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6 회: # 6 -- >
"뭐가?"
"그러니까 아를랜디 눌리아 영애를 오랫동안 보지 못했거든요. 딱히 보고 싶어서가 아니고요. 그렇게 공작성에 뻔질나게……, 아니 자주 찾아왔었는데 말예요. 요즘은 그렇지 않잖아요."
"쫓아냈다."
내 궁금증에 그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짧게 답한다.
"네?"
하지만 답이 너무 짧았다. 그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다시 말하자면 표면적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니다. 그 속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소리다. 이건 분명히 하고 넘어가겠다.
"올 때마다 시끄러워서 아예 못 오게 출입금지 시켰다."
나는 아를랜디 눌리아가 공작성에 왔을 때마다 부려댔던 패악을 회상하며 한껏 얼굴을 찡그렸다. 그 영애가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댈 때마다 일그러졌던 공작성 시녀들의 얼굴을 떠올리자 잘했구나싶어 절로 고개를 끄덕여진다. 아무리 아를랜디 눌리아 영애가 귀족 가(家)의 영양이고 시녀들은 평민이라 하더라도 잘한 건 잘한 거고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다. 그리고 원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고. 내게 만약 이 남자와 같은 지위와 힘이 있었더라면 나는 애초에 그녀의 출입을 막았을 거다.
"잘하셨어요."
"음?"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들 얼마나 싫어했다고요. 그거 아세요? 아를랜디 눌리아 영애가 소리를 질러댈 때마다 새론은 영애 뒤에서 귀를 막고 서있었다는 거."
감정이라곤 티끌도 드러나지 않는 무표정을 고수하면서도 포즈는 깜찍하게 귀를 막고 서 있던 새론의 모습은……너무 웃겼다. 물론 아를랜디 눌리아가 바로 내 앞에서 소릴 고래고래 질러대고 있는 탓에 대놓고 웃지는 못했었지만.
"흐음. 그럼 너는?"
"저요? 제가 뭐요?"
"아를랜디 눌리아가 오지 않아서 너는 어떠냐고."
대체 내게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걸까? 아를랜디 눌리아 영애가 공작성에 올 때마다 내 양 볼에 그려댔던 그 아름답고도 찬란한 핏줄기와 섹시한 반지 긁힘을 수도 없이 들었을 남자가.
"당연한 걸 왜 묻고 그래요. 저는 좋지요. 당연히 좋지요. 일단 아픈 일 생기지 않아서 좋고, 울화통으로 속병 나지 않을 것 같아서 좋고요. 쓸데없는 말로 귀 더럽히지 않아도 되니 좋고, 무엇보다 전혀 보고 싶지 않은 사람 얼굴보지 않아서 좋아요. 이런 생각하는 게 나쁜 거예요?"
"아니."
내 말에 그가 냉큼 답한다. 그 즉각적인 대답에 기분이 좋아졌다. 어쩐지 내 편을 들어준 것 같아서.
"그런데 걱정이에요."
"뭐가?"
"허리에 손 좀 풀어주세요. 오늘 이후부터 제2의 아를랜디 눌리아 영애들이 수없이 탄생할 것 같아 무서우니까요."
"착각이겠지."
"착각이 아니에요. 저 시선들 좀 봐요, 얼마나 살벌한지. 부디 제게 조금이라도 연민이 있으시거나 그 동안의 관계를 생각해 선처를 해주실 요량이 있으시다면 지금 당장 허리의 손 좀 풀어달라니까요. 그게 저를 살리는 길이에요. 허리에 뮤님의 손이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제2의 아를랜디 눌리아 영애들은 끝도 없이 탄생할 거라구요."
"상상이 거대하군. 박수쳐 주고 싶을 정도야."
사태의 심각성을 조금도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그의 한없이 가벼운 목소리에 나는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는 여자에 대해선 아무 것도 모른다. 여자 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마음에 대해서는 이토록이나 무지하다. 아니면 내가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뜻인가? 만약 그렇다면 결국 죽어나는 건 난데……. 이러나저러나 내겐 곤란한 일투성이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미처 토해내지 못한 불만을 표하고 있는 나를 보며 그가 한심스럽다는 눈빛을 보내온다. 그러는 본인이야 말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단 한번이라도 알브레히트의 이름을 사용한다면, 지금 네 작은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스꽝스런 상상들은 티끌도 남기지 않고 사그라질 것들임을 모르는 건가?"
왜 모르겠는가? 잘 알고 있지.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은 건 내 선택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아. 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그런 의지를 가지게 된 상황 전부를 네 잘못이라 할 수는 없으나, 일단 선택한 이상 그 책임을 넘어선다면 그건 네 과실이 된다."
"……."
그는 내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마치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을 직접 들여다보고 나온 사람처럼.
"나는 네게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의 이름을 써도 된다 허락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허락했다. 괜한 오기 부리지 말고 말 들어."
"늙은이 같긴."
"핫!"
그가 고갤 절래 절래 흔들어댄다. 말도 안 되는 내 악평이 어이없는 모양이다.
"네가 지키고자 하는 그 신념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주어진 무기를 활용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지. 난 그걸 알려준 것뿐이야."
"잘나셨어요."
입술을 오므리고 작게, 아주 작게 속삭였다. 내 귀에도 들릴 듯 말듯 아주 아주 작게.
그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고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도 알겠지만 청개구리 심보마냥 무작정 반박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상하게 반박하고 싶어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혼자 구시렁구시렁 거려댔다. 심통이 나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아서.
아마 이 남자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을 거다. 아니, 사실 들을 줄 알았다. 그의 청각은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것 같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내 분풀이와도 같은 투덜거림에 그의 입 꼬리가 스윽 올라가 있다. 그 모습조차 무척이나 매혹적이어서 순간 심장이 절로 덜컹거려댔다. 내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와 주실 거라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하하하."
다시 한 번 내 마음의 문에 단단한 족쇄를 채우고 있는데 다른 손님을 맞으러 갔던 레니와 페터 리제도 공자가 다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이번엔 오늘 약혼식의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그 주인공 가족들이 같이 왔더랬다. 물론 그들이 이곳으로 발걸음을 한 이유는 절대 나 때문이 아니다. 내 옆에서 아직도 내 허리에 손을 두르고 있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이 남자 때문이다.
"혼자 보내기엔 거슬리는 것들이 너무 많더군요."
어째 내 귀엔 밖에 나가서 맞고 다닌다는 소리로 들린다?
롱아르 백작의 말에 이상한 대답으로 응수한 그의 말에 레니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레니는 아까부터 계속 저런 표정이다.
놀람, 놀람, 놀람!
기대, 기대, 기대!
그래, 놀랄 만도 하겠지. 그래서 아까부터 솔직하게 불어라,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 테고. 아마 조만간 찾아와 오늘 일에 대한 것을 꼬치꼬치 물어댈 거다, 레니는. 하지만 그러지 말아주라. 나도 모르겠다. 정말로 모르겠다. 나도 이 남자의 이 의뭉스런 짓이 뭣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이 기집애야.
하지만 다행이 레니 외에 다른 누구도 이 남자의 대답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은 모양이다. 스캔들로 번질 수도 있었던 말을 롱아르 백작과 리제도 백작은 그저 호탕하게 웃어 넘겨 보였다.
사람들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내 허리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두 백작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이로만 따지자면 두 백작 모두 그의 아버지뻘 되겠지만 직위로 따지자면 그가 제일 높다. 결국 그들은 서로 동등하거나 혹은 백작들이 그에게 더 격식을 차려주는 말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와줘서 고마워요, 유니시이나 영애."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롱아르 백작부인."
두 백작만 찾아온 게 아니다. 두 백작부인도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레니의 어머니, 롱아르 백작부인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날 이후로……처음이죠?"
날 보는 시선에 미안함이 묻어난다.
백작부인이 말하는 그날이 어떤 날인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선 특별히 다른 할 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저 방긋이 웃어보였다.
"그날이라뇨? 무슨 날이요?"
하지만 그날이라는 사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 리제도 백작부인은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그날이라는 단어에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공손하게 리제도 백작부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니시이나라고 합니다."
리제도 백작부인은 오늘 처음 본다. 리제도 백작의 생일 날 연회장에 나왔더라면 볼 수 있었을 테지만, 그날 난 아를랜디 눌리아의 폭력에 연회장은커녕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와 버렸으니까. 그리고 사교활동이라곤 거의 전무한 내가 리제도 백작부인과 친분이 없단 건 그리 의아할 만한 일도 아니다. 롱아르 백작부인은 레니 때문에 몇 번 본 것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롱아르 백작부인 역시 나와 아무 관련 없는 사람일 터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영애. 레니와 친한 사이라고 들었어요. 레니가 영애 자랑을 어찌나 많이 하던지. 호호."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은근슬쩍 내 허리에 놓인 남자, 내 정부의 손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호기심이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못 본 척하며 나는 축하의 말을 전했다.
"좋은 날이에요.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이렇게 만나서 정말 기쁘네요."
"감사합니다."
일부러 의도한 구도는 아니겠지만 그와 나를 중심으로 남자들은 그에게, 여자들은 내게 말을 거는 형식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 옆에 주인공들은 멀뚱멀뚱 서 있고 말이다. 그런 우리들 주위로 사람들이 조금씩 몰려들었지만 대화에는 끼지 못했다.
"유나, 유나. 너 완전히 주목받고 있어."
안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못해 거북스러워질 때였다. 레니가 내게 신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음색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팔꿈치로 나를 쿡쿡 찔러대는 폼이 내가 주목 받는 게 무척이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웃겨죽겠네. 오늘 주인공은 너야, 레니아 롱아르. 너 혹시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은 거니?
"레니야, 오늘은 네 약혼식이거든?"
"응, 알아."
"정말 아는 거야?"
"응, 안다니까."
"근데 주인공이 네가 아닌 것 같잖아."
"킥킥. 어쩔 수 없지. 공작님이 원체 파티에 잘 나타나는 분이 아니시니 사람들이 더 웅성거릴 수밖에. 우리 약혼식에 공작님이 참석하셨다는 소문이 그새 돌았나봐. 초대장을 보내지도 않은 가문에서 서로 오겠다고 연락이 끊이질 않는대."
"헐. 진짜?"
"응. 그래서 레이가 지금 바빠. 아주 많이."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레이준 롱아르 공자를 보지 못했다. 레니의 약혼식에 불참할 사람이 아닌데.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군.
나만큼은 아니라지만 이 남자, 뮤아르노와 역시 사교활동엔 거의 참석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하는 곳에는 참석하겠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라고. 얼굴만 비추고 나온다나 어쩐다나. 그런 그가 각 가문에서 주최하는 개인적인 파티에 발걸음을 할리 만무하다.
그런 이 남자가 중요인사의 결혼식도 아닌 일개 공자와 영애의 약혼식에 참석했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에겐 놀랄만한 일이었을 테지. 게다가 이 남자 자체로도 놀라울진대 그 옆에는 내가 함께 있었다. 2년 동안 그들의 궁금증의 대상이요 호기심의 대상이며 질투의 대상이고 경멸의 대상인 내가.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사건이고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며 두 번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일이란 말인가!
이곳에 온 사람들은 이 남자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려 두 눈 부릅뜨고 우릴 내내 주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타인에게 무관심하다 하더라도 이 정도라면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을 만큼.
그러니까 롱아르 백작부인과 리제도 백작부인이 저런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싶다. 심지어 레니조차 오늘 계속 놀라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나와 가장 가깝게 지내고 있는 레니조차도.
그런 레니는 무시할 수 있다 쳐도.
"……."
진땀나는 구나. 정말 부담스럽다 못해 이젠 무서울 지경이다. 뭐가? 저 두 백작부인의 눈초리가 말이다. 그녀들은 계속해서 내 허리를 주시해대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허리에 놓은 그의 손을. 그리고 힐끔힐끔 그의 얼굴을 곁눈질해댄다.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은 짐작이 가지만 어쨌든 무작정 무시할 수 없는 그녀들의 행동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대체 이 남자는 왜 여기에 참석해서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이랄 점은, 이 남자가 계속 내 곁에 있기 때문인지 아무도 내게 곤란한 질문 따윈 하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레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