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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71화 (71/206)

< -- 71 회: #5 -- >

무작정 걷고 걷고 또 걷다 아무 벤치에 털썩 앉았다. 다리가 아파왔다. 한계치에 이른 몸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쉬고 싶다. 하지만 어디서? 떠오르는 답이 없자 서럽다 못해 가슴이 아파온다.

난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로 가야 좋을까?

문득 내게도 진짜 내 집이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 집, 내 가족,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은 만들 수나 있을까? 이런 몸을 가지고?"

결혼은 내 인생에 있을 수 없겠지. 염치도 없다. 이런 몸으로 누구와 결혼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가족은 가지고 싶다. 지금 이 순간, 가족이란 단어가 미치도록 절실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어쩌면 나중에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겠지. 그 남자를 떠나 이곳이 아닌 다른 나라, 다른 장소에 자리 잡고 그 곳에서 꽃집을 차리고 내 집을 갖고. 그렇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내게도 내 모든 것을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 그럼 어쩌면 나도 언젠가는 엄마가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결혼이 아니더라도 좀 살만해졌다 싶음 아이를 입양할 수도 있겠지.

그러다 문득, 소소꽃차를 마시지 말라는 그의 말을 떠올렸다.

"하하. 아이가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네. 어쩌면, 음, 어쩌면."

……이기적인 유니시이나. 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아이의 불행은 무시해도 된다는 철없는 계집애 같으니라고. 스스로의 이기심에 진물이 날 지경이다.

지나가는 마차 한 대를 잡았다. 마부에게 나블링 해안이라고 말하자 마부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여기서 나블링 해안까지는 7시간이나 걸립니다."

그 말에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주머니에서 금화 2개를 꺼내주었다. 그러자 마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을 몰았다.

왜 갑자기 나블링 해안에 가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뱉어낸 장소가 나블링 해안이었다. 지금 출발하면 저녁때쯤 도착하겠지.

7시간이나 걸린단다. 딱딱한 의자의 불편함을 알려주듯 온 몸이 쑤셔댔다. 최대한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 엉덩이의 위치를 이곳저곳 바꿔보았지만 죄다 불편했다.

역시 마차는 공작 가(家) 마차가 최고구나.

결국 나는 의자에 드러누웠다. 그나마 눕는 것이 제일 낫다 싶었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흔들림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가만히 천장을 쳐다보았다.

모든 것이 서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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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처음으로 해보는 일탈이었지만 그것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은 날이 저물고 가라앉은 어둠 속이 무섭기도 했지만 어차피 멀지 않은 미래에 나는 먼 곳까지 혼자 가야할 몸이다. 낯선 곳에서 홀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어야 하기도 하고. 분명 많이 힘들겠지. 뜻하지 않은 사건들을 겪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전에 여관에 혼자 방을 잡아 본다든가 무서움을 견뎌본다든가 하는 경험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무방비한 상태로 나를 내팽개치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해선 안 되겠지. 나는 문을 걸어 잠그고 걸쇠도 단단히 채웠다. 공작성에 비해 한없이 허름해 보이는 저 문고리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해줄 지는 의심이지만 적어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싶다.

여관 주인은 상당히 수상쩍단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주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보았었는데 솔직히 여관주인의 시선에 겁을 먹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여관주인의 마음도 이해는 간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봐도 귀족으로 보이는 내가 홀로 와선 방을 달라고 했으니 얼마나 의심스러웠겠는가. 실제로 나는 귀족 따위가 아니지만. 하지만 내가 입고 있는 이 드레스는 귀족들의 눈높이로는 그저 심플한 것에 불과한 것이겠으나 평민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니 저 주인장이 날 귀족으로 착각한다 손 치더라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고작 드레스 하나로.

하지만 슬프게도 그게 바로 귀족과 평민의 수준 차인 셈이지. 지적 수준이 아닌 사치 수준의 차.

마차 안에서 7시간이나 견디는 일은 생각보다 더 큰 고역이었다. 누워 있다가 앉았다가 다시 누웠다가 앉았다가를 수없이 반복한 끝에, 겨우 나블링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부에게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시설이 가장 좋은 여관에 데려다 달라고 요구했다. 마부가 데려다 준 여관은 확실히 다른 곳보다 화려해보이고 또 컸다. 적어도 외관은 그랬다. 속까지는 비교해보질 않아서 모르겠다.

하지만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위치였기에 나쁘지 않았다. 방도 생각보다는 괜찮아 보였고. 때문인지 방값이 비싸기도 비쌌다. 사실 비싼 건지 아니면 바가지를 쓴 건지는 모르겠다. 하룻밤에 금화 4개라니. 원래 이 정도 가격인 걸까, 아님 바가지 쓴 걸까?

"음……. 아무래도 바가지 쓴 것 같아. 그것도 무지 많이."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시원한 파도 소리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나는 의자를 창가 가까이 끌고 갔다. 두 다리를 의자에 올리고 무릎을 껴안고는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철~썩. 철~썩.

"그립다……."

나블링 해안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아, 혼자 온 것은 처음이지만.

내 어릴 적 기억에 엄마 아빠가 싸웠던 적은 딱 1번 있었다. 그 때 난 싸움의 이유도 원인도 몰랐다. 하지만 처음 보았던 엄마 아빠의 모습에 나는 마구 울어댔었다. 낯선 엄마 아빠의 모습이 무서웠던 탓이다. 나중에 싸움의 원인이 엄마에게 선물을 사주기 위해 모았던 비상금을 아빠가 엄마한테 들킴으로서 발발된 것으로 밝혀졌는데, 아빠는 깜짝 선물을 해주고 싶은 나머지 그 돈의 이유를 끝끝내 밝히려 들지 않으려 해서 결국 싸움으로까지 이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몇 달 뒤, 아빠는 엄마에게 예쁜 노란색 피아노를 사주었다.

엄마 아빠가 그렇게 싸우고 난 후, 우리 가족은 화해 겸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이곳 나블링 해안에 왔었다. 그 때 머물렀던 여관이 어디인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나블링 해안을 마구 뛰어다니며 환하게 웃었던 내 모습은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때 내가 바다를 보며 느꼈던 흥분도.

"그립다. 보고 싶고."

그리고 돌아가고 싶다, 그 때 그 시절로.

파도 소리는 그 때와 똑같은데 바다도 그 때와 똑같은데, 그 때 함께 했던 사람들은 더는 없고 나는 홀로 커버렸다. 나는 변해도 너희는 변하지 않는 구나. 앞으로도 그렇겠지. 너희는 변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

왠지 그 사실이 나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옛날 이곳에서 뛰어놀던 어린 소녀와 그런 소녀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짓던 부부의 모습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에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그 평화로움에 나는 웃었다.

철~썩. 철~썩.

음, 좋다. 파도 소리.

좋다, 정말 좋다.

눈을 감았다. 반복되는 파도 소리에 졸음이 몰려온다.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나는 그대로 수마에 몸을 맡겼다.

"……."

똑똑.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이 상태로 오래 잠들지는 않았을 거다. 오래 잠들었다면 다리가 저렸을 것이 분명할 테니까. 하지만 다리는 멀쩡했다. 날은 어느새 저물어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 선명히 보였던 파란 바다는 검은색으로 변해있었다. 저 멀리 우뚝 선 등대만이 바다 위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해가 금세 저물었구나. 하긴, 도착했을 때가 이미 늦은 오후긴 했지.

똑똑.

"손님, 저녁을 가지고 왔습니다."

밖에서 앳된 소녀의 음성이 들렸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문을 열고 싶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무섭다고나 할까. 저 밖에 저 소녀 혼자 서 있을 거란 보장도 없었고 음식이 멀쩡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으니. 내가 뜻하든 뜻하지 않던 귀족으로 보이는 여자 혼자서 방을 얻었다는 말은 금세 퍼질 수 있는 것이다. 밤에 도둑이 들지 말란 법도 없었다. 나는 힐끔 창문을 보았다. 절로 한숨이 흘러나왓다.

저 창문을 꽁꽁 걸어 잠근다고 해서 그게 얼마나 튼튼할는지.

한없이 허술해 보이는 창문 걸쇠에 마음이 더 불안해졌다. 하여튼 겁은 많아서.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자는 것으로 여긴 건지 더 이상 소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냥 물러난 건가? 그렇다면 다행이고.

나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바다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파도 소리는 여전히 선명했다. 아련하기까지 한 그 소리에 나는 다시금 귀를 기울였다.

그 남자 곁을 떠나게 되면, 저 멀리 라이니 공국으로 가자. 배를 타고 멀리 멀리, 그 곳으로 가자. 라이니 공국은 작지만 아름다운 나라라고 책에서 보았다. 평균 기온이 루벤스 제국보다 높아서 루벤스 제국에선 나지 않는 꽃들도 많다고 엄마가 그랬었지. 그러고 보니 엄마와 아빠는 라이니 공국에서 만났다고 하는데 혹시 두 분은 라이니 공국 사람인 걸까? 엄마 아빠가 죽고 난 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아빠의 일기장에서 분명 두 분은 모두 루벤스 제국 사람이 아니라고 적혀있었다. 어느 나라인지 정확하게 쓰여 있진 않았지만 사랑을 위해 고국을 떠나 루벤스 제국으로 왔다고.

엄마와 아빠의 고향은 어딜까? 두 분은 같은 나라 사람인 걸까, 아님 다른 나라 사람인걸까? 어딘지 알면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갈 텐데. 엄마와 아빠의 가족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엄마와 아빠의 나라라는 그 이유만으로도 내겐 그 나라에 대한 애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별장 내 금고상자 속에 담긴 아빠의 일기장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일기장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일기장이기보단 메모에 가까웠다. 날짜도 날씨도 적히지 않은 의미 없는 끄적거림도 많았고 무엇보다 두서가 없었다. 그래도 내겐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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