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8 회: # 6 -- >
"매일 밤 너를 안으면서도 몰랐냐는 그 말이 하고 싶은 건가?"
"……그런 말이 아니구요."
나는 힐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금 이 남자가 한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있는 사람이 있나 하고. 하지만 다행이도 우리 주위에 속닥거림을 들을 만치 가까이 서 있던 사람은 없었다.
"제가 알고 싶은 건요, 방금 전에 저한테 하셨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마나를 확인할 수 있는 거냐고요. 그 마나의 양까지."
"자신이 지닌 마나에 대해 타인에게 고스란히 알리고 싶은 사람은 없지."
"그럼요?"
"아무도 방금 전 너처럼 순순히 마나를 탐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는 소리다."
"전 몰랐잖아요."
"그렇지."
작게 항변해 본다. 우리 사이에 짧은 침묵이 돌았다. 잠시 후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다른 사람의 마나를 탐색할 수 있다, 이 말이죠?"
"탐색하는 자의 수준이 더 높다면."
"수준이요? 무슨 수준이요?"
"실력이나 서클이나 마나의 양이나 종합적인 면에서."
"아."
그럼 자기보다 마나의 양이 많은 사람의 마나는 탐색할 수 없다는 소린가? 흐음, 하수는 고수의 실력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줄리나 라미스텡 영애의 노래가 끝났다. 그녀의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었다.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새는 바람에 노래를 제대로 듣지 못했기에 그 미안함을 덧보태 나도 힘껏 박수를 쳐주었다.
큰 박수소리가 연회장을 울리고 거의 사그라질 때쯤 레니와 페터 리제도 공자가 다시 단상으로 올라가 오늘 화동으로 활약해 준 줄리나 라미스텡 영애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이 다시 박수를 쳐주었다. 물론 나도 열심히 쳤다. 레니와 페터 리제도 공자는 그 박수소리에 화답하듯 서로 손을 맞잡고 단상을 내려와 홀 한 가운데로 걸어갔다.
홀 중앙에 그들이 멈춰 서자 기다렸다는 듯 음악이 흘러나온다. 찬미사랑을 외치는 것 같은 달콤한 느린 음악이.
잘 어울리는 구나. 정말 선남선녀가 따로 없어.
그들이 춤추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 내 눈 앞에 손 하나가 쑥 밀려들어왔다. 나는 레니에게 보냈던 시선을 내려 그 손을 쳐다보다 다시 그 손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출까?"
"……거절해도 돼요?"
"왜?"
"저 춤 못 추거든요."
사실이다. 절대 이 남자와 춤추는 것을 피하려 함이 아니다.
지금껏 공식적인 장소에서 이 남자와 춤을 춰본 적이 없다. 만약 오늘 추게 된다면 그건 그와 나와 첫 번째 춤이 될 테지. 그럼 사교계가 흥미로운 가십으로 또 떠들썩해질 거고. 물론 이런 시끄러움을 염려해서 춤추기 싫다 한 것도 아니다.
"……정말이에요. 저 춤 못 춰요."
거짓말 아니라니까!
"정말이라고요. 저 춤 진짜 못 춰요. 아주, 많이."
"잡지."
"……."
"아이참. 진짜로 못 춘다니까."
하지만 내게 내밀어진 손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하아. 나랑 춤추고 나면 오히려 망신만 당할 텐데. 하지만 나 때문에 당신이 망신당해도 미안하다는 말 따위 절대 하지 않을 테다. 못 춘다고 몇 번이나 말했던 내 말을 무시한 건 당신이니까. 끈질긴 그의 시선에 그리고 흔들림 없는 손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을 잡고 홀에 나서자 또다시 우리를 중심으로 주위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쏟아져 내렸다.
"발 밟아도 용서하세요."
툭하니 새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억지로 홀까지 이끈 그가 얄미워서라도 일부러 발을 밟아버릴까 싶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발을 밟을 거다, 나는.
"걱정 마라. 내가 알아서 리드 할 테니."
그렇게 말하며 그는 허리에 감은 손에 힘을 주곤 그대로 내 몸을 들어올렸다.
"헉!"
정말, 말 그대로, 그는, 나를, 들어올렸다!
물론 힘껏 들어 올린 게 아니다. 아주 살짝, 바닥에 발이 닿을 듯 말듯. 사람들이 미처 그 사실을 알지 못할 만큼. 하지만 그에게 들려버린 내가 그 것을 모를 리 없지 않은가.
당연히 모를 수가 없잖아. 내 몸이 떠 있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신기하지. 허리는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는 나를 공중에 살짝, 아주 살짝 띄운 그 상태로 그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
"생각 외로 잘 추네요. 저 두 분이 추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실제로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처음 추는 거랍니다. 다른 곳에서 춤을 함께 췄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래요? 어쨌든 꽤 괜찮은 실력이네요."
"정말로요. 무엇보다 굉장히 유려해요. 마치 떠다니는 것 같아요."
……떠다니는 거 맞습니다.
나는 질린 눈으로 슬쩍 그를 쳐다보았다.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해 보이는 그 모습에 다시 시선을 돌리고 말았지만. 역동적인 음악이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턴 할 타이밍조차 없이 그저 블루스 형식으로 밖에 추지 못하는 음악이라는 것이 내겐 행운이었다. 나는 오늘부터 이 음악을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춤추겠다고 나와 놓고 정작 나는 한 일이 없었다. 한 손은 그의 손에, 다른 한 손은 그의 어깨에 올리고 그저 가만히 있으면 나머지는 다 이 남자가 알아서 움직이고 또 움직였으니까.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내게는 무척이나 긴 그리고 진정 사랑하는 이와 추었던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짧았던 음악이 끝났다. 또 추자는 말은 하지 않겠지. 하지만 모를 일이다. 나는 이 남자가 나를 또 골려먹기 위해 춤 신청을 할 수 있는 타이밍을 애초에 주지 말자 생각했다. 누가 봐도 서두르는 몸짓으로 그에게 인사하곤 먼저 휙 돌아 연회장 구석으로 발걸음을 휙휙 옮겨갔다. 그런 내 뒤를 그가 웃으며 뒤따랐다.
"유나, 유나."
내가 춤춘 것을 곁눈으로 본 모양이다. 레니가 눈을 동그랗게 말아 뜨고 내게 뛰어오듯 재빨리 다가왔다.
"대체 언제 그렇게 연습한 거야? 응?"
"연습은 무슨."
"너 춤 되게 못 추잖아!"
"……."
정말 솔직하구나, 레니야.
나는 최대한 무표정하게 레니를 노려보았다. 그런 내 표정에 레니가 아차! 하는 시선으로 내 곁에 선 그를 올려다본다.
이봐, 네가 말실수한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나거든? 근데 왜 이 남자를 쳐다보는 거야?
"하, 하하하. 사실은 유나가, 춤을 못 추거든요."
굉장히.
작게 덧붙인 그 말에 나는 레니를 슬쩍 꼬집어 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레니의 약혼식이 아니었더라면 궁둥이 팡팡이라도 해줬을 텐데. 아니면 입을 꿰매놓겠다고 협박을 했다던가.
"심하게 못 추긴 하나보군."
"아까 못 춘다고 이실직고 했잖아요."
"뭐야? 방금 전 그 춤은 괜찮았다고. 아니, 네 기준으로 평가했을 땐 네 인생 최고라고 말할 수도 있는 춤이었다고!"
"내 인생 최고, 최고……."
레니의 그 단정적인 말에도 딱히 반박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 그 말이 사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 역시 했기 때문일 거다. 슬프고 안타깝지만……난 그 정도로 춤을 못 춘다. 어쩌겠니. 진정 못 추는 걸.
괜찮아. 춤 못 추는 것이 무슨 상관이람. 앞으로 내가 살아가면서 이런 곳에 참석할 일은 이제 레니의 결혼식밖에 없을 텐데.
그래도 얄미운 건 얄미운 거라 나는 밉지 않게 레니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레니가 귀엽게 혀를 쑥 내밀어댄다. 이봐요, 아가씨. 귀염상은 아가씨와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말해줘야 인정하시렵니까?
"선물 있어."
"선물?"
"응. 네가 좋아할 진 모르겠지만."
"뭔데?"
방금 전 심술이 남아있는 탓인지 알려주기가 싫었다. 그래서 냉큼 고개를 저었다.
"아까 집사님한테 줬어. 네 방에 가져다 달라고."
"지금 말 안 해줄 거야?"
"응."
"왜?"
"궁금해서 답답해 죽어보라고."
레니가 째려본다. 그 날카로움에 킥킥 웃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 어딘가에 뒤통수가 부딪히고 만다. 단단하지만 딱딱하지 않은 그 감촉에 뒤를 돌아보자 역시나 그다. 하긴 내 곁엔 지금 레니와 이 남자뿐이지. 그는 바보처럼 왜 갑자기 부딪치느냐는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단하네요."
"네 머리만큼은."
하여튼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지. 나는 삐죽거리며 다시 레니를 쳐다보았다.
"내가 약혼 축하한다고 말했나?"
"몰라. 기억 안나."
거짓말쟁이. 내가 오늘 레니를 보자마자 한 말이 그 말이었다.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 기집애가 대놓고 거짓말을 한다.
"바보 기억력."
"반사."
"나도 반사다."
"나는 또 반사."
"그럼 나는 연속 반사다!"
"나는 연속 반사의 반사!"
평소처럼 놀고 있는데 뒤에서 한숨소리가 들렸다. 레니가 조심스럽게 내 뒤를 보더니 더 바보처럼 헤헤헤 웃는다. 그 얼굴을 보고 나는 그가 어떤 표정으로 우릴 내려다보고 있는지 짐작했다.
"레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페터 리제도 공자가 레니를 불렀다. 리제도 공자 옆에는 공자 또래로 보이는 몇몇의 낯선 남자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내 뒤에 선 알브레히트 공작을 놀란 토끼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생각지도 못한 거물을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본 사람들 마냥. 그리고 그 앞에 붙어선 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다 내 머리칼 색을 보고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댄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 확연히 드러나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페터 오빠 친구들인가 보다. 이제 도착했나봐."
"그래?"
"응. 나 인사하고 올게."
"응."
레니가 내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페터 리제도 공자가 있는 곳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들은 레니가 다다라 인사를 나누기 직전까지도 잘나고 잘난 내 정부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시선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는 늘 있었던 일인 냥 일말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내게 반갑지 않은 화제를 물고 늘어졌다.
"반사라."
"……."
"흐음."
"……항상 그렇게 대화하는 건 아니에요."
"아아-. 어련하시려고."
그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믿지 않아도 딱히 상관없다. 어차피 거짓말이니까. 사실 레니와 내 대화는 거의 다 바보 같다.
"더 있어주고 싶지만."
그가 잠시 간격을 두고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군."
이만 가봐야 한다는 뜻이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원래 바쁜 사람이다. 여기 왔다는 것 자체에 사람들이 놀랄 만큼.
"네. 조심해서 가세요."
"……."
"배웅은 하지 않을게요."
"……."
"뭐 더 하실 얘기라도 있으세요?"
"……."
그러자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 조용히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왜 여기에 왔다고 생각하지? 이런 무료하고 따분하기만 한 곳에?"
"……글쎄요."
안 그래도 나 역시도 궁금하다. 이 발걸음 귀하신 남자가 이곳까지 함께 와 준 이유가 대체 무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내젓자 그가 심술궂게 입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두근두근. 나는 슬쩍 시선을 그의 얼굴에서 목덜미 쪽으로 내렸다. 심장이 또 빨라지려는 신호를 보내왔기 때문에. 저 남자는 어째서 저런 심술 맞은 표정조차 멋진 건지.
"너도 간다."
"네?"
"내가 가야한다면,"
그가 잠시 말을 멈추고, 손으로 내 턱을 들어올렸다.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와 다시 시선을 맞춰야했다. 참으로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너도 가야한다는 뜻이지."
어째서? 가만히 그의 말을 곱씹어보다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그 결론이란 것은 너무나도 웃기고 말도 안 돼는 것이어서, 순간 나는 내 바람이 이런 헛생각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하지만 냉정한 마음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도 역시 결론은 같다. 나는 내 말이 바보처럼 들리지 않길 바라며 최대한 가볍게 입을 열었다. 마치 농담처럼, 장난처럼.
"설마 저 때문에 여기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죠?"
착각도 이 정도면 망신이다. 만약 아니라면 나 혼자 북치고 장구까지 친 거다. 이 얼마나 민망한 일이란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내 말에 그의 입가에 한줄기 웃음이 스쳐지나갔다. 나를 비웃는 것 같은 그 웃음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해져 부러 어색한 웃음을 자아냈다.
"하, 하, 하. 그럴 리가 없겠죠. 오해 마세요. 농담이었-."
"그걸 이제야 안 건가? 둔한 것도 정도껏이지 답답할 정도군."
"에?"
"하긴 다른 사람들한테까지 눈치 빠른 것보다야 낫겠지."
"정말, 정말로 저 때문에 여기 오신 거라고요?"
"그게 아니라면 내가 여기 와야 할 다른 이유라도 있나?"
"……."
할 말이 없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보았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유다. 나 때문에 그가 이곳에 왔다는 건. 다른 연유 따위 몰랐지만 당연히 내가 모르는 무엇이 분명 있을 거라고 그리 생각했다.
가만히 눈만 깜빡거리며 혼란에 빠져 있는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나를 출입구로 이끌었다. 마치 꼭두각시 줄타기 인형마냥 그가 걷자 나도 절로 걸어갔다. 그게 내 의지든 아니든. 허리에 얹어진 그의 손바닥이 새삼스레 무척이나 뜨겁게 느껴졌다. 그 뜨거움이 온 몸으로 번져 전신이 활활 타오를 것만 같았다.
"어, 어?"
나는 홀을 나서는 출입구에 다다르기 그 직전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잠깐만요, 작게 속삭여 발걸음을 늦추곤 주위를 휙휙 둘려보았다. 그러자 나와 눈이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레니를 발견했다. 레니는 홀을 떠나려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나와 그를 바라보며 서둘러 다가오고 있었다.
"벌써 가? 왜?"
"아니, 그게."
당연히 레니의 약혼식이니만큼 나는 끝까지 남아 이 자리를 빛내기로 결심했었다. 이렇게 일찍 나설 계획은 애초에 없던 거다. 그러니까 난 지금 안 갈 거라고.
레니의 서운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나는 차마 뭐라 하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레니도 덩달아 그를 올려다본다. 그런 레니의 곁으로 페터 리제도 공자가 다가왔다.
"벌써 가십니까?"
"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지."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페터 리제도 공자의 말에 그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뭐, 남자들의 인사야 그렇다 치고 문제는 여자들이다. 나는 레니의 서운함을 가볍게 여기고 이대로 나갈 수 없다. 이 남자의 말에 순간 정신줄을 놓을 정도로 놀라긴 했지만 다행이도 아예 늦기 전에 제정신을 차리지 않았는가.
나는 그에게 먼저 돌아가라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내가 미쳐 그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레니아 롱아르 영애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군."
"……유나는 괜찮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