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6 회: #5 -- >
"고맙긴요."
코를 찡긋하며 웃는 그 얼굴이 한없이 순박해 나는 손가락으로 준의 콧등을 살짝 집어주었다. 그러자 아프지 않을 것이 분명한데도 준은 아프다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 엄살이 어릴 적 나와 닮아있어 나는 또 슬쩍 웃으며 동전 5개를 준의 손에 쥐어주었다. 준의 눈이 한순간에 동그래졌다.
"너무 많아요."
"받아. 오늘 무거웠다면서."
"거짓말이에요. 장난으로 한 말이라고요. 하나도 안 무거웠어요. 정말이에요."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치는 준에게 나는 다정히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말했지? 여자 친구 과자라도 사주라고."
"여자 친구 같은 거 없다니까요!"
목소리가 커진다. 새빨개진 그 얼굴에 가슴께가 간질거려 나는 기어코 소리 내서 크게 웃고야 말았다. 내 박장대소에 준이 당황하며 더 얼굴을 붉혔지만 이미 나한테 뽀록났다, 너? 준이 자기는 여자 친구가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준이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준이 9살이지?"
"네."
어쩐지 퉁퉁 거리는 목소리다. 내가 놀린 것 때문에 삐친 모양이다. 그런 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만히 입을 열었다.
"누나 첫 남자친구는 내가 8살 때였는데."
"네?"
"내 첫 남자친구. 나는 8살 때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사귀었었거든."
손가락으로 나를 콕 가리키며 말하자 놀래 동그래진 준의 눈동자가 점점 반짝이기 시작했다.
"아, 아가씨께서도 남자친구를 사귀었어요?"
"그럼."
"그, 그렇지만 공작님이 있는데……아."
신나게 말을 뱉어내려던 준이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멈추곤 나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 큰일 났다는 표정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주고는 다시 한 번 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준, 좋아하는 아이가 있으면 고백하는 거야. 멍청하게 가만히 있다가 다른 놈한테 뺏기지 말고."
"……걔는 이미 딴 애를 좋아해요."
시무룩해진 준의 얼굴 위로 그리운 쿤의 얼굴이 겹쳐졌다. 이젠 제대로 기억나지 않은 그 아이의 얼굴이.
쿤, 너는 나를 어떤 표정으로 봤었니? 어떤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었지? 바보 같은 나는 그 무엇 하나 제대로 기억나는 게 없어서 많이 슬퍼. 유일하게 남겨진 쿤의 선명한 영상은 처음 쿤이 우리 집에 왔을 때 들고 있었던 '텔' 꽃다발뿐이다. 그리고 그 꽃다발을 쥐며 떨고 있었던 쿤의 작은 손만이-, 그 손만이 내 기억 속에 남겨져 있었다.
"뭐 어때."
"예?"
"차여도 괜찮지 않아?"
"……차이면 슬프잖아요."
차이면 슬프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소중했던 사랑을 입 밖으로 꺼내보지도 못했던 사람은 더 슬프기 마련이다. 그걸 네가 알기엔 넌 아직 어리겠지만, 준아.
"이미 그 둘이 사귀고 있는 거야? 네가 좋아하는 여자아이랑 그 여자아기가 좋아하고 있다는 남자아이가?"
"예? 아뇨, 그건 아직."
하지만 곧 그렇게 될지도 모르죠. 걘 무척 귀엽거든요. 준이 작게 속삭인다.
"그럼 그 둘이 사귀기 전에 먼저 고백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안 그래? 설령 차인다 해도 그게 더 행복할 것 같아."
"어째서요?"
"고백했다는 건, 네가 네 감정에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니까. 먼 훗날 준 네가 지금의 너를 떠올렸을 때 후회만을 남기고 싶진 않을 거야, 분명. 적어도 누나는 그렇게 생각한단다. 하지만 이건 누나의 생각일 뿐이니까, 준 너는 네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한 대로 행동하렴. 알았지?"
"음, 후회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어른이 되었을 때 후회하게 되나요?"
"응, 누난 그랬어."
하지만 그 사실을 몰랐기에 어린아이라는 거다. 그 때 그걸 알았다면 나는 아이가 아닌 어른이었겠지. 그래서 그 때의 추억이 더 안타까운 건 아닐까? 한없이 아쉽고, 아깝고 아련하기 때문에.
"후회……."
마치 그런 단어는 처음 들어봤다는 듯 멍하니 후회라는 단어를 반복하는 준의 얼굴을 보며 나는 조용히 마차에 올랐다.
"그럼 힘내. 다음에 보자, 준."
공작성으로 돌아가느냐는 마부의 물음에 간단히 고갯짓을 해보였다. 마부에게는 내 고갯짓이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창으로 내 의사를 확인한 루이 토킨 공자가 마부에게 내 뜻을 전해준다.
마차는 곧 움직였다. 부드럽게.
덜거덕덜거덕 마차 바퀴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리움을 회상했다.
쿤은, 쿤은 후회하지 않았을 거다. 쿤은 누구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고 또 진솔하게 행동했었으니까. 그렇게까지 솔직하기는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될 만큼, 그만큼 쿤은 늘 내게 솔직했다. 후회는 내가 한다. 좀 더 내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걸, 쿤에게 조금만 더 잘해줄걸 하고. 만약 그랬더라면 지금 떠올릴 수 있는 쿤과의 추억이 더 많지 않았을까, 그렇게 나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18살의 쿤은, 지금의 나를 생각이나 해줄까?
헤어지기 전날 밤을 제외하고 쿤은 항상 어른스러웠다. 아니, 그 날 밤에도 사실 그는 어른스러웠다. 단지 그 모든 감정을 차분히 다스리기엔 아직은 많이 어렸었던 것뿐이다.
"잠깐만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내가 마차를 멈춰 세웠다. 내 목소리에 마차는 곧 멈춰 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창가로 다가온 루이 토킨 공자가 내게 물었다. 나는 문득 내 시선을 잡아끈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잠시 내릴게요."
갑작스런 내 요구에도 루이 토킨 공자는 짜증도 귀찮다는 표정도 짓지 않았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미안하다. 저렇게 바쁜 남자의 다리를 또 붙잡고 말았으니. 저 남자는 지금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일을 처리하고 싶어 할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은 내색 하나 없는 걸 보아하면 그는 예의가 몸에 밴 남자임이 틀림없다. 불필요하다 여겨지나 무시할 수 없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가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리고 회상하느라 깜빡할 뻔했던 곳, 잡화점에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코튼원단이나 공단원단으로 된 리본 좀 보여주세요. 레자로 된 것도 괜찮고 모피나 아님 데님으로 된 거나, 어쨌든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냥 다 보여주세요."
"무엇을 만들 계획이십니까?"
"부케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안쪽 구석에서 큰 상자를 꺼낸 주인장은 그 상자를 열어 내가 원하는 리본을 보여주었다. 다양한 색, 다양한 그림이 수놓인 리본은 하나하나가 모두 고급스럽고 예뻤다. 그 중에서 나는 투톤플라워 원단리본과 파스텔 민무늬 원단리본과 벨벳 칼라 원단리본을 고르고 그 외에도 노끈이니 레이스니 등등 부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구입했다.
레니를 위해서다. 레니의 화동역할은 해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친구의 약혼식 날 아무것도 안 해줄 수는 없으니까. 그나마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게 다행이지. 그것마저 없었다면 정말 슬펐을 것 같다.
결혼식 날엔 고급 살롱에서 준비한 부케를 들 테니 약혼식 날에라도 내가 만든 부케를 쥐어줘야지.
그렇게 결정하고 이것저것 사가지고 나오자 루이 토킨 공자가 멍하니 서 있었다. 문 바로 밖에 서 있던 것을 보아하니 나를 따라서 잡화점에 들어오려고 했던 것 같은데, 대체 무엇을 봤기에 저렇게 넋이 나간 걸까? 그 궁금증에 그의 시선의 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혹, 그 남자, 내 정부가 온 건 아닐까 추측하며.
하지만…….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라니."
라니였다. 라니 배롤린. 내 소중한 사람.
내가 서 있는 이곳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라니가 서 있었다. 등을 꼿꼿이 펴고 우아하고 품격 있게. 그런 라니의 주위를 몇 명의 영애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몇몇은 나도 아는 영애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라니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대놓고 그 무리에서 배척하는 느낌. 깔보고 무시하고. 그러던 중 한 명이 라니의 레이스를 붙잡고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한다. 그 웃음을 시작으로 곁에 선 다른 영애들도 따라 웃어댔다. 대화가 들리지 않아도 그 주위 근처에 있지 않았어도, 이 멀리서도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저들은 어쩜 저리도 바보 같을까? 지금 너희들이 감히 누굴 비웃는 거니? 응? 너희 따위가 라니에게 견줄 수나 있다고 생각해?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하나같이 화사하고 사치스러운 것. 라니가 입고 있는 옷은 그 영애들의 그것들보다는 화려하지 않은 것이나 하지만 진심으로 단언컨대 그들 중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라니고 가장 고귀해 보이는 여자도 라니다. 주렁주렁 레이스니 보석이니 아무리 많이 달려있다 할지라도 결국 그 옷을 빛내는 건 옷을 입은 사람이지 보석 따위가 아니다. 왜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엊그제 밤이었다. 두 번의 관계를 끝난 후, 내 정부는 내게 말했다. 라니 배롤린과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의 약혼식 일은 확실히 처리되었노라고. 두 번 다시 라니 배롤린과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이 연결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또한 배롤린 남작이 라니 배롤린를 팔려는 행위도 영영 없을 거라고.
그가 어떻게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했는지는 모른다. 사실 관심도 없다. 오로지 라니만 무사하면 되었다고 그리 생각했다. 그랬다. 내겐 결론만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진심을 다해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내 인사를 받지 않았다.
"어차피 조건이었으니 됐다."
그 말은 내가 원하는 바를 그가 이뤄주었으니 나 역시도 그가 내건 조건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어차피 그가 그리 강조하지 않아도 나는 그와의 조건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속마음이야 어쨌든 그를 부를 때는 꼬박꼬박 뮤님이라고 이름을 불렀고, 얌전히 공작성에 머무르고 있으며 소소꽃차를 마시지 않았다. 아니 마시지 못했다. 아무도 내 앞에서 소소꽃차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고 나 역시 몰래 라도 찾지 않았다.
까르륵.
멀리서도 영애들의 웃음소리가 선명히 들려오는 듯하다. 나는 영애들의 빈정거림에도 단 한 치의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는 라니를 쳐다보다 겨우 고개를 돌리고 마차에 올라섰다.
라니에게, 라니에게 저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저들이 뭐라고 한다 해도 라니는 상처를 받을지언정 무너지지는 않는다. 라니가 무너질 만큼 힘겨운 상황이란 건 저딴 것이 아니다.
게다가 내가 라니를 도울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대체 내가 누굴 돕는단 말인가. 여기서 내가 돕겠다 나선다면 라니의 입장은 더 우스워질 것이 뻔한 것을. 무엇보다 라니는 내게 동정을 받은 거라 여기고 도리어 화를 낼 지도 모른다.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겨들었다.
그래도 라니, 나는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내가 마차에 오르자 곧 마차가 움직였다.
"공작성으로 모시겠습니다."
"……."
루이 토킨 공자가 말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차는 라니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나는 창밖으로 냉정하고 빈틈없는 라니의 표정을 보았다. 라니는 알고 있었을 거다. 자신의 아버지가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에게 그녀를 팔려했다는 것을.
넌 그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공작성의 마차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게다가 화원들이 쭉 늘어선 이 골목길에 공작성 마차를 보았다는 건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나라는 것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다고 한다.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레니가 내게 해준 말이다.
시끄러운 영애들이 이 마차에 새겨진 마크를 보고 호들갑 떨어대는 목소리가 창문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그 호들갑에 라니도 이 마차를 보았겠지. 그리고 알았을 거다. 그 안에 내가 타고 있다는 것을.
내가 가까이 있었다는 걸 안 너는 조금이라도 내 존재가 반가웠을까? 난 반가웠어. 비록 그 모습이 상처 가득한 것이었다 해도.
……라니야, 라니야.
나는 네가 너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