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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79화 (79/206)

< -- 79 회: # 6 -- >

"여기서 보니까 정말 색다른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앞에 서있는 레니를 나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진짜로 왔구나 싶어서. 물론 새론의 말을 의심한 건 아니지만 왠지 현실감이 부족했다고나 할까?

"레이랑 같이 왔어. 레이는 공작님께 갔고."

외출을 하려고 할 때마다 젠 경이나 루이 토킨 공자, 사키 보좌관님이나 호세 보좌관님들 중 한명을 호위기사로 붙여주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 계속되는 바람에 나는 외출하고 싶다는 말 한마디를 쉬이 꺼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게 왜 불편한 일인가 하면 그 네 명이 바로 그의 최측근들이기 때문이다. 굳이 호위기사를 붙여야만 한다면 그냥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에 속한 일반기사를 붙여줘도 될 법하건만 그 남자는 꼭 공작성에 출근해 있는 자기의 측근들 중 한명을 붙여주었고 그 결과 타의 아닌 타의로 요 며칠 나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호위기사 붙여준다고 더는 징징거리지 않을 게요. 그러니까 그냥 다른 공작 가(家) 기사들 중 한명을 붙여주세요.>

<못 믿겠군. 이미 한 번 떼어놓고 도망친 전적이 있지 않나.>

<…….>

당연히 화가 났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건지도 모르겠고.

참다 참다 그것이 폭발한 것이 어제였다. 레니의 약혼식이 불과 일주일 뒤로 다가왔는데 레니를 쉬이 만날 수 없었던 것이 분노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날 가둬두려고 여기로 불렀어요? 아니면 미치게 만들려고? 이게 대체 뭐예요?"

친구를 만나러 가지도 못하게 하느냐고 신경질 적으로 소리치던 내게 그는 아주 깔끔하게 한 마디 던졌다.

"외출해."

"그 외출이 부담스러우니까 이러잖아요!"

"여기로 초대하던가."

"그러니까 레니의 약혼식이……예?"

"여기로 초대해서 만나라고."

"……그래도 돼요?"

"마음껏."

그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곤 상상치도 못했다. 이건 또 무슨 속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지우지 못하고 꽤 오랫동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결국 그 어떤 것도 나는 읽어내지 못했다. 나중에 이 일로 문제가 생겨 화를 낸다 해도 먼저 초대하란 말을 꺼낸 건 이 집 주인이니 배 째라는 심정으로 새론에게 부탁해 레니에게 초대장을 보낸 것이 어제 저녁이다.

그리고 오늘.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뒹굴 거리고 있는 내게 새론이 전해주었다. 레니가 방문했노라고.

끔뻑끔뻑.

그러니까 지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레니뿐만이 아니라는 거다. 잘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공작성으로 들어오고 나서 레니와 나는 서찰로 서로 하고픈 얘기를 주고받아야 했다. 한 번은 레니의 편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사교계에 난리가 났다고. 그건 레니의 편지를 읽지 않았어도 이미 짐작했던 사항이다. 아마 그 남자가 내게 조건을 제시했던 그 순간부터. 난리 안 났을 리가 없지.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에 드디어 안주인이 들어서는 것인가!?>

허황된 제목으로 가득한 가십지들이 수도 없이 만들어졌고 또 어마어마하게 팔려나갔다는 소식이 레니의 편지에 쓰여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해주던 레니의 놀라움 역시 하늘을 찔러댔다. 레니는 왜 진작 자기에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징징거려댔지만 나는 그에 대한 답으로 단 한 줄의 답장만을 써서 보냈다.

<말하러 갔었다.>

천천히 내 앞 소파에 앉던 레니는 새론이 문을 닫자마자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그래서 봤어?"

"뭘?"

"공작님 자는 모습 말야. 봤어?"

"엥?"

이놈의 기집애.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묻는 게 왜 이 모양이야?

이보다 더 황당할 수 없다는 내 표정이 적나라했음에도 불구하고 레니의 얼굴은 무척이나 심란해보였다. 그리고 진지했다. 뜻하지 않은 그 표정에 내가 굳어지는 것도 잠시. 도무지 저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파헤쳐낼 자신이 없었기에 나는 한마디 뚝뚝 끊어 뱉는 듯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이상해. 빨리 불어!"

가끔 레니에게는 어느 정도 협박을 해야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이 사실을 페터 리제도 공자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레니의 행동을 봐서 나중에 몰래 알려줄 의향이 얼마든지 있다.

"뭐야? 응? 넌 대체! 왜! 그게 그렇게도 궁금한 거야?"

일부러 만들어낸 내 서늘한 눈초리에 찔끔한 레니가 몇 번이고 움찔움찔 거려댄다. 나름 애교랍시고 하는 행동이지만 내가 남자도 아니고 저런 애교에 넘어가겠는가. 더 차가운 기운을 팍팍 내뿜어 주자 레니가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못마땅함이 가득한 내 표정에 기어코 레니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그 한숨 소리에 나는 승리의 미소를 애써 가라앉혀야 했다. 여기서 물거품이 되게 할 수는 없지. 저런 식의 한숨은 레니가 포기했을 때 짓는 일종의 신호다.

"기집애. 무섭게 굴기는."

"안 그러게 생겼어? 네가 요 몇 달간 봤냐는 둥 못 봤냐는 둥 이상한 질문으로 나를 얼마나 어이없게 만들었는지 알아? 대체 뭐야? 응?"

"별거 아냐."

"그 별거 아닌게 대체 뭔데?"

"별거 아니라니까!"

"한대 맞고 말할래, 그냥 말할래!"

"……성질 더럽긴. 진짜 별거 아니야. 그냥, 소설에서…… 읽었단 말야."

갑자기 웬 소설? 생뚱맞은 이야기의 도입부에 눈썹이 절로 치켜 올라갔지만 레니가 서둘러 두 손으로 진정하라는 모션을 취해 보여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크흠. 알브레히트 공작님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크흠. 그런 남자 주인공이 있었는데."

레니의 조심스러운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아아, 괜히 물어봤다. 저 머릿속에서 만들어 지는 상상력이 거기서 거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또 넘어가 버리고 말았구나. 꿈과 사랑이 가득한 환상속의 러브스토리 애독자 레니 롱아르 납시는 순간이었다.

레니 덕분에 만만치 않게 로맨스 소설을 읽어본 결과 나는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그건 바로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죄다 잘났다는 것. 못하는 것도 없고 뭐 하나 빠지는 것도 없는 매력덩어리들이라는 거다.

문제는 그들은 소설 속의 주인공이고 알브레히트 공작은 현실의 사람이라는 거지. 그 예로 내 정부의 성격은 소설 속의 남주들처럼 다정다감하지 않으며 자상하지도 않다. 결코! 또한 그 남자는 결정적으로 로맨티스트도 아닐뿐더러 눈빛 속에 애정을 가득 담고 날 쳐다보지도 않는다. 단 하나 비슷한 점이 있다면 그건 외모랄까. 끝내주게 잘생긴 그 남자의 외모는 오히려 소설 속의 남자주인공들보다 훨씬 더 현실감이 없는 것이었다.

"뭐, 어쨌든. 거기서 읽었는데. 크흠. 공작님과 비……슷한 그 남자 주인공이 말이지. 여인과 관계는 가져도 잠은 자지 않아. 여인과 관계를 갖는 그 순간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고 해. 심지어 칼이나 방어 마법도구 같은 것을 옆에 두고 관계를 맺기도 한대. 그런데 그렇게까지 철저하던 그가 정말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고 부터는 달라지거든. 그 여인과 관계를 나누고 함께 잠을 자기 시작하지. 굳이 관계를 맺지 않아도 같이 밤을 보내기도 하고. 그 남자 주인공과 관계를 맺었던 다른 수많은 여인들은 그 남자의 자는 모습 따윈 몰라. 왜냐하면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오로지 여자 주인공만 그 모습을 알아."

순수하구나, 레니. 내 생각보다 너는 훨씬 더 순수한 아이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왠지, 그러니까……상황이 좀, 그러니까, 너와 비슷한 점이 있으니까……."

어렵게 아주 어렵게 레니가 말을 고른다. 하지만 굳이 레니가 말을 고르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나는 레니의 말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레니는 지금까지 그 질문 하나로 내가 공작의 수많은 여인 중 하나가 되느냐 아니면 그의 사랑하는 여인이 되느냐를 알아본 거다. 소설 속 남자주인공의 행동을 견본삼아 알브레히트 공작의 마음을 알아보려 한 게지. 고작 잠자리에 무기 여부를 놓고, 잠을 같이 자느냐 자지 않느냐의 두 가지 답안에서 말이다.

레니야, 이 얘기는 절대 외부로 유출되어선 안 되겠다. 그 남자가 네 말을 들으면 넌 정말 죽을 지도 모르겠어.

"그 소설 제목이 뭔데?"

"아, 그건."

"솔직히 소설 제목 기억도 못하잖아, 너. 내용이 너무 진부하니 다른 고만고만한 소설들과 구별도 안 돼지. 야! 그 비슷한 내용을 난 적어도 3개 이상은 본 것 같다."

"……로맨스 소설은 원래 진부해. 쓰고자 하는 게 오로지 사랑인데 벗어나봤자 얼마나 벗어나겠니?"

어쩐지 레니는 기분이 좀 나빠 보였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소릴 들은 나보다야 더 불쾌하랴.

"알브레히트 공작께서 너무 바쁘다는 생각은 안 해? 내가 기상하기도 전에 먼저 기상하는 바람에 내가 공작의 자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다는 생각은?"

"……그렇기엔 2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지 않니? 어떻게 2년 동안 한 번도 못 봐?"

레니의 반박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이다. 그 남자가 정말 내 곁에서 잠을 취했다면 그 동안 단 한 번도 자는 모습을 보지 못한 건 내가 심한 잠보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는 내 곁에서 단 한 번도 잠을 자지 않았다는 결론뿐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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