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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90화 (90/206)

< -- 90 회: #6-6 그 남자 -- >

"파이어 볼!"

젠의 손에서 생성된 새빨간 불덩어리가 깜깜한 어둠을 환히 밝혀주었다. 그 불덩어리는 빠른 속도로 젠을 향해 다가오고 있던 한 사람에게로 날아갔다. 검은색 옷에 검은 두건을 쓴 남자가 젠이 쏘아 보낸 파이어 볼을 피하기 위해 주춤하는 사이, 젠은 비슷한 검은 복장을 한 또 다른 이에게 달려들어 칼을 그의 배를 푹 찔러 넣었다.

"헉!"

한 치의 망설임도 오차도 없는 깔끔하고 무서운 솜씨였다. 가장 경악스런 사실은 그런 일련의 동작들엔 불필요한 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실전으로 배우고 익힌 그런 움직임이라는 거다.

보통 일반기사들이라면 절대로 쓰지 못할!

"젠장. 기사단의 부단장이라는 놈이 칼을 저 따위로 쓴다고?"

뒤에서 몰래 숨어 이 상황을 살펴보던 한 남자의 입에서 욕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그는 잠입조였다. 싸움에 투입되는 인원이 아닌 은둔술이 가장 장기인 잠입조원. 알브레히트 공작과 관련된 정보라면 작은 것 하나라도 빼오기 위해 조직 내에서도 가장 은둔술이 뛰어난 그가 이번 잠입조원으로 선택되었다.

하지만 그가 이번에 선택된 것은 실력이 가장 뛰어나서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결정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알브레히트 공작과 관련된 정보를 빼오기 위해 시도했던 모든 노력은 투입된 인원들의 말살로 이어졌던 탓이다. 전멸(全滅). 살아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조직 내 은둔술을 펼칠 수 있는 마지막 한 사람이었다.

"저건 완전한 실전용이잖아. 실전에서 익히고 다져진 무식한 솜씨. 기사단의 부단장이란 직책은 단순한 눈가림일게 확실해."

남자는 젠이 거침없이 휘두르는 칼에 마리오네트 인형의 실이 잘리듯 쓰러져가는 이들을 보며 혀를 차댔다. 이건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할 의뢰였다. 돈에 환장한 단장이 대체 얼마를 쳐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그 미친놈은 자기의 이익에 눈이 멀어 조직원들 모두를 사지로 내몰았다는 뼈아픈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휘익~!

젠은 파이어볼을 가까스로 피해 달려드는 이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챙 하는 맑은 소리가 어둠 속을 가른다. 하지만 어찌어찌 젠의 칼을 가까스로 막아내나 싶더니 곧바로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속도의 베기는 차마 막아내지 못한 검은 인영이 그대로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보며 남자는 이 기막힌 상황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심정이 되었다.

"고작 공작의 보좌관으로 일하는 거 아니었어? 무슨 보좌관의 실력이 괴물 급이야? 게다가 마검사. 헐."

침투조로 6명 정도 투입되었지만 그들은 모두 공작성 외곽 담장만을 넘었을 뿐, 저 멀리 있는 본성 근처에는 가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중 벌써 4명이 손속의 자비 없는 저 보좌관이라는 놈한테 베어졌다. 그 무자비한 칼날에 남은 건 이제 고작해야 2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에 남자는 슬슬 후퇴를 고려했다. 아무래도 한시라도 빨리 빠지는 편이 정보를 하나라도 더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보좌관의 실력이 저 정도 급이라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나름 성과가 있었다 할 수 있으리라. 퇴각결정을 내린 남자가 막 은둔해 있던 곳에서 몸을 피하려 할 때였다. 남자는 자신의 목덜미를 향해 쏟아져 들어오는 차가운 검의 기운에 몸을 흠칫 떨었다.

대체 언제!?

조금의 기척도 없었다. 은둔의 대가라 불리는 자신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운둔 실력을 지닌 이가 이 공작성에도 있었단 말인가? 남자는 은둔실력 하나만으로 길드의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의 은둔실력은 뛰어난 것이라 자부할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손님이 왔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단조롭고 평화로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남자는 그 속에 얽힌 짜증을 읽어냈다.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무시하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보았다.

"!"

어느새 그의 목 가까이엔 시퍼런 칼이 뻗어있었다. 허나 딱히 그의 행동을 제제할 생각은 없었던지 칼은 그저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그 무심함에 남자는 자신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댄 이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백금발……. 공작이군."

구름이 많아 달빛조차 희미한 이 밤 속에서 공작은 오롯이 홀로 눈부신 존재였다. 마치 공작의 주위로 황금빛 오러가 빛을 발하고 있는 것 마냥.

"날 알아보다니, 참으로 영광이야."

"컥!"

공작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칼을 남자의 목에서 비켜내더니 그대로 배에 꽂아 내렸다. 그 깔끔하고도 빠른 속도에 남자는 아픔의 고통보다 먼저 피를 토해내야 했다. 서로간의 거리는 가까웠으나 대체 언제 목 근처에 있던 칼이 배로 이동해 간 건지 남자는 전혀 그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배에 꽂힌 칼을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 수 있었을 만큼 엄청난 빠르기였다.

"정말이지 귀찮아. 왜 그렇게 나를 귀찮게 하는 거지? 짜증스러울 지경이야. 게다가 요 며칠 잠잠하더니 왜 하필 오늘, 그것도 지금 이 시간에 온 건가?"

뮤는 진심으로 화가 나있었다. 물론 짜증도 났다. 그토록 살벌하게 경고를 해주었으면 알아서 몸을 사릴 줄도 알아야지, 마치 무뇌아인 것처럼 꾸역꾸역 몰려드는 놈들이 못 견디게 귀찮았다.

그새 나머지도 모조리 처리한 젠이 뮤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젠 되든 말든 일단 침투부터 해대는 것 같군."

"많이 초조해진 모양입니다."

"이리저리 모두 막혀버렸으니 초조한 것도 당연하겠지. 처리는?"

"전부 불태웠습니다."

뮤의 말에 젠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굳이 나오실 필요 없었는데."

"아아. 유나가 거슬려 해서."

"네?"

"네가 조금만 더 빨리 처리했더라면 네 말대로 내가 나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뮤가 쯧! 혀를 찼다. 주군의 말에 젠의 고개가 더 숙여졌다. 그런 젠의 얼굴이 민망함에 조금 붉어져 있었다.

뮤는 방금 전까지 껴안고 있었던 부드러운 여체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두 차례의 격렬한 정사를 끝내고 숨을 헐떡거리며 벅차 하기에 그 모습이 안쓰러워 다음을 위해 잠시 동안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쉬지는 않고 괜히 쓰잘데기 없는 짓을 하는 게 아닌가?

유나의 달콤한 몸을 탐하고 있을 때부터 뮤는 이미 저택에 침입한 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젠이 막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젠이 있었기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을 뿐.

"요즘 마나를 운용해 본다고 시도 때도 없이 난리야."

"이질적인 기운이 섞인 걸 느끼셨나 봅니다."

"정확하게는 몰라도 뭔가 다르다는 건 아는 모양이지."

"대단하신 겁니다. 아가씨 정도의 실력으로 사람의 침입을 느꼈다는 건 마나에 예민하다는 뜻이니까요."

"아아-. 그게 아니라."

"예?"

슬그머니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 거려댔던 유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뮤는 피식 웃었다.

"네가 쏜 파이어 볼 때문에 그래."

"……그렇군요."

"하필 그 때 마나를 운용해선! 쯧. 나름 열심히 한다고는 하는데 그렇게 실력이 느는 것 같진 않아. 안 그런 척 굴고 있지만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조만간 술판을 벌일 것 같더군."

그렇게 말하며 뮤는 침입자의 배에 꼽았던 칼을 쑥 빼냈다. 그와 동시에 배에서 엄청난 피가 쏟아져 내리며 남자의 무릎이 바닥에 털썩 부딪혔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 남자는 피를 한 움큼 쏟아내며 공작과 그의 보좌관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자신이 앞에 있는데도 그 둘은 마치 남자가 없는 사람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나? 유나? 혹 유니시이나? 공작의 그 유명한 정부를 말하는 건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자기에게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 공작이 그를 쳐다본 것이다. 그냥 쳐다봤다면 놀라운 일이 아니나 그 기운에 압사당할 만큼 무시무시하게 쳐다본 것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머리 굴리는 게 눈에 훤하군. 허나, 네 놈이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일은 없을 거다."

"쿨럭."

순간 엄청난 기운에 남자는 몸속에 고여 있던 피를 죄다 토해내듯 뱉어내야했다. 온 몸의 피가 입으로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오장육부가 잔인하게 뒤틀려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자신이 아직까지 죽기는커녕 기절조차 하지 않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엄청난 고통이었다.

"이 놈은 데려가서 귀찮은 떨거지들이 몇이나 남았는지 알아내."

"네."

그 말을 끝으로 뮤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왔다.

유나는 침대 한 가운데 앉아 양 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아이 같은 그 행동에 안 그래도 작은 몸이 더 작아 보인다. 뮤는 상의를 벗고 침대로 다가갔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말간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하늘색 시선에 몸이 조금씩 뜨거워져갔다.

"내가 좀 미친 것 같기도 하고."

"네?"

그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기 때문에 아마 그녀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뮤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그녀가 참 맘에 들었다. 그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느낌, 그 느낌이 무척이나 만족스럽다.

"충분히 쉰 건가?"

"……힘들어요."

"오늘은 아직 두 번 밖에 하지 않았는데?"

"요즘 매일 하잖아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 목소리는 정말 힘겹다는 듯 애처롭게 들려왔다. 뮤는 어깨를 으쓱이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알았으니까, 자."

"……믿을 게요."

하지만 불신이 가득한 투다. 뮤는 믿으라는 듯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새근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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