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는 아름답다-93화 (93/206)

< -- 93 회: # 7 -- >

"때맞춰 잘 오셨네요. 조금만 늦게 오셨다면 못 만나셨을 텐데요. 외근을 나가려던 참이거든요. 루이!"

장난스럽게 내게 웃어보이던 그는 곧 고개를 뒤로 빼더니 안쪽을 향해 내가 찾는 이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루이 토킨 공자가 문 쪽으로 다가왔다.

"뭐, 일단 들어오시겠습니까?"

사키가 말했지만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무례하게 여기까지 무턱대고 찾아왔지만 다른 사람의 일까지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루이 토킨 공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세요. 지금 괜찮으세요?"

"……."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루이 토킨 공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끄덕임을 신호로 우리는 그 근처에 있는 응접실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루이 토킨 공자가 용건을 물어댔다. 그 서두르는 모습에 괜히 바쁜 사람 붙들어 놓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 일을 그냥 지나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미안한 감정을 담아 그를 쳐다보았다.

"많이 바쁘신 것 같은데 죄송해요. 하지만 라니 일이라서."

내 입에서 라니의 이름이 나왔지만 그래도 루이 토킨 공자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다. 그 남자는, 뮤는 분명 루이 토킨이 라니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했다. 지금 이 모습만 봐서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그렇다고 그게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닐 거다. 나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제가 이런 말 한다고 언짢게 여기지는 말아주세요. 뮤님께, 공작님께 루이 토킨 공자가 라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전, 전 그 말이……."

심장이 빠르게 뛰어대며 가슴을 아프게 압박해 댄다. 그래도 그 아픔 속엔 자그마한 희망이 섞여 있었다.

"전 그 말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간절함을 담아서.

내 호위를 해주는 귀찮은 업무 때문에 이 남자와 외출은 몇 번 한 적이 있어도 이렇게 그를 직시한 적은 처음이었다.

내 말에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 듯 그의 눈은 그저 잔잔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무언가 큰 결심을 한 사람의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나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흥분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 빨라져 횡설수설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도 노력해야 했다.

"이미 아시겠지만, 라니를 배롤린 남작과 같은 부류의 사람으로 생각하시면 절대 안 돼요. 절대로요. 라니는, 라니는 정말 괜찮은 아이랍니다. 정말이에요. 정말로, 정말로 괜찮은 아이예요. 사랑스러운 아이라고요. 만약 루이 토킨 공자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

나는 침을 삼켰다. 목이 심하게 말라붙은 것 마냥 갈증이 일었다.

"라니를 설득해주세요. 제발 설득해주세요.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는 자격이 그 아이에게 충분히 있다고, 그렇게 말해주세요."

"……."

"부탁드려요."

그리고 나는 고개를 숙여보였다. 깊게, 아주 깊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고작 이것 밖에 없었다. 고작 이것이 전부다.

"……고개를 드십시오."

침묵을 지키던 루이 토킨 공자가 입을 뗀다. 낮게 가라앉은 그런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쉬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자 루이 토킨 공자가 같은 말을 반복했다.

"고개를 드십시오."

그래도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니, 들 수가 없었다. 왜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해야 할 일을 그에게 억지로 떠맡겨 버린 기분이 들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끝내 고개를 들지 않으려 하자 루이 토킨 공자가 한 걸음 내게 다가오더니 두 손으로 내 팔을 잡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프진 않았지만 충분히 강압적이었다. 그렇게 직접 내 상체를 세운 그가 다시 한 걸음 물러서더니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감히 몸에 손을 대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그런 과분한 인사를 계속 받고 있을 수는 없어 그런 것이니 불쾌해 마십시오. 그리고 저는, 저는-."

이번엔 내가 아닌 그가 말을 골랐다.

"저는, 저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런 토킨 공자의 표정에 나는 순간 겁이 나버렸다. 어쩌면 뮤아르노와, 그 남자가 내게 거짓말을 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라니 배롤린 양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가장 원했던 바로 그 말이었다.

"아."

눈을 감았다. 눈 안쪽으로부터 달아오른 열기가 아지랑이를 불러오듯 눈물을 자아냈다. 눈을 뜨면 그대로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아 차마 눈을 뜨지 못한 채 토킨 공자의 뒷말을 들었다.

"라니 배롤린 양을 설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이면 충분하다.

"……감사합니다."

내가 속삭였다. 그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내 마음을 표현해 보였다.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할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이 이상은 말이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바쁘실 텐데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려요. 그만 가보셔도 괜찮습니다."

잠시 응접실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하고 싶은 말은 다했다. 더는 루이 토킨을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다.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일 테니 더 오래 붙잡을 수도 없다.

"괜찮으십니까?"

보나마나 지금 내 눈은 무척이나 빨갈 거다. 귀도 빨갛겠지. 아마 볼도 빨갈 거고. 코까지 빨개지진 않았으면 좋겠다는 우스꽝스런 생각을 하며 나는 웃음을 쥐어짜내 루이 토킨 공자에게 웃어보였다. 적어도 우는 것보단 웃는 게 나을 테니까.

"괜찮습니다."

애쓰는 내 모습에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던 루이 토킨 공자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그리고 정중히 인사하고 응접실을 나가주었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톡톡톡톡.

혼자 남았다는 생각에 안심이 된 모양이다. 주체하지 못할 만치 또르르 떨어져 내리는 눈물방울을 멍하니 보며 나는 웃었다. 그래도 나름 잘 참았다 싶어서.

뮤아르노와 그 남자와 처음 밤을 보내고 돌아왔던 그날 아침, 라니는 울었었다. 많이, 아주 많이 울었었다. 내 방에 찾아와 침대에 누워있던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저 눈물방울만 떨궈댔었다. 그 때 라니도 그랬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우는 아이처럼 그렇게, 그렇게 아프게 울어댔었다. 그런 라니를 나는 그저 바라만 보았다.

라니야, 너는 나야. 너는 불쌍한 또 다른 나야. 나는 그날 네가 어떤 심정으로 울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미안함, 미안함, 미안함. 어쩌지 못하는 미안함, 아픈 미안함.

네 인생에 멋대로 끼어든 거, 사과할게. 하지만 널 사랑해. 네가 몬텔로스 백작 같은 사람과 결혼하는 건 죽어도 볼 수 없어.

라니, 그 시절의 너는 나였어. 내가 울고 싶을 때 대신 울어준 사람은 너뿐이었어. 그래서 지금은 내가 울어줄게. 넌 지금도 울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흑."

그랬다. 우리는 세상 누구보다도 친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서로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보듬어 주었던 우리는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이었다. 하지만 서로를 위해 울어주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친구도, 가족도 되지 못했다.

너는 행복해지길 바라. 너만은 행복해지길 바라.

"흑."

나는 그 남자를 만나 그의 정부가 되고 난 후 처음으로…… 정부라는 단어에 욕지기가 밀려왔다.

나는 왜 그딴 방법으로 당신을 만난 걸까? 나는 왜 이렇게도 하찮고 초라한 이름으로 당신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걸까? 나는 왜 당신 앞에 떳떳하게 선 내 모습을, 차마 꿈에서조차도 보지 못하는 걸까?

그 모든 자격지심이 한없이 나를 눌러댔다. 아파서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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