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3 회: #5 -- >
조용히 내가 물었다. 그는 탐색하듯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장담컨대 내 표정에선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거다. 지금 난 진심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다. 즉 체념상태였다. 그리고 체념 따윈 발견해봤자 소용없는 것이고.
"……내가 네게는 화를 내지 않을 거라 여기고 있는 건가?"
시간이 조금 흐르고 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음색은 지독히도 낮았다. 시선을 다시 그에게 돌렸을 때 시선에 잡힌 것은 입술을 단단히 다물고 있는 그의 얼굴이었다. 어이없다는 그 얼굴 위로 뚜렷이 내려앉은 건 분노가 분명하다. 냉정하고 잔인한 분노. 그 기색에 나는 절로 겁을 집어먹고 말았다.
"아니면 상대가 누구인지 판단하는 능력이 형편없다던가."
"……."
"그것도 아니라면 목숨을 스스로 끊지 못해 누가 끊어주길 바라고 있는 모양이군."
"……."
그의 말은 하나같이 신랄했다. 그래도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하고 어찌 들으면 상냥하기조차 해서 나는 그가 정말로 화를 내고 있는 건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잘 들어라, 유나."
그가 내 이름을 부른다. 그 속에 담긴 날카로움에 몸이 절로 움찔 거렸다. 하지만 그런 내 무섭증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말로 여기까지다. 앞으로는 그런 건방진 말들은 함부로 내뱉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반드시 짚어내 그에 대한 무게를 물을 거다. 지금 이 시간부터 너는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을 터. 설령 지금의 내 충고를 무시하고 또 다시 그런 식의 말들을 내뱉었을 땐 반드시 후회하게 될 테니 그런 줄 알도록 해."
내 말 어디가 그의 신경을 저토록 거슬리게 만든 걸까? 어쨌든 그는 정말로 불쾌해보였고 사실 나도 그게 비록 내 진심이기는 하나 그래도 여과 없이 막 말했기도 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내 건성에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알았어요. 말조심할게요."
이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고. 냉큼 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가 피식하며 웃어 보인다. 그의 웃음에 무겁고 차가웠던 공기가 아주 조금은 풀린 것 같다.
"내 아이를 사생아로 만드는 일 따윌 내가 할 것 같은가?"
"……."
흠……, 그 단어에 불쾌했던 건가? 물론 나도 사생아란 단어가 좋은 게 아니다. 그래도 그 동안 살 섞은 정이라도 붙은 건지 내심 화내 준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그리고 내 나이에 아이가 있다 해서 놀랄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면서 날 보는 폼이 어째 내 나이가 어린 것이 문제일 뿐이라는 것 같아 나는 메마른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아. 나이차가 많이 나긴 하죠, 우리."
비꼬는 것 같은 내 말에 그가 코웃음을 친다.
"라니 배롤린과 약혼을 앞둔 피앙세는 라니 배롤린보다 세 배 정도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겠지?"
"……제가 받아들인 조건이 무얼 뜻하는 건지 모른다고 하진 않으시겠죠?"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지만 어차피 내 시선에 기죽을 남자가 아니다.
"날 노인네 취급하기에."
"노인네 취급 안했어요. 저보다 나이가 많다고 했을 뿐이지."
"8살 차이면 나쁘지 않잖아?"
"사람에 따라 다르겠죠."
그의 말에 퉁명스럽게 답했더니 그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어댄다. 하긴 내 말이 웃기기도 할 거다. 나보다 더 어린 16살, 17살 소녀들 혹은 성인식도 치루지 못한 아이라 할지라도 이 남자 앞에 조금이라도 더 얼굴을 보이고 싶어 마구잡이로 그들의 엉덩이를 들이밀고 있는게 현실이니까. 오히려 이 남자의 결혼이 늦은 편이라 할 수 있겠지. 귀족 남자들은 대부분 19살 때부터 약혼을 하고 23살내에는 결혼을 한다고 한다. 물론 이건 평균적인 나이일 뿐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결혼할까?"
"예?"
"너라면 상관없을 것 같은데."
"……."
"오히려 귀찮게 구는 여자들보단 차라리 낫다는 생각도 들고."
그가 말했다. 웃으면서. 하지만 나는 조금도 웃음이 나오질 않는다. 대체 이 남자가 뭐라는 건지 어이가 없을 뿐이다. 나를 벌레 퇴치용 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
"결혼하자구요?"
내 반문에 그가 나를 쳐다본다. 여전히 그의 입가엔 웃음이 매달려있다. 하지만 그래봤자지. 그의 웃음은 친근하지 않다. 오히려 위험하다.
"귀찮게 구는 여자들보다 나을 것 같으니 저랑은 결혼해도 좋을 것 같다구요?"
내 표정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그처럼 웃고 있지는 않다고 확신한다. 머리가 차분해졌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릴 만큼 나는 꽤나 침착한 상태였다.
"싫어요."
"왜?"
단호한 내 대답에 그가 되묻는다.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에게 결혼이란 것은 후계를 이을 아이를 낳아줄 사람을 맞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욕구를 풀어낼 대상을 공식적으로 들이는 의미이거나. 그가 고자가 아니라는 건 이 세상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쪼르륵.
술잔에 담기는 호박색 알코올이 눈에 들어왔다.
내게도 알코올이 필요하다. 아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씁쓸한 감정 선이 알코올을 더 절실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런 내 심정을 알았는지 그가 내 앞으로 술잔을 밀어주었다. 그리고 빈 잔에 다시금 술을 따른다. 나는 가만히 내 앞으로 넘겨진 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 모금 마셨다.
"!"
이런, 이게 뭐야? 이게 술이라고? 왜 이렇게 쓰기만 해? 맛 간 거 아냐?
썼다. 그리고 맛있지도 않다. 나는 차마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그저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뱉어 버리고 싶어. 그런 내 표정에 그가 머리를 절래 절래 흔들어 댄다. 그 철없는 아이를 보는 것 같은 표정에 꿀꺽. 억지로 술을 삼켜냈다. 목을 타고 흘러 넘어가는 그 뜨거운 아픔에 절로 신음성이 튀어나온다.
"이 술은 왜 쓰기만 해요? 잘못 만들어진 거 아니에요?"
"입만 귀해졌군. 그동안 마신 술이 고급인 것들뿐이라 숙성되지 않은 생술은 입에 맞지 않은 모양이야. 게다가 반응을 보아하니 증류주 역시 마시지 못할 모양이군."
"생술이요?"
"높은 도수로만 마시는 술. 싸구려지."
"……이런 술은 누가 마시는데요?"
"돈 없는 사람."
거짓말.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비싼 방에 놓인 술이 돈 없는 사람들이나 마시는 술이라고? 누가 그걸 믿어? 하지만 내 입이, 적어도 술에 한정해서는 고급스럽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사실 난 고급 술 외에는 마셔본 적도 없으니까.
"그래서 거절이야?"
"뭐가요?"
나는 아직 미련이 남는 표정으로 술잔을 쥐고 있었다. 그가 와인을 시킬까? 라고 물었지만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와인을 시켜도 왠지…… 내가 원하는 맛일지 장담할 수 없었던 탓이다. 하여튼 정말 곤란한 입맛을 들이고 말았다.
"내 청혼."
"맙소사. 진심이었어요?"
조금도 놀랍지 않은 목소리로 내가 말하자 그가 쿡쿡거려댄다. 웃을 때마다 하늘거리며 흩어지는 백금발의 머릿결은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 그가 손에 쥔 호박색의 알코올보다 더.
"진심이지. 대답 바꿀 건가?"
"아니요."
"왜?"
그렇게 묻는 그의 표정은 아까와 다르지 않다. 별로 궁금해 보이지도 그렇다고 내 거절에 낙담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표정. 그냥 한번 띄어본 말에 내 반응을 살피려는 것 같은 기운까지 느껴져 내 목소리는 더욱 퉁명스러워졌다.
"당신을 위해서요."
"나를 위해서?"
"그리고 저를 위해서요."
"흐음."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바깥 풍경은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어둠뿐이다. 하늘에 반짝이는 몇 개의 별들만이 세상에 존재감을 알리고 있을 뿐 그 외 내 눈에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롯이 이곳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되었다. 아니, 그와 함께 둘이.
"나를 위해서?"
내게서 대답이 없자 그가 나를 재촉한다. 가끔 생각하는 거지만, 이 남자,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나와의 대화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랑 덜컥 결혼하고 나서 나중에 진심으로 사랑하는 분이 생기면 어쩌시려고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