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9 회: # 6 -- >
작게 항의하듯 말하는 레니의 목소리는 사실 내 귀에도 가까스로 들렸다. 사실 레니의 항변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가 바쁜 거지 내가 바쁜 건 아니니까. 또 지체할 수 없는 일은 그의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이대로 나갔다가는 아주 오랫동안 레니에게 구박 받을 것 같은 예감에 나는 다시 한 번 더 여기 남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가 더 빨랐다.
"그럼 정정하지. 내 일이 아니라 유나의 일이 바쁘다고."
"네?"
말도 안돼요. 믿을 수 없어요. 작게 불만을 터트리는 레니의 반문에 그가 씩 웃는다. 그 웃음에 주위 여자들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바로 앞에서 그 모습을 직격으로 마주한 레니의 얼굴도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그리고 내 심장은…….
정말 미쳤구나, 유니시이나. 제발 정신 좀 차려줘.
미친 듯이 뛰어대는 심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새삼 허리에 닿아있는 그의 손에 온 신경이 몰려들어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심장과 허리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 가까운 건지 미처 몰랐더랬다. 허리를 잡고 있는 그의 손이 미친 듯이 날뛰어대는 내 심장박동을 눈치 챌까 조마조마해 죽어버릴 것만 같다.
"저, 저한테 무슨 일이 있다고 그러세요?"
거짓말은 나쁜 거예요. 작게 덧붙이며 말하자 그가 나를 내려다본다. 그래봤자 이 남자 눈에는 고개를 푹 숙인 내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을 테지만.
"마법을 배우고 싶다면서?"
"예?"
"그 때문이라고 하지."
그의 말에 나와 레니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이 남자 말고 내가 마법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레니밖에 없다. 레니 옆에 서 있던 페터 리제도 공자의 순에 순수한 호기심이 어린다. 그는 새삼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법을……꼭 오늘부터 배워야 해요? 내일부터 해도 되잖아요."
하지만 레니는 생각보다 막강했다. 나는 레니의 용기에 찬사를 보내주었다. 레니는 너도 빨리 나서라는 눈빛으로 나를 마구 쏘아댔다. 그 눈빛에 나는 허리의 둘러진 그의 손부터 먼저 치워야겠다는 생각에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아 내리려 했다. 문제는 내가 그래봤자 그의 손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거다.
"원하는 날 공작성으로 초대하지. 그리고 몇날 며칠이 되었든 원하는 만큼 술판을 벌이도록 해주고."
"예?"
"예?"
우리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보다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그 말을 하는 것이 사실은 썩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술은 최고급으로 몇 백병이 되었든 원하는 만큼 준비해 줄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걸 허락해 주겠나?"
그의 말에 레니가 꿀꺽. 진한 침을 삼켰다.
사실 레니는 롱아르 백작의 명 때문에 술은 쳐다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백작 가(家) 시녀들 그 누구도 레니에게 술을 가져다줄 수 없었다. 몰래 라도 가져다주었다간 바로 해고라고 백작이 단언했던 탓이다. 심지어 백작은 그 냄새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레니가 술을 마실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는 그나마 내가 머물렀던 별장뿐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이제 별장이 아닌 공작성에 머무르지 않는가. 그렇다고 리제도 백작 가(家)에서 술판을 벌일 수도 없는 일이고. 때문에 레니는 그런 자신의 심정을 편지에 적어 보낸 적이 있었다. 자신에게 금주현상의 증후가 보인다고.
"과일만 보면 과일주가 생각나고, 그 중 특히 포도를 보면 더 심해져. 물을 마셔도 술이 느껴지고 심지어 꿈속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는 우리가 있어! 이게 금주현상이지 뭐야, 안 그래? 술, 술, 술! 내게 술을 달라고!"
그런 레니였다. 내게 제발 술을 다오-, 라고 미친년처럼 외쳐댔던 레니. 그런 레니에게 그는 제대로 된 유혹을 해왔다. 비록 알고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레니의 눈에 황홀감이 인다. 매우 반짝반짝. 아마 레니의 머릿속은 지금 약혼식과 술판을 놓고 저울질 하고 있으리라. 물론 올려놓자마자 저울은 술판으로 기울었을 테지만.
그 모습을 페터 리제도 공자가 한숨 섞인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는 어쩐지 걱정스러운 기색이다. 그래도 웃고 있는 걸 보니 참 착한 남자다.
레니에게도 그렇겠지만 그의 제안은 내게도 참 입맛이 다셔지는 것이었다. 별장에서라면 마음껏 술을 마셔댔을 거다. 딱히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눈치 주는 사람도 그곳엔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공작성에서는 내 멋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무의식적인 압박에 나 역시도 본의 아니게 금주를 하고 있었더랬다.
"몇날 며칠……이 되었든 허락해 주시겠다고요?"
"음."
"분명 몇 백병이든 준비해 주겠다 하셨지요?"
"음."
"그것도 최고급으로?!"
레니가 소리쳤다. 그 음색은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다. 물론 얼굴에도 기쁨이 가득가득하다. 멀찍이 서서 미처 대화를 듣지 못한 사람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니가 상큼발랄해진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용서해 줄 테니 이만 가."
역시, 너는 약혼식 보다 술판을 택하는 구나.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 쉽게 내려진 판결에 나는 웃어버리고 말았다. 레니답다. 만약 오늘의 이 파티가 약혼파티가 아닌 결혼 피로연파티였다면 결정이 더 어려웠을까?
"……."
왠지 그럴 것 같진 않다. 레니와 나는 허례허식보다는 실속을 챙기는 실속파였으니까.
"그래도 돼?"
"오늘은 결혼식이 아니라 약혼식이니까. 그러니까 용서해 준다. 조만간 내가 공작성으로 갈게."
"……그래."
조만간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강렬하게 들릴 수도 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의 제안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유혹적인 것이었으니까.
"어여 가, 어여."
그렇게 말하고 레니는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조만간 방문하겠습니다. 반드시 최고급입니다!"
"……그러지."
어쩐지 그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레니의 허락이 떨어졌다. 이젠 내게도 반드시 홀에 남아야 할 의무가 사라지는 셈이다. 내가 더 이상 망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안 그가 바로 나를 이끌어낸다. 우린 가만히 홀에서 빠져나왔다.
복도를 걷는 내내 나는 아무 말도 않았다. 그도 딱히 입을 열지 않았기에 우리는 조용히 롱아르 백작성을 나와 공작 가(家)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에 올라 공작성으로 가는 동안에도 우리는 딱히 대화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공작 가(家)에 도착하고 마차에 내려 그가 집무실로 향하려 했을 때 쯤, 내가 물었다.
"정말 마법을 배울 수 있도록 해주실 거예요?"
어쩌면 그냥 해본 말일 수도 있다 생각했다. 마법사를 초빙하는 일은 내 생각보다 더 쉬운 일이 아닌 게 틀림없을 테니까. 그들은 자신들을 함부로 오라 가라 하는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한다고 들었다. 그런 그들이 이 남자의 명으로 공작성에 왔을 때, 고작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면 결코 좋아하지 않을 거다. 물론 돈도 많이 들겠지.
하지만 그런 것들을 제쳐놓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난 굳이 마법사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마나를 어찌어찌 내 몸속에 쌓았지만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 존재조차 제대로 알고자 탐색해서야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을 만큼 지극히 희소한 양이었노라고.
전에 1서클 중반과 관련된 마법서를 그의 책장에서 본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책에 적힌 수식조차 너무 어려워 눈이 빙글빙글 돌았더랬다. 실은 1서클은 어찌어찌 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대단한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거란 바람은 애초부터 없었다지만 생각보다 더 높았던 마법의 문턱에 질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지금 내게는 대단한 마법사 스승이 아닌 내 협소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답해주고 가르쳐 줄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마법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도 충분하다.
한참을 그는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정말 아무 말도 없었다. 내 말에 딱히 대꾸해줄 말이 없나보다. 그래서 나는 단순히 생각해 버렸다. 정말로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입에 담은 걸지도 모른다고.
"배우게 해준다 했다."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내 눈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빛이 그 안에 모두 뭉쳐있는 듯 반짝거린다. 쿵. 그 눈빛에 또다시 심장이 꿈틀댔다. 마구 날뛰려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일부러 긴 숨을 들이마시고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레니를 설득하려고 그냥 해보신 말이 아니구요?"
"그냥 해본 말이라 해도 정말 그리해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래요?"
역시, 그냥 해본 말이었군. 하지만 괜찮다.
"고마워요. 그런데 저는요, 마법에 대해 기초지식 정도만 있는 사람이면 충분해요. 굳이 진짜 마법사나 아니면 고급지식을 가진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도 되요."
"아."
"그럼 그런 사람으로 부탁드려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그를 놓아주었다. 바쁘다고 했으니 더 이상 붙잡고 있는 건 안 될 것 같다. 그리고 내 심장을 위해서라도 오늘은 이만 그와 헤어져야 좋을 것 같고. 그렇게 말하고 내 방으로 가기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데 그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내 몸을 가까이 끌어당긴다.
"어딜 가지?"
"어딜 가다니요? 당연히 제 방에 가죠."
"내가 한 말은 어디로 들은 건데?"
"네?"
그가 웃는다. 그 웃음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 웃음이 내 목구멍을 막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숨통을 막고 있는 걸지도. 나는 막힌 숨을 뚫으려 크게 호흡해 보았지만 바보처럼 숨 쉬는 것조차 쉬이 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분명 내 일이 아닌 네 일로 바쁘다 하지 않았던가?"
"그건 그냥 해본 말로-."
"그냥 해본 말이라 해도 정말 그리하면 된다 했다."
방금 전 했던 말을 그가 다시 반복했다. 강하고 단호한 어조로. 대체 어쩌려는 건가. 설명해 달라는 눈으로 그를 재촉하자 그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그가 날 잡지 않은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는다. 생각지도 못한 스킨십이었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그 행위에 다시금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버렸다.
이건 위험하다. 매우, 매우 위험하다.
당황한 내가 재빨리 그의 손을 밀어냈지만 그의 손이 내 뺨에서 떨어지고 난 후에도 한번 가라앉아버린 심장은 쉬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저 깊이 가라앉은 그곳에서 여전히 무겁게 뛰어대고 있었다.
아……, 이대로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그는 날 놓아주지 않았다.
"들어오지."
"……어디로요?"
이상하다. 왠지 목소리까지 가라앉아 버린 것 같아.
이러지 마 제발, 유니시이나.
세차게 눈을 감았다. 눈빛마저 흔들리게 둘 수는 없었기에. 어둠이 내려앉자 한결 차분해진다.
그는 내 팔을 잡고 그의 집무실로 데려갔다.
"앉아."
그리고 나를 소파에 앉힌다. 대체 뭐하려나 싶어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는 그저 피식 웃고는 내 앞에 앉았다. 그리고 빤히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나는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로 그의 눈빛을 받아냈다.
어쩌면 그가 눈치 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아직은 괜찮을 거다. 아직은, 그래 아직은.
"그래, 궁금한 게 뭐지?"
"……예?"
뜻하지 않은 물음이었기에 내 대답은 조금 늦게 흘러나왔다. 나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내게 파악될 만큼 그는 만만하지 않다. 나는 그가 다시 입을 열어 설명해 주기를 한참이나 기다렸다.
그리고 이 남자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 부담스러운 시선은 그만둬 줬으면 좋겠다. 이곳에 들어오고부터 쭉- 그는 내 얼굴에서 단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입이 바짝바짝 말라온다. 침묵이 무척이나 버겁고 힘겹게 느껴졌다. 결국 답답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최대한 침착하게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궁금한 것이 무엇이냐 물었지."
"궁금한 거요?"
그렇게 되묻자 그는 정말이지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진짜 머리가 나쁜 모양이다.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할 지경이라는 남자의 표정에도 여전히 그의 말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정말 이해력이 부족하군. 마법을 배워도 수준이 낮겠어."
그가 말했다. 그건 딱히 나를 무시하는 그런 발언이 아니었다. 그저 느낀 그대로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이었다. 때문에 나는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사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마법……을 말씀하시는 건지 몰랐어요."
"그럼 방금 전까지 하고 있던 얘기는 마법에 관한 것이 아니라 다른 거였던가?"
급기야 그는 나를 비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답답함이 흘러넘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직접 가르쳐 주시게요?"
"매번은 힘들겠지만 가끔은 괜찮겠지."
"마법에 대해 아세요?"
몰랐던 사실이다. 그가 검사라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남자가 마법도 쓸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새삼 알게 된 사실에 눈을 반짝이며 묻자 그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별거 아니라는 듯이.
"아아."
"단순히 이론을 알고 계신 것이 아니라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요?"
"어느 정도는."
"우와~. 정말요? 언제부터요? 언제부터 마법을 배우신 건데요?"
"글쎄. 그건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그제야 나는 내가 처음 접했던 마법서인 마법입문서 한 페이지 페이지에 가득했던 손자국을 떠올렸다.
"어떤 마법을 사용하실 수 있나요? 하나만 보여주시면 안 돼요?"
실제로 마법을 눈앞에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흥분해버렸나 보다. 가만히 내 모습을 보던 그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내 흥분을 가라앉히듯 손을 들어 보인다.
"그러니까 마법을-."
"그만."
그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막 입술을 타고 소리로 형성되려던 질문들을 삼켜냈다.
"묻고 싶었던 것이 그런 게 아니었을 텐데. 그래서 궁금한 것이 뭔데?"
"아."
맞다. 깜빡 잊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에 흥분해 까먹고 있었다. 나는 들뜬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숨을 골라 쉬었다.
"쯧."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머릿속에서 질문을 정리하고 있는데 그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탓에 그만 아무 생각 없이 그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쳐 버리고 말았다.
"……."
그의 입술이 예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무슨 남자입술이 저렇게 섹시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날 보는 그의 시선이다. 영롱한 반짝임이 담긴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그 어떤 보석보다 더 아름다웠다. 두근두근. 그 시선에 사로잡힌다. 순간 나는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상처 받을 거야.
또 다른 내가 내게 속삭였다. 너는 상처 받을 거라고.
이건 아닌데. 이 남자한테 빠지는 건 아닌데. 이래선 안 되는데.
그를 정부로만 여겼던 그 때가 나았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나았다. 그에게 받는 대가를 담담히 받아내고 주위 상황이 아무리 거지같아도 욕 한번 뱉어내고 잊어버릴 수 있었던 그 때가 훨씬 나았다.
몇 달 전 그는 내게 엄청난 보석을 한꺼번에 안겨주었다. 모두 굉장한 보석들이었고 어마어마한 값어치를 지닌 것들이었다. 그 이후로 그는 나와 잠자리를 가지고 난 뒤 대가라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주지 않았다. 미리 한꺼번에 준 거라 나는 생각했다. 괜찮았다. 이미 받아버렸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별도로 그 대가라는 것이 나는 싫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그에게 심장이 움직이고 난 다음부터다. 더는 그와의 잠자리 후 대가 같은 걸 받고 싶지 않았다. 구질구질해져 버린 탓이다. 괜히 서글퍼지려 했기 때문에.
벗어나. 너는 상처 받을 거야.
안다. 나도 잘 안다. 이런 남자한테, 마음 따위는 줘선 안 된다는 것쯤은. 나도 너무나도 잘 안다. 어떻게든 끊어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모질게 마음먹어야 한다. 그리고, 그리고 그를 더 이상 속이지 못할 그 때가 온다면, 그 땐 그가 날 버리든 그러지 않은 것이라 해도 그를 떠나버릴 거다.
초조해지려는 마음에 채찍을 가했다. 지금의 이 아픔은 나중에 받을 상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자위하면서. 나는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최대한 태연하게 굴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효과를 본 모양인지 목소리는 제법 침착하게 흘러나왔다.
"책에서 보니까 마법에도 계통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공격형이라든가 방어형, 혹은 치유형 이렇게요. 그런 건 어떻게 결정되는 건가요? 마나의 성질이라던가 뭐 그런 것들이 다른 건가요?"
마법에 대한 지식이 너무 짧다보니 사실 질문을 고르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일단 질문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고심 끝에 하나 만들어내긴 했다.
"마나의 성질이라니. 재밌는 말을 하는 군. 그런 것들이 나뉘는 건 마나의 성질 여부가 아니라 마법을 사용하려는 사람의 성질에 따라 달라지는 거겠지."
"사람의 성질이요?"
"굳이 나눌 필요도 없다는 소리다.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마법입문서를 읽은 모양인데, 그 책은 이해를 위해 자세히 써놓긴 했지만 쓸데없는 분류를 너무 많이 해놓았어."
"공작님께서도 읽어보셨나요?"
역시 그 책은 이 남자 책이 맞았구나.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내가 이해조차 못할 법한 그런 책만 읽을 것 같은데.
"아마 어렸을 때 읽었던 걸 거야. 언젠지도 기억 안 나지만."
어렸을 때라……. 흠, 그렇다면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도 나름 이해가 간다.
"그건 그렇고 호칭."
"예?"
"이젠 좀 말을 버벅거릴 때도, 틀리게 부를 때도 지나지 않았나?"
"호칭이요? 아, 죄송해요. 제가 또 실수했네요."
사실 공작을 공작님이라 부른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이름을 부르기로 한건 이 남자의 조건 중 하나였으니 내 실수는 맞다. 잘못했다는 듯 두 손을 모아 입가에 가지런히 가져다대 보였다. 그러자 그의 눈길이 내 손에 머문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풀어 내렸다. 그리고 치마 밑으로 쑥 집어넣어 숨겨버렸다. 왠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사람의 성질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은 음, 그러니까, 결국 어느 계통을 선택하느냐는 스스로가 결정하는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굳이 결정 같은 거를 할 필요도 없고요?"
"그래. 선호하는 마법 계통이 다를 뿐이지. 골고루 배우려는 이들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은 자신에게 잘 맞는 마법을 집중적으로 파고들기 마련이라."
"흐음, 그럼 뮤님은 어떤 계통의 마법을 잘 사용하시는데요?"
"굳이 분류하자면 공격형."
"아.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방어형이나 치유형 계통도 사용하실 수 있으세요?"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만 공격형보다 능숙하진 않아."
"그렇군요. 굳이 한 계통을 선택할 필요는 없는 거였네요."
나는 단순하게 공격형이든 방어형이든 치유형이든 그 것들을 사용하기 위한 마나의 성질이 다를 테니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 각각의 마법수식이 확연히 달라 그랬던 것 같다. 공격형의 마법수식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복잡했고 치유형의 마법형식은 솔직히……공격형에 비해 간단했다. 아, 공격형에 비해 간단하다 했지 결코 쉽다하지 않았다. 그만큼 공격형이 복잡하다는 뜻이다.
"왜 치유형의 수식이 제일 간단해요? 사실 제일 어려워야 할 것 같은데."
"큐어나 힐링 등의 치유마법은 마법의 기술보다는 마나량의 지배를 많이 받으니까. 게다가 신관들이 사용하는 신성력이나 포션보다 그 효과도 작다. 치유력도 당연히 뒤쳐지지. 그리고 큐어는 3서클, 힐링은 5서클 마법이야. 3서클만 올라가려 해도 마나가 얼마나 필요한지 아나? 치유마법이나 회복마법 자체가 신성마법의 일종이다. 신성력엔 수식 따윈 없어."
"이런, 3서클이었군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게 중에서 제일 쉽겠다 했더니 그것도 아니란다. 쉽기는 개뿔. 내가 3서클은커녕 1서클이나 제대로 배울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또?"
"또요? 음, 일단은 제가 먼저 공부를 더 해야겠어요. 제가 아는 게 있어야 질문도 생기죠."
그래, 일단은 공부부터 해야겠다. 사실 이렇게 빨리 일이 진행될지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뭘 질문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오늘따라 무던히도 주인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 심장 때문이라도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남자와 헤어지고 싶었다.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 수준 낮은 질문에 그도 내 공부의 필요성이 먼저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모양이다.
나는 잠시 그를 쳐다보다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 고맙다고 인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행이도 그는 나를 잡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이젠 귀찮아서 뭉땡이로 그냥 올리네요....
깔끔하게 올리고 싶었는데...
졸음은 처음의 결심을 마구마구 뭉개트리는 괴물입니다. ㅎㅎ
방금 전가지 다음 편인 '그 남자' 부분을 쓰고 있었는데
너무 졸려서 못 쓰겠어요오오오오오오...........
다들 좋은 꿈 꾸세요^^
추천, 선작, 코멘트 해주신 모든 분들, 복받으세요 ㅎㅎㅎ
* M.
K님 ㅎㅎㅎ겨우 왔답니다.
ㅎㅎ 졸려죽겠는 정신 부여잡고 쓴 글이 어제 그 글이라능! ㅎㅎ
* 바아스트로님 최대한 많이 써 보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지하철에서 쓴게 다네요. 쩝;;;
* 검은라벤더님 ㅎㅎㅎ넹~ 안녕히 가세요 ㅎㅎ
* 루이영원님ㅎㅎㅎ그렇게 말씀해 주시면 저 감동먹잖아요♥
* 엔샤크님잠은 주무세요 ㅠㅜ 잠은 소중한 겁니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새드일지 해피엔딩일지는 아직 저도 모른답니다. 써봐야 알아요 ^^;;
* 땍땍여우님 재밌다고 해주셔서 감솨합니다. 그래도 잠은 주무세요. ㅎㅎ 뮤가 뻑가는 푸히히니히히미니 한번 그리 만들어 볼까요?
ㅎㅎ
* 정우규리하님 ㅠㅜ 아니되옵니다~~~~~~ 유부녀에게도 놀 권리가 있다!!!!!!! ㅠㅜ
* 게으른냥님ㅎㅎㅎ 전 지금까지 밤 새본 적이 없어요^^;;;;;; 밤새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잔다든가;;;; ㅎㅎㅎㅎ 잠은 제게 필수랍니다♥ 시험날도 그냥 잔다는~ 그리고 운다는.....
* lulullu님 ㅎㅎㅎㅎ지하철에서 쓴게 다랍니다.
아이고~ 느려터진 손아!!! 으엉~~ㅠㅜ
* 세이님 ㅎㅎㅎ 연말+연초는 주말이 다 이상해요........... 연말을 한 해간다고 놀고, 연초는 한해 시작한다고 놀고, 그러고 보니 연중에도 일년의 중간이라고 노네요 ㅎㅎㅎ
* 유키렌님그니까요! ㅎㅎㅎㅎ 파티파티~~ 잠옷차림으로 서로 사진 찍고 그 다음날 사진 폐기하고 그런 걸 반복하는 행사죠 ㅎㅎ 뮤가 곁에 있는 한 유나는 안전할 겁니다. 곁에 있는 한........................
* masamasa님 ㅎㅎㅎ감솨합니당~~~ 완결날 때까지 넵!!! 화이팅입니다!!!
* 페르디엔님ㅎㅎㅎㅎㅎ 쫓아냈다!! 입니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