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1 회: #6-6 그 남자 -- >
"루이."
"예, 주군."
뮤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루이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좀 수척해진 것도 같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뮤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며칠 전 그가 루이에게 한 그 말이 이유일 테지.
"그래서 생각해 봤나?"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이?"
"……."
그건 루이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루이는 토킨 백작 가(家)의 차남으로 태어났지만 능력은 그의 형보다 뛰어났다. 모든 면에서. 허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후계자 자리를 탐내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발 물러난 상태로 있어주었다. 그의 형을 위해서.
루이의 형은 뛰어난 동생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쁜 사람은 아니었기에 루이에게 딱히 이렇다 할 해코지 같은 걸 하진 않았다. 그저 그 둘의 사이가 가깝지 않았을 뿐이다.
백작 가(家)에서는 마음껏 실력을 내어놓을 수 없었던 루이가 선택한 곳은 바로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였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곳을 원했고 그 선택의 결과로 뮤의 곁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소견에 대한 확고함과 선택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아는 남자였다. 이렇게
'모르겠다.'
라는 어영부영한 대답을 내놓을 만큼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루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온전한 그의 진심이었다. 루이는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저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원하게 만들어."
"……또 다른 강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설득하란 말이지."
"……모르겠습니다."
다시금 나온 그 말에 뮤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내 생각엔 너보다 더 라니 배롤린을 아껴줄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 같은데?"
"……."
"네가 라니 배롤린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건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얼마 전 배롤린 남작이 자신의 여식을 팔아먹으려 했던 것을 벌써 잊은 건가?"
잊을 리가 없다.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떻게 루이가 그 일을 잊을 수 있겠는가?
당장이라도 칼을 빼어들고 배롤린 남작 가(家)로 뛰어가 남작의 그 더러운 목을 베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주군의 여자로 유명한 '그 아가씨'가 루이 대신 나서주었기 때문이다.
아가씨가 주군께 무슨 부탁을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주군은 아가씨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루이 자신에게 직접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의 숨통을 조이라 명령했다. 그래서 루이는 뮤의 명대로 몬텔로스 백작 가(家)의 모든 자금 줄을 끊었다. 몬텔로스 백작 가(家)와 그 누구도 교류하는 것을 원하지 않게끔 잔인하고도 노골적으로.
그리고 그 협박의 방향이 어디에서 향한 것인지 친히 알려주기까지 했다. 알브레히트 공작의 이름이 나온 순간,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은 배롤린 영애와의 약혼에서 당장 손을 떼야했다. 만약 끝까지 반항하려 했다면 지금쯤 몬텔로스 백작 가(家)는 파산을 면치 못했으리라.
"유나의 조건 중엔 말이지, 맹랑하게도 이런 게 있거든. 괜찮은 사람을 찾아 라니 배롤린과 맺어달라는 것. 선택은 배롤린 영애가 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그 의도는 두 번 다시 배롤린 남작이 라니 배롤린에게 헛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달라는 의미지. 귀여운 여자가 아닌가, 내 여자는."
그리 말하는 뮤의 입에는 진한 만족감이 새겨져 있었다.
"나를 이용해 먹겠다는 제 뜻을 대놓고 밝히더군.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그런 일에 계속 신경 쓰고 있을 만큼 여유로운 사람도 아니고. 게다가 좋은 상대 감을 눈앞에 두고 미적거리는 건 바보 같은 짓 아니겠나? 다시 말하지만 강압은 아니네. 자네에게도 그리고 배롤린 영애에게도. 그러니 만나면 설득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네가 설득해 본다 해도 라니 배롤린이 너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어차피 이 얘긴 없던 일이 될 테니."
"……."
그저 바라만 볼 거라 다짐했다. 상처 많은 그녀에게 더러운 남자로 다가가기는 싫었기에. 그녀에게 남자로 여겨지고 싶은 욕심이 너무 커 그 마음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런 마음으로 다가섰다간 그런 자신을 혐오할까봐, 무서워할까봐 그게 두려워 루이는 그녀에게 쉬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비록 끓어오르는 열정에 못 이겨 잠든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한 적은 있지만 그건 평생 자신만이 알 일이었다. 그녀는 영영 모를.
그날, 주군의 여자인 아가씨를 별장으로 데리고 가던 그 날이었다. 라니 배롤린을 처음으로 본 것이. 그날 배롤린 가(家)에 가서 유나를 데려온 사람이 바로 루이였다. 루이는 배롤린 남작을 경멸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처음 본 라니 배롤린에게도 역시 그런 식으로 대했었다. 처음부터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그녀를 경멸의 시선을 담아 바라보았었다. 일종의 편견 탓이었다.
하지만 그런 루이의 시선에 익숙하다는 듯 구는 그 덤덤함에 루이는 놀랐고, 미처 숨기지 못한 아픔에 두 번 놀랐다. 우연한 몇 번의 기회에 보게 된 그녀의 생각지도 못한 행동과 태도에 놀라야 했고 어느 순간엔 그녀의 모습을 찾고 있는 자신이 있었다.
"일주일 뒤에 라니 배롤린을 공작성으로 초대할 거다."
"……."
"그 날 그녀와 만나보지."
"……."
"그만 나가봐."
뮤의 축객 령에 루이는 가만히 자신의 주군을 내려 보다 고개를 숙이고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응접실 밖에는 사키가 장난스런 웃음을 지으며 서 있었다.
"여어."
"……장난치고 싶은 기분이 아닌데."
"재미없게 굴긴."
사키가 금세 시시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정말로 루이는 장난치고 싶은 기분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팠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왜 이리도 그녀와 만나는 것을 망설이는 걸까?
그건 이미 그가 라니 배롤린에게 한번 차였기 때문일 거다. 비록 그가 직접 고백한 것은 아니었고 또 라니가 직접 거절한 것은 아니었으나 라니는 분명 간접적으로
'결혼에 의사가 없다.'
라고 얘기했었다. 물론 그 말을 루이에게 한 것은 아니었다. 결혼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말을 루이가 우연히 들었을 뿐이지.
바보 같은 자식. 고작 그 말 한 마디에 얼어붙어선.
"이봐, 루이.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내 고민을 네가 이해나 할까?"
날카로운 루이의 말에도 사키는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씩 웃으며 고지식한 중생을 보는 냥 루이를 바라보았다.
"넌 너무 진지하다니까. 농담도 모르고 무겁기만 하고. 그래서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거야."
그 따위 인기 필요 없다.
사키의 목소리에 머리가 더 지끈지끈 아파왔다. 평상시에도 골치 아픈 게 사키의 수다다. 그런 수다를 머리가 아픈 지금은 더욱더 듣고 싶지 않았다. 사키를 무시하고 걷자 그 뒤를 눈치 없는 사키가 쫄래쫄래 쫓아온다.
"라니 배롤린이 배롤린 남작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거 알잖아. 안 그래?"
"그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자신보다 더 라니 배롤린의 고결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루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비를 잘못만난 죄로, 그녀는 마땅히 받아야 할 평가를 조금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귀족영애보다 더 그녀는 순결한 이상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물러서려고만 하는 건데? 응?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 가져야지. 무조건 설득해야지!"
끈질긴 사키의 물음에 결국 루이는 폭발하고 말았다. 거친 발걸음을 한순간에 멈춰 선 루이는 뒤따라오는 사키를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뱉듯 말을 쏟아냈다.
"네 녀석이 뭘 아는가? 그녀 입장에서 이건 또 다른 강요가 될지도 모르는 일인 것을!"
"어차피 선택은 배롤린 영애가 하는 건데 강요는 무슨 강요?"
"공작님이 주도하는 이 만남을 일개 남작영애가 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음, 거절 못하지.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럼 그것을 강요가 아니면 뭐라고 말할 거지?"
"행복의 시작."
"뭐?"
웃기지도 않는 말에 루이가 인상을 찡그리고 사키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사키는 싱글벙글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루이를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하나 세워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내가 말했지? 넌 너무 재미없다고. 왜 그렇게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는데? 응? 넌 너무 부정적이야."
"……이건 부정적인 게 아니-."
"잠깐."
사키의 말에 답답해진 루이가 하소연 하듯 입을 열었으나 그런 루이의 말을 사키가 냉큼 막아섰다. 루이는 정말 기분이 나빠지려하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키의 눈이 마치 생각이 짧은 '동생'을 보는 것 같은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주군께서 주도하는 일이니만큼 라니 배롤린 영애는 자네와의 만남을 거절하진 못할 거야.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만남에 대한 거절을 못하는 거지 혼인에 대한 거절을 못한다는 뜻은 아니잖아. 안 그래?"
"……그래도 이 일이 소문난다면-."
"어허! 내가 먼저 얘기할 거라니까. 왜 자꾸 나쁜 경우로만 생각하는데?"
그렇게 말하며 사키는 역시 넌 부정적인 놈이라니까, 라고 다시 한 번 중얼거려댔다.
"내가 봤을 때 말이지, 라니 배롤린은 너를 잡는 게 가장 좋아. 너보다 더 라니 배롤린을 아껴줄 수 있는 사람, 난 없다고 본다."
"……."
"그걸 그대로 말해. 네 그런 마음을 말하라고. 네 녀석 아니면 다른 이상한 사람과 또 혼인얘기가 나올 수도 있다는 그런 웃기지도 않는 말은 꺼내지 말고. 그거야 말로 협박이니까."
"……내가 미쳤다고 그런 얘길 하겠냐?"
"푸히히히. 물론, 네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재미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괴상하게 웃어대며 사키가 루이를 놀려댔다. 저 말 어디가 재미있다는 건지 루이는 절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사키의 말에 주군의 집무실을 나섰을 때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강압이고 뭐고-."
사키가 마저 입을 열었다. 방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말투가 한순간에 달라져 있었다. 진지하고 그리고 정중한 목소리에 루이가 놀란 눈으로 사키를 쳐다보았다. 늘 짓궂게 일그러져있던 입가가 단정하게 가라앉아 있고 장난으로 빛나던 눈동자는 지금 이 순간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네 놈이 가장 행복하게 해주면 되는 거 아닌가?"
"!"
"평생 라니 배롤린만을 아껴주겠다는 자신감이 네 녀석에게 있다면."
"이, 있다면?"
루이는 자신의 목이 깊이 잠겼음을 알았다.
"그것만으로도 청혼할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래?"
"……."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걱정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거절당하더라도 일단 부딪혀 보지 그래?"
"……."
"바보 같은 자식."
그러면서 장난스럽게 씩- 웃는 사키는 역시나 사키였다. 잔득 굳어 아무 말도 못하는 루이를 보며 기어코 놀려대는 악동 사키. 하지만 사키에겐 오히려 그 모습이 더 어울려 루이는 긴장했던 어깨를 애써 풀어냈다.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척 하긴."
"이봐, 난 어떤 모습이건 다 어울린다고."
그 말에 루이는 피식 웃었다. 라니 배롤린과의 만남을 가져보라 처음 제의 받았던 그 날 이후 처음 짓는 웃음이었다.
"아, 나도 결혼하고 싶은데."
전혀 하고 싶지 않다는 목소리로 투정부리는 사키의 목소리에 루이는 기어코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행복하게 해주면 된다? 평생 라니 배롤린만을 아껴주겠다는 자신감만 있으면 된다?
그 것은 루이에게 충분히 있는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ㅋㅋ 오늘은 그 남자 편만 올립니다.
여기까지 밖에 못썼거든요;;;;;;
그리고...
저는 지금 또 달리러 나갑니다! ㅎㅎㅎ
모두 행복한 밤 되세요.
코멘트 선작 추천해주신 모든 분들, 복받으세요~^^
* 게이른냥님 ㅎㅎㅎㅎ 저도~! 글쓴 보람이 있네요~ 이 한문장♡ 남깁니다 ㅎㅎ
* masamasa님 ㅎㅎ 이미 올라가 있답니다 ㅎㅎ
* M.
K님 으잉으잉 넹~ 다음편이 그남자였답니다. 그래도 잠은 잘 주무세요~^^
* 검은라벤더님 ㅎㅎ 안녕히가세요 ㅎㅎ
* 메를리위님 ㅎㅎ자기 마음을 깨달을수록 집착도 심해질거라능!! ㅎㅎ 라니의 소식은 곧 나옵니다.
* a꿈꾸는소녀z님ㅎㅎ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ㅎㅎ 다음에 또 뵈요 ㅎㅎ
* 루이영원님 ㅎㅎㅎㅎ선작이라... 사실 200도 기대 안했었는데-.
-;;;;;; 그도 그럴 것이 제가 노블을 조금 봤었는데;;;;; 크흠~ 저완 비교도 안되게 야한 것이; 크흠크흠. 어쨌든 기대도 안했었는데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ㅎㅎㅎ저에게 글 쓴 시간을 좀 준다면 다음편 팍팍 진도 나갈 수 있는데 그 시간을 안주네요....
* 천풍화님 ㅎㅎㅎ 보시게 될 거예요..... 천천히... ^^;;;;;;;;;;;;;;;;
* 페르디엔님 ㅎㅎ뮤의 시점을 좋아라 해주시는 분들이 많네요. ㅎㅎ일부러 길게 안쓰고 꼭 필요한 부분만 간략하게 쓰고 있는데 ;;;;넹~ 새드인지 해피인지 모릅니다. 결정을 안한게 아니라 몰라요;;;; 친구가 다트해서 나오는데로 결정해 준대요. 망할X.
* remaerd님 ㅠㅜ????
* 정우규리하님 ㅠㅜ 죄송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뮤는 제 취향의 남자캐릭터는 아닙니다;;;;
* 세이님 ㅠㅜ 유나가 구질구질하게 나올 일은 앞으로 얼마 없을 거예요...??????
^^;;;
* 별빛같은마음님ㅋㅋ죄송합니다. 엔딩이 해피인지 언해피인지는 저도 잘 몰라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님도 뮤의 시점을 좋아하시는 군요. 앞으로는 조금 더 길게 써 볼까요......??? 제가 그럴지 쓰면서도 의문이네요-.
-;
* 유키렌님ㅎㅎ에잉~ 의뭉스런 뮤같으니라고. 어디가서 또 맞고 올까봐 같이 와줬네요.
* 크샤나크님 ㅎㅎㅎ 질투가 많은 남자라니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