웃음에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그건 서로에게 아픔이 되지 않기 위한 우리들의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라니가 어떤 짓을 하더라도 내가 그녀에게 화를 낼 수 없듯이, 내가 라니에게 어떤 짓을 저지른다 해도 그녀는 내게 화를 낼 수 없다는 것을.
"그래, 그래. 응, 알았어. 지켜볼게, 그럴게."
다짐하듯 몇 번이고 내가 중얼거렸다. 너를 지켜보겠다고, 너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그런 너를 기다리겠다고.
가만히 라니가 내 손을 잡아준다. 작은 내 손보다 더 작은 라니의 손은, 세상 그 무엇보다 따뜻하다. 그 따뜻함을 놓치지 싫은 아이처럼, 처음 텔이 내 품에 안겨 온기를 느끼려 했던 그 작은 몸짓처럼, 나도 라니의 손을 마주 잡았다. 아주 꼭.
그리고 다짐했다. 두 번 다시 이 손을 먼저 놓지 않으리라고.
"내가 왔다!"
그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예의상 두드리는 노크도 그 무엇도 없었다.
레니였다. 나는 레니의 그런 모습에 익숙해져 있지만 라니는 그렇지 못했다. 라니의 당황스런 눈이 문으로 향했고 그 시선을 따라 나도 거칠게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레니가 우중충한 분위기를 마구 뿜어대고 있는 라니와 나를 보며 건방진 포즈로 혀를 차댄다. 그 뒤로 얼굴을 빠끔히 내민 새론이 어쩔 수 없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대고 있었다.
"쯧쯧. 내 이럴 줄 알았지. 아휴~, 이 어둠의 아이들 같으니라고!"
"누구보고 어둠의 아이들이라는 거야?"
"누구긴 누구겠어! 너! 그리고~, 라니 양이지!"
내게는 당당히 손가락질 해대던 레니가 라니에게까지는 차마 그러지 못하겠는지 어설프게 손가락을 하늘로 추켜올린다. 그 우스꽝스런 모습에 코웃음을 쳐주며 사납게 레니를 쏘아보았다.
"라니가 천장에 있냐? 왜 천장을 가리키고 난리야? 너 눈 삐었어?"
"아니, 멀쩡한 남의 눈을 보고 왜 삐었다고 해? 그럼 내가 예의 없이 다른 사람한테 마구 손가락질해대는 줄 알아? 엉?"
"나한테는 그러잖아."
"그야 너는 내 손가락질 받아도 되니까 그렇지."
참으로 이상한 말이다. 내가 왜 손가락질 받아도 되는 사람이란 말인가. 웃기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레니를 노려봐 주었지만 원래 레니는 그런 거에 기죽을 아이가 아니었다.
"어머~, 텔~ 텔이로구나~!!!"
방구석에서 혼자 신나게 놀고 있던 텔을 발견한 레니가 눈에 초롱초롱 별을 매달고 텔에게로 날아가듯 달려들더니 텔의 몸을 낚아챘다. 그 재빠름에 텔이 놀라 버둥거려댔다. 하지만 레니는 텔을 안고 그 보드라운 털에 얼굴을 마구 비벼대며 텔을 괴롭히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방안에는 텔의 사나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 사랑받고 있었구나. 음음, 좋아. 아주 사랑스런 향기가 나."
처음 레니는 텔을 라니에게 보냈다는 내 말에 망발을 서슴지 않았었다. 제 정신이냐는 말부터 미쳤다는 말까지 온갖 불쾌한 말들이 레니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레니의 요지는 그거였다. 라니는 내가 믿으라면 믿겠으나 배롤린 남작과 그의 아들 론은 죽어도 못 믿겠다고. 레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나는 묵묵히 레니의 신경질을 받아주었다.
"그들은 망할 키아라보다 더 텔을 괴롭혀댈 거야! 어쩌면 잡아먹을지도 모른다고!"
다시 데려와야 한다고 설쳐대는 레니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엉? 어떻게 네가 도망쳐 나온 소굴보다 더 끔직한 곳으로 텔을 보내버릴 수 있어? 응?"
그렇게 소리 지르며 결국에 레니는 울음을 터트렸었다.
하지만 나는 믿었다. 라니가 그 옛날 나를 지켜냈던 것처럼 텔도 지켜낼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런 내 믿음대로 라니는 텔을 지켜냈다. 텔의 밝고 건강한 모습이 바로 그 증거다.
"유나, 레니아 롱아르 영애께서-."
라니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레니 때문에 많이 당황한 모양이다. 그 표현이 얼굴엔 거의 들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라니가 이 상황을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불렀어."
"응?"
"너 오늘 날 맞춰서 내가 레니도 불렀어."
라니는 왜? 라고 묻진 않았지만 눈으로 충분히 그 의사를 전달하고 있었다. 그런 라니의 모습을 보고 내가 살포시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니는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라니에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
"……."
"빨리 잡아."
그리고 망설이지 말라는 듯 라니에게 내민 손을 살짝 흔들었다.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보던 라니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그런 라니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그리고 그 손을 이끌어 레니에게 다가갔다. 텔을 만나 반가워하는 레니와 다르게 텔은 레니에게서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 귀여운 얼굴에 새겨진 건 레니에 대한 귀찮음이었다.
"그만 좀 괴롭혀라. 응? 네가 얼마나 귀찮게 굴면 텔이 저렇게도 질색하는 거냐?"
"아니, 어떻게 이 녀석이 나한테 이럴 수 있는 거지? 엉? 내가 예전에 지한테 얼마나 잘 해줬었는데!"
레니는 텔의 행동에 배신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그 어린아이 같은 행동에 반박해주고 싶은 마음이 딱히 들지 않았기에 나는 레니의 발악을 사뿐히 무시하고 문 근처에 조용히 서 있는 새론을 쳐다보았다.
"새론, 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이미 새론에게 말을 해놓은 상태다. 내 부탁에 새론이 작게 웃어 보이더니 손을 들어 박수를 두 번 친다. 짝짝. 그 박수소리를 신호로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들 손에는 각각 커다랗고 푹신푹신해 보이는 여러 개의 쿠션들과 러그가 들려있었다. 그들은 바닥에 러그를 깔고 그 주위를 쿠션으로 둘렀다. 그런 그들의 기이한 행동을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는 라니를 돌아보며 레니와 나는 동시에 씨익 웃었다.
바야흐로 제 2차 술판이 벌어진 것이다.
============================ 작품 후기 ============================
오늘 아침에 창문을 열어보니 눈이 펄펄~~ ㅎㅎ
아침에 어떤 차가 우리 차 바로 앞에 세워져 있어서 전화를 했더니
30분 넘도록 전화를 안받네요..... ;;;
차를 이상하게 댔으면 전화라도 잘 받아야지, 이게 뭐야! ㅠㅜ
결국 오라버니는 눈을 맞으며 택시 타러 터덜터덜 걸어갔답니다.
기운내~ 내가 초코 우유 사줄게.
ㅋㅋ 추천, 선작, 코멘트 주신 모든 분들, 복받으실 거예요.
안녕히주무세요~^^
* 하얀봉황님ㅎㅎㅎㅎ넹~ 힘낼게요~ 감사합니다^^
* M.
K님 ;;;제 친구는, 성격이 좀 이상합니다;;;;; 혼자 인형 괴롭히다가 미안하다고 울어요;;; 가끔이 제가 감당이 안되기도 한답니다;;;
* akflakeps1님ㅋㅋ라니가 남자?
하고 봤더니 4편을 보냈군요 ㅎㅎㅎ
* 메를리위님 아잉~ 저도 제 사랑을 드릴게요♥ 굉장히 부끄럽네요 ㅎㅎㅎ
* 루이영원님 ㅎㅎㅎ뒷내용이 궁금하다는 말은 작가한텐 칭찬의 말입니다. 전 칭찬 해주면 냉큼 받아먹는 사람이라서 기분좋게 생각하겠습니다 ㅎㅎ
* 유키렌님 오타지적 감사해요>.
<정신없이 쓰다보면 제정신 아닌 문장도 상당히 많습니다;;; 하하하;;;;
* 뚱땅왕비님 ㅠㅜ원래 먼저 좋아하는 쪽이 지는 법이랍니다. ㅠㅜ 고백은 절대 먼저하지 마라, 유나야
* 유진유민쓰마미님 헉!!!!! 링겔이요? ㅠㅜ 아...... 바늘을 1시간 정도 몸에 꼽고..... 아...... 전 바늘공포증이 있답니다. 세상의 모든 주사는 싫어요 ㅠㅜ 건강하세요ㅜㅠ 전 누가 아프다면 겁부터 나요.
* 아랑마녀님 ㅎㅎㅎㅎㅎ축하드려요 ㅎㅎㅎ
* 셀레네현이님 남자분이신가봐요~ 제 글은 여성분들만 보는 줄 알았는데 ㅎㅎㅎ 분위기가 너무 로맨스쪽으로 흘러가고 있거든요;;;; 싸움씬을 더 넣어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 별빛같은마음님ㅋㅋㅋㅋ심술부리는 겁니다. 유나한테 마법능력을 주지 않는 건. ㅎㅎㅎ 아마 유나는 끝까지 뮤한테 바보소리 들을 겁니다! 우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쿤은, 쿤은 아~ 쿤아 ㅠㅜ
* 게으른냥님 감기따위 싫어요 ㅠㅜ 걸리지 마세요 ㅠㅜ푹 주무시고, 주무시기 전에 따뜻한 차 한잔 마시고 주무시면 더 좋고요.
* 크샤나크님 ㅠㅜ 라니야 고생많았다 ㅠㅜ 아마 유나가 아닌 라니가 주인공이었다면 이 글을 너무 어두워서 진작 땅 파고 암흑으로 들어갔을 거예요
* 검은라벤더님ㅎㅎㅎ안녕히가세요 ㅎㅎ
* 레스피님 ㅎㅎ그래요? 이번엔 라니 얘기를 넣어야 해서 유나가 많이 안나왔는데~ ㅎㅎ 유나랑 뮤가 나오는 씬이 너무 적었죠? ㅎ
* 두형님 헉헉!! 감사합니다!!! ㅎㅎ
* 안젤로니아님ㅎㅎㅎ아이참~ 다들 뮤 시점을 좋아하셔~ 그런데 정작 나는 뮤 시점만 되면 꼭 싸움씬을 넣고..... ;;;; 다음 뮤 시점엔 싸움을 빼고 유나랑 알콩달콩을 한번 넣어보겠습니다~ 응원해주세요! ㅎㅎ
* caty님 1편에 달아주셨네요~~ 감사합니다^^
* MashMarigold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응원계속해주세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