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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82화 (8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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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사과하더군."

아까 레니가 얼토당토하지도 않는 이상한 소릴 한 탓이다. 오늘따라 괜스레 신경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고 있는 이 남자 때문에, 아주 조금이지만 애매한 기분을 맛보고 있는 이유는.

하지만 마냥 내 탓만을 할 수도 없는 것이 지금 이 남자는 정말 애매하게 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그가 내 침대에 들어온다는 건 나를 안겠다는 뜻과 동일하다. 그 일이 아니고서야 나와 한 침대에서 밤을 보낼 이유가 없을 테니까. 지금까지 그건 무척이나 당연한 것이었고 실제로도 그는 그렇게 굴어 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뭔가?

그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내 침대에 들어와 놓고선 아직까지 나를 안지도 않았고 또 안을 조짐을 보이지도 않았다. 평소였다면 주저 없이 내 옷부터 벗겨냈을 텐데. 대화를 한다 해도 한두 번 섹스 후 내 진을 쏙 빼놓은 다음에 휴식 겸 또 다시 시작하기 위한 목적으로 대화를 했을 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아직까지 내 옷은 멀쩡했다. 즉, 얌전히 내 몸 위에 걸려있다. 그는 침대 머리 판에 기대앉아서 그저 옆자리에 누워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한 손으로 내 머리칼을 쥐고 손가락에 끼워 이리저리 감고 풀고 장난쳐대며.

"……누가요?"

나는 내 머리칼을 가지고 장난치는 그의 긴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느라 그의 말을 조금 후에야 이해했다.

"레이준 롱아르."

"아아."

그 이름에 나는 이 남자가 꺼내려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레이준 롱아르 공자가 이 남자에게 사과했다는 것이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이 남자가 내게 그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었겠지. 그러니까 필히 그 사과는 내가 레니에게 받았던 그 사과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는 소리다.

"그 사과, 이미 레니한테 질릴 만큼 많이 받았어요."

정말 질리도록 받았다. 매 서찰마다 쓰여 있던 것이 미안하다는 말이었으니까. 레니와는 한 5번 정도의 서찰을 주고받았는데 그 서찰들 내용의 반 이상이 레니의

'미안해, 정말정말 미안해.'

등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까 입으로도 실컷 받았고. 이젠 진심으로 그만 받고 싶다.

"저기,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그 일로 혹 레이준 롱아르 공자한테 무슨 말을 한건, 아니겠죠?"

"……."

"물론 뮤님께서 그러실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해요. 하지만 혹시나, 혹시나 해서 여쭤보는 거예요. 별 다른 말 같은 거 하지 않으셨죠? 그렇죠?"

"……."

"그 때 그 상황을 어떻게 전해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백작부인께서 제게 나쁘게 말씀하신 건 절대 아니거든요. 게다가 백작부인께서 그런 말을 하신 것도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고요. 제가 만약 엄마의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말했을 것 같아요. 분명 저도요. 그만큼 이해가 된다고나 할까? 그리고 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

열심히 변호한다고 변호해 보았지만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없다. 나는 슬쩍 눈동자만 굴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처음 나를 내려다보던 그 시선 그대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말을 무시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다시 시선을 내려 그의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그와 시선을 맞추기 무척이나 곤란한 기분이었기 때문에 그를 오래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다.

손도 예쁘네. 길고 굵직한 선을 지닌 손가락은 여자의 것처럼 곱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아름다웠다. 이 남자, 분명 칼을 잡는 사람인데 손이 왜 이렇게 예쁜 건지 모르겠다. 그 예쁘고 든든한 손가락에 감긴 하늘색 머리칼이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인 냥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꾸준한 시선 때문에 뺨에 구멍이라도 뚫릴 것 같다고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는 내 귀에 그의 시선만큼이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다.

"네?"

"하지만 그 날 넌 혼자 나블링 해안에 갔었지."

"아……."

"아무렇지도 않다라……. 별로 신용이 가지 않는 말인데?"

"하지만, 하지만 지금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요."

정말이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옆으로 누웠던 자세를 돌리고 바로 누운 뒤 그의 얼굴을 제대로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얼굴 위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제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하려 굴지 마세요. 얼굴 뚫어질 것 같으니까요. 정말 진심으로 다시 말할게요. 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어째서?"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레니의 엄마였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라구요. 원래 엄마란 그런 존재니까요."

"흐음."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요, 오히려 제게 직접 그 말을 해준 롱아르 백작부인께 감사하고 있어요. 싫은데 좋은 척 하는 건, 그런 건 제가 더 싫거든요. 싫은데 어쩔 수 없다는 듯 참고 있는 게 저는 훨씬 더 싫다고요. 그리고 백작부인께서는 제게 최대한의 예의를 보여주신 거예요. 적어도 부인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 말을 제게 전하지 않았고 레니를 설득해 화동역할을 취소하게 하지도 않으셨어요. 본인께서 직접, 아무도 통하지 않고 제게 직접 말씀해주셨다고요. 또 정중하기도 했지요. 아마 제가 그 자리에서 화를 냈다면 그 화도 고스란히 받아들이셨을 거예요. 멋진 모습이었어요. 아마 오랜 시간동안 생각하고 결정내린 뒤 제게 말씀하셨던 것일 테죠. 그 껄끄러움을 피하지 않고 직접 부딪혀주셨다는 건 저를 만만하게 여겨서가 결코 아니에요. 오히려 저를 존중해 주신거세요. 본인께서 말하지 않는다면 그게 제겐 더 큰 상처가 될 것임을 알고 행동 하신 거라고요."

"……."

"네? 그건 말이에요, 하기 힘든 것들은 모조리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기고 마는 비겁한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용감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해요."

"용감?"

내가 사용한 과장된 단어가 웃겼던지 그가 별 소리를 다 듣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거 아닌 것 같은 행동에도 용감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알아두세요."

"하!"

"뮤님께서는 하기 싫은 말을, 그것도 본인 앞에서 해야 하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모르시죠? 당연할 거예요. 뮤님은 황실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숙일 필요도 또 자신을 낮게 일컬을 필요도 없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니까요."

내 말에 그가 코웃음을 친다. 가볍고 낮게.

"뭘 모르는군. 필요 하다면 나는 얼마든지 내 자신을 낮출 수 있다."

"어쩔 수 없지 자신을 낮춰야 하는 강압과 필요에 의해 자신을 낮추는 자유를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요?"

"상황은 그렇겠지. 하지만 높은 지위에 있다고 해서 언제나 자율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건 아니다. 반대로 지위가 낮다 해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 반드시 강압이라고 할 수도 없지. 네 스스로를 돌아보지 그래?"

그의 말에 나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켜본다.

"저요?"

내 놀람에 그가 피식 웃었다.

"네가 네 스스로를 위해 혹은 네 목적을 위해 내 앞에서 너를 낮추는 것을, 넌 강압이라 말할 텐가?"

"그건."

"이번 라니 배롤린의 약혼 건을 두고 나와 베팅을 걸던 것도 그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지."

"!"

"아닌가? 넌 네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내게 고갤 숙였다. 그건 네 의지고 그러므로 그건 네 자율이다. 네가 그런 의지를 가지게 된 상황이 네 잘못은 아니나, 일단 선택한 이상 그 책임을 넘어선다면 그건 네 잘못이 되겠지. 그 교환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고 행동하는 게 너란 여자야. 그렇지 않은가? 사실 그런 네 행동은 어중간한 놈들보다 훨씬 나아. 주제파악도 못하고 스스로 파멸의 향해 달려가는 놈들의 현재 지위가 너보다 높다 해서, 그런 그들에게 네 자신을 낮춘다 해서, 너는 그것을 강압이라 부를 셈인가? 그 배롤린 남작에게?"

"……."

"아니지. 그건 더는 강압이 아니지. 그런 놈들에게 고개를 조아려보였다 해서 그게 비열하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원래 감춰진 손톱이 더 날카롭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야 깨달아. 참으로 어리석고 미련하게도."

"……."

"유나. 똑똑하게 굴어야 할 때와 미련하게 굴어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안다는 건 능력이다. 그 것을 어느 정도는 사용할 줄 아는 너이기에 그런 네가 스스로 자신을 낮춘다 할지라도 비굴하게 낮춘 것이라 그 누구도 여길 수는 없을 거다. 그로인해 넌 분명 네가 원하는 것을 얻어 냈을 테니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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