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7 회: # 5-5 그 남자 -- >
"라이니 공국 하펜젤러 백작 가(家)의 사람이었군."
"네. 아가씨의 아버지는 하펜젤러 백작 가(家)의 이남 중 장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가씨의 어머니는 라이니 공국 네랜 백작 가(家)의 1남 2녀 중 첫째였다고 합니다."
호세는 자신이 알아본 사항들을 정리한 종이를 주군의 책상에 올려놓고 그 앞으로 쭉 밀었다. 조사한 내용은 한 장으로 정리되었지만 내용은 마냥 가볍지 않은 것들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혹은 본인조차 몰랐던 그 그림자에 관련된 이야기가 그곳에 적혀있었다.
"흐음. 꽤나 곤란한 상황이었나 봐. 대공과의 파혼이라. 하긴 이 정도 크기의 사태였다면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겠어. 라이니 공국에서의 모든 것을 져버리고 루벤스 제국 평민의 삶을 택한 건 어떻게 보면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겠군."
<우리 아빠는요. 엄마를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해 보았던 사람이에요. 엄마를 제외한 모든 것을요. 그리고 우리 엄마는요. 아빠를 위해서 적어도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모든 것을 놓고 아빠를 따라온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죠. 물론 사랑을 위해서요.>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전 그런 두 분의 딸이라구요.>
담담하지만 그리움이 가득했던 목소리도.
그래, 네 말대로 네 부모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이곳으로 왔다. 그 사랑이란 것 때문에.
사랑이라.
뮤의 입가가 호선을 그린다. 그런 앙큼한 단어를 믿고 있을 줄이야.
뮤는 뜻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뜻하지도 않은 단어를 들었기에 사실 놀랐더랬다. 고작 10살까지만 행복했을 그녀다. 10살까지만 사랑을 듬뿍 받았겠지. 그 후로 그녀는 사랑이란 이름 그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을 터. 그 배롤린 남작 가(家)로 들어가 결코 아름답지 않은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가 과연 사랑이라는 말을 고이 간직하고 있으리라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그녀가 입 밖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내뱉었을 때의 그 얼굴은 뮤로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 얼굴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행복해 보였고 빛이 났다. 그리고 아무리 좋게 말한다 해도 뮤는 지금껏 그렇게 행복하고 빛이 나도록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하긴, 처음부터 아양 따위를 떨어대던 여자는 아니었지.
오히려 그녀는 목석같았다. 단단하고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하지만 뮤에게는 한없이 우스운 것이었다. 그 숨길 수 없는 떨림을 보았을 땐 더더욱 더. 애써 꼿꼿이 피려던 등이었음을, 애써 굳건히 다잡은 마음이었음을 뮤는 처음 보았을 때 진즉 알아차렸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렸고 그는 뛰어났다.
"훗. 사랑?"
입술이 뒤틀린다. 같잖은 단어에 짜증이 솟구쳐댔다. 그녀는 분명 자기의 입으로 자신의 몸을 '팔았다'고 그에게 말한 전적이 있는 여자다. 아주 담담하게 그리 말했었지. 자신의 힘이 너무 미약하니 어쩔 수 없노라고. 약한 스스로를 탓해야지 누굴 탓하겠느냐고 그녀는 그리 말하며 꼿꼿하게 서 있었다.
"유치하긴."
하여간 하는 짓이 맘에 들지 않는 것들 투성이다. 그 입에서 나온 것들도 맘에 들지 않는 건 매한가지고.
"어젯밤 별장으로 누군가 잠입한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피해는?"
"전무합니다."
"잠입했다 원하는 목적이 없으니 그냥 간 모양이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계속 신경에 거슬려 결국 그녀를 공작성으로 들여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머물었던 별장에 귀찮기만 한 벌레들이 몰려드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탓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내 품에서 보호하는게 낫지.
확실히 그녀가 공작성에 머물고 나서부턴 한결 마음이 편해진 건 사실이었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조소하고 말았지만.
뮤는 자신의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호세에게 그만 나가보라는 손짓을 해보이곤 의자 뒤로 한껏 몸을 깊숙이 묻었다. 어쩐지 피곤이 몰려왔다.
"그런 말을 꺼낼 수 있는 여자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사랑이라, 사랑이라.
어느 순간부터 꼿꼿한 그 등이 맘에 들지 않았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은 그 성정 또한 맘에 들지 않았다.
오냐, 날 버려봐라. 얼마든지 가지고 놀아라. 하지만 네가 날 버리는 그 순간이 내게는 바로 자유다. 나는 훨훨 날아갈 거다.
눈빛으로 말하는 그녀의 의지에 그의 눈썹이 기묘하게 일그러졌어도 그녀는 단 한 번의 눈짓도 그에게 주지 않았더랬다. 그렇게 냉정하고, 그렇게 하나 밖에 모르는 여자의 입에서 사랑이라니, 사랑이라니!
하! 어떻게 그런 단어가 그녀의 입 밖으로 튀어나올 수 있는 거지?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따분한 여자라는 사실을 안 이상 그녀는 귀찮은 여자가 되었다. 아니 그리 됐어야 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황홀한 눈빛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내뱉던 그녀의 그 황홀 속에는 그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 웃기게도 그 사실이 뮤의 심기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그가 질색으로 여기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당당히 내뱉던 여자는 그 말을 하기 전과 조금도 다르게 굴지 않았다.
끈적끈적하고 귀찮게 굴던 여자들이 하나같이 내뱉던 그 사랑이라는 것과 그녀가 내뱉던 그 것은 과연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 걸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짜증나는 단어를 뱉어낸 자신의 연인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뮤 본인이었다.
정말 어이없게도!
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며칠 전 겐두라 백작 가(家)로 향한 은밀한 움직임을 젠이 포착했다. 조만간 모든 꼬리가 밟히고 사건의 전말이 드러날 것이다. 어차피 그들의 계획은 모두 탄로 났다. 마법석을 보석으로 위장하려했던 계획은 이 상황에서는 참신하다고도 해줄 수 있었겠지만 그저 그 뿐이다. 루노에 있는 모든 살롱을 뒤져 보석으로 위장된 마법석을 찾아냈다. 방법을 안 이상 찾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다. 그리고 뮤는 그것들을 모조리 다 자신의 여자에게 던져주었다. 의심어린 시선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던 말간 하늘색 눈동자가 떠오르자 어쩐지 웃음이 난다.
뮤는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방으로 갔다.
쌕- 쌕-.
갑갑한 것을 싫어하는 그녀는 커튼 치는 것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랬다. 그래서 별장에서 그녀가 요구한 단 한 가지는 아침에 햇살이 들어와도 수면에 방해받지 않게끔 침대를 창가에서 멀리 띄워달라는 것, 그 것 단 한가지였다고. 그래서 이 방도 그리 해주었다. 갑갑한 것을 싫어하는 그녀가 좋아하도록, 창은 무척이나 컸지만 침대는 방 안쪽에 놓여있어 아침에 햇살이 들어와도 침대까진 닿지 않는다.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이불을 들춰 그 안으로 파고들자 따뜻하고 보드라운 몸이 품 안에 쏙 안긴다. 잠시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숨을 들이키던 뮤가 하나씩 그녀의 옷자락을 풀어헤쳤다. 잠옷 끈 하나 잡아끌었을 뿐인데 옷자락은 너무나도 쉽게 흘러내렸다.
손바닥으로 그녀의 어깨와 허리를 가만히 쓰다듬다 그녀를 바로 눕히고 그 위로 올라탔다. 뮤의 무게에 찌푸려진 인상이 꽤나 귀여웠다. 뮤는 두 손으로 자기 여자의 뺨을 감싸고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음."
키스가 길어지자 잠결에도 그녀가 막힌 숨을 내쉬어댄다. 갑갑해하고 있다. 하지만 뮤는 그 갑갑함을 풀어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몸을 압박하는 그의 손길을 느꼈는지 그녀의 하늘빛 눈동자가 천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잠의 흔적이 가득 묻어난 몽롱한 그 눈동자에 뮤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잠결이어도 내 손을 거부하지 않을 만큼 익숙해 졌다 이건가?
처음 몇 달간 잠든 그녀에게 손을 댔다가 화들짝 놀라 깨던 그녀를 기억한다. 뮤는 그녀의 몸이 자신의 손길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몇 시예요?"
잠긴 목소리에서도 앳된 음색이 다 가려지지 않는다. 그건 그녀의 나이를 확실히 인지시키는 것 같아 그리 맘에 들지 않는다.
"글쎄."
그래서 툭 하니 말을 내뱉고 뮤는 다시 그녀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내렸다. 말캉말캉한 입술을 담담하니 맛보던 뮤가 그녀의 아랫입술을 강하게 빨아들이자 그녀가 작게 몸부림을 쳐 댔다. 그 몸부림을 무시하고 계속 달콤한 그 입술을 탐했다. 어차피 안으러왔다. 그러니 망설일 필요 따윈 없다. 하지만 계속되는 그녀의 몸부림에 뮤가 떼기 싫은 입술을 억지로 떼고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굉장히 난감한 표정으로 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소소꽃차를 마시던 그 때도, 마시지 못하게 한 그 후에도 그녀는 타당한 이유 없이는 단 한 번도 그를 거부한 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날엔 뮤가 알아서 하지 않았고 그녀가 원하지 않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깔끔하게 그만두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강한 거부의 몸부림은 그에게도 처음이지만 그녀에게도 처음 있는 일이다. 의아함을 담아 쳐다보자 그녀의 입술이 열릴 듯 말듯 망설인다.
"말해."
어차피 안을 생각이다. 게다가 뮤의 몸은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의 말을 재촉하자 한참을 더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위험한 날이에요."
"뭐?"
"……임신가능성이 높은 날이라구요."
소소꽃차를 안마시고 있잖아요.
작게 그녀가 말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