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7 회: # 6 -- >
"응?"
"라니……한테 초대장 거절편지 못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
사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줄곧 찾았던 사람이 있다. 몰래, 은밀히. 하지만 이젠 대놓고 고개를 휙휙 돌려 찾는데도 찾고 싶은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나는 레니에게 물었다.
"아, 응. 못 온다는 편지는 없었는데……."
레니가 말끝을 흐린다.
"못 찾았어?"
"하아~. 응. 안 온 것 같아. 계속 찾아봤는데도 없어. 초대장은 확실히 보낸 거지?"
"그럼. 네가 꼭 보내라고 그랬잖아."
"응, 고마워."
내 부탁에 레니는 아무 연고도 없는 라니에게 초대장을 보내주었다.
사실 꼭 친한 사람에게만 초대장을 보내라는 법은 없지만 라니는 배롤린 남작의 행실 탓에 다른 귀족들로부터 초대장을 잘 받지 못하는 귀족영애 중 한명이었다. 그러니까 귀족들은 평판이 더러운 배롤린 남작 탓에 그들의 자녀들이 배롤린 여식인 라니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반기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배롤린 남작의 집에 머물렀을 때도 라니는 다른 귀족 가(家)의 파티에 잘 참석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의 내가 파티 자체를 꺼려 가지 않는 거라면 라니는 초대 자체를 받지 못해 가지 못하는 거라고나 할까.
"잘 찾아봤어? 정말 안 온 거야?"
"글쎄."
라니야…….
쿡쿡 심장이 쑤셔왔다. 그 아픔이 생생하다. 아마 사람들이 없었다면 손바닥으로 가슴을 꾹- 눌러 달래주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 그랬다간 쓸데없는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것 같아 대신 배를 꾹 눌러주었다. 그러자 두 백작과 어느새 그 근처로 모여든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던 그가 내 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배를 누른 것이 딱히 의미 있는 행동은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그를 마주보진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동안 남자들은 남자들과의 여자들은 여자들과의 대화가 더 이어졌다. 그러다 주위의 마법 조명이 가라앉고 홀에 흐르는 음악을 신호로 오늘의 진정한 주인공과 그의 가족들이 드디어 내게서 그리고 그에게서 떨어져나갔다. 그들에겐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그제야 나는 좀 살 것 같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마치 싸움이라도 하고 온 얼굴이군."
"……그러니까요. 사람의 호기심은 참 무서운 거예요."
목소리에 조금만 더 기운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충분히 힘겹게 들린 모양인지 그가 나를 위로하듯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더한다. 그리고 그런 내가 맘에 들진 않지만, 솔직히 그 손의 온기에 나는 위안을 받았다. 아주 많이.
"조금 쉴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제 곧 시작할 것 같아요."
물론 다른 사람의 약혼식이었다면 시작하든 말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물론 그 전에 참석하지도 않았겠지만. 하지만 레니의 약혼식이다. 피곤하다고 내팽개치고 쉬러갈 수 없는.
단상에 올라선 롱아르 백작과 리제도 백작은 오늘이 두 가문의 결합을 약속하는 날임을 발표하고 참석한 하객들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백작의 인사말 다음으로 레니와 페터 리제도 공자가 단상에 올라 그들의 아버지가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을 또 해댔다.
"얌전빼긴.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표정으로 페터 리제도 곁에 선 레니의 모습은 평소의 것과 달라도 너무 달라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그래도, 그래도 무척이나 예뻐 보였다.
"지금 롱아르 백작부인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
"누가요? 제가요? 그리고 누구요? 롱아르 백작부인이요? 맙소사. 제가 지금 딸을 쳐다보는 것 같은 눈으로 레니를 보고 있다고요?"
말도 안 된다는 내 말에도 그는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여댔다. 그 긍정에 잠시 먼 곳을 응시하듯 눈을 흐렸다……그냥 인정해주었다. 그 말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닐 테니.
"정말 기쁘거든요. 레니가 행복한 것이."
레니가 저렇게 밝은 곳에 당당하게 서있어서, 사람들의 축복을 받고 있어서, 내게도 저런 빛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정말 기뻤다.
"롱아르 영애는 좋은 친구를 뒀군."
그가 말했다.
"그러니까요. 그런데 다들 그걸 몰라준다니까요."
내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말했다.
화동역할은 레니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다던 라미스텡 남작 가(家)의 영양인 줄리나 라미스텡 영애가 맡았다. 그녀는 노래를 불렀는데 목소리가 무척이나 청아하고 맑아 나는 내심 내가 화동으로 나서지 않은 것을 안도했다.
"아는 사이?"
"누구요? 줄리나 라미스텡 영애요?"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열심히 노래 부르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레니한테서 얘기는 몇 번 들은 정도가 다예요. 서로 교제는 하지 않았거든요."
"그렇군."
레니는 내게 억지로 라미스텡 영애를 소개하려 하지 않았고 나도 굳이 소개시켜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실은 레니가 라미스텡 영애에 관해 조심스럽게 내게 운을 뗀 적이 있었다.
"난 사실 줄리가 그렇게 편하지 않아. 그 아이는 좀 계산적인 면이 있거든."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그렇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다 그런 면이 존재한다. 어떤 것이 내게 더 이로운 것인지 판단하고, 내게 이득을 줄 사람이 누구인지 따지고 계산하고. 어린아이들도 그러할진대 어른들은 그리고 귀족들은 더 심하겠지. 이런 파티장이라는 장소 자체가 그런 계산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던가.
그래서다. 레니가 다른 귀족영애들과는 친해지지 못한 이유는. 계산하질 못해서, 야비하지 못해서, 이득을 챙길 줄 몰라서, 바보 같아서. 그래서 레니는 자기에게 전혀 이득을 주지 못하는 나라는 사람과 친구가 되었다.
"너는 뭘 하려 했지?"
"화동역할로요? 음, 피아노를 치려고 했지요."
"잘 치나?"
잘 치냐고? 나는 몇 달 전 구입했던 내 노란색 피아노를 떠올렸다. 어렸을 적 엄마가 쳐 주었던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음색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피아노 위를 떠다녔던 내 손은 내가 봐도 참 예뻤던 것 같다. 사실 난 손 하나는 제법 예쁘다. 얼굴이 예쁘다든가 몸매가 예쁘다든가, 양심상 다른 곳이 예쁘다고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손만은 엄마를 쏘옥 빼닮아서 그런지 얇고 가늘고 늘씬했다.
"어렸을 때 치고 한동안 치지 못해서 손이 많이 굳어버렸어요. 그래도 꽤 연습했더니 몇 곡 정도는 틀리지 않고 칠 수 있게 됐네요."
"흐음."
그러자 그가 얼굴을 찡그린다. 나는 내 말 어디에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건지 몰라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원래 나였다면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하지 않았을 텐데……. 심장이 이 남자를 향해 뛰어대기 시작하고서부턴 이상하게도 그를 전처럼 무심하게 대할 수가 없다. 이건 정말 슬픈 현상이다.
"왜요?"
"아아. 네가 공작성에서 피아노 친 것을 본 적이 없어서."
"……어디에 피아노가 있는 지도 모르는 걸요."
"물어봤다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을. 무심하다 해야 할지, 게으르다 해야 할지 쯧쯧. 미련한 건 확실하군."
그가 중얼거렸다.
"제가 공작성 피아노를 쳐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미련하다는 말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하지만 그보다는 놀람이 먼저다. 허락해 주는 건가? 정말?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을 뿐이다. 그런 그의 눈빛에서 나는 허락의 기운을 읽어낼 수 있었다. 놀람에 동그래진 눈이 곧 스르륵 가라앉더니 배시시 웃음을 자아낸다.
"고마워요. 요즘 들어 예쁜 말을 많이 해 주시네요."
"예쁜 말?"
이보다 더 어이없는 말은 없다는 듯 눈을 찡그리는 그에게 나는 또 웃어보였다. 어쨌든 내겐 그 말이 무척이나 고마웠으니까.
"예쁜 말 하시는 김이 하나만 더 제 부탁 들어주시면 안돼요?"
그가 말해보라는 듯 눈짓한다. 그 긍정적인 반응에 용기를 얻고 내가 그 동안 말할까 말까 고심했던 것을 나는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마법……의 원리? 흠, 어쨌든 마법에 대해서 좀 알고 싶어요. 심오한 거 말고 기초요, 기초. 기초도 제겐 꽤 어렵겠지만."
"마법?"
내 말이 의외였던 걸까? 그의 눈에 확연한 호기심이 일었다. 가만히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그가 내 허리에 두른 손에 힘을 더한다. 그와 동시에 허리로부터 뻗어 나오는 익숙지 않은 기운에 몸이 절로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게 딱히 아프지도 기분이 역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 기운은 맑고 청량했다. 그제야 그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가만히 그의 행동을 내버려 두었다. 오래지 않아 기운은 사라졌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나를 언제 모았지?"
"아……. 어, 어떻게 아셨어요? 혹시 방금 그 기운?"
그가 긍정하듯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세한 소량에 불과하나 마나를 모으긴 모았더군. 아직 그 마나로 뭔가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만, 그래도 마나의 흐름을 느끼고 쌓았다는 것 자체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거겠지. 아예 마나를 느끼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니."
"제게 마나가 있다고요? 조금이지만 어쨌든 있긴 있다고요?"
물론 나는 내게 마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혼자 연습해야 했고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홀로 끙끙거리며 갖은 고생 끝에 얻어낸 이것이 진짜 마나가 맞는지, 제대로 된 확답이 듣고 싶었다. 내 바람이 만들어낸 헛것이 아니라는 확답이.
"마나가 맞아. 내가 그것을 이제야 알아차릴 만큼 아주 희미하긴 해도."
신나서 방방 뛸 것만 같았다. 어린아이 같이 들떠버린 내 모습에 그가 날 놀려대듯 말했지만 난 괜찮았다. 마나가 맞댄다. 마나가 분명하다지 않은가. 내 기분은 지금 하늘을 날고 있었다. 흥분해 달아오른 내 얼굴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정말 모르셨어요? 방금 전에 뭐, 그러니까 어떻게 한 건지 설명은 못하겠지만, 어쨌든 굉장히 간단한 방법으로 알아보셨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