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0 회: #5 -- >
"……."
"앉으십시오. 유니시니아 영애."
차마 웃지도 못하고 제대로 앞을 보지도 못하고 마냥 뻘쭘히 서 있는데, 롱아르 공자가 조용히 소파를 권한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파에 냉큼 앉았다. 그러자 내 옆으로 레니가 앉는다. 여전히 킥킥 웃어대면서. 그런 레니의 모습을 백작부인이 굉장한 눈으로 째려보고 있었다.
"크흠."
가만히 내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백작부인의 시선이 레니에게서 내게로 옮겨진다. 그 시선에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안녕하세요, 롱아르 백작부인.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무슨 그런 말을. 어서 와요. 배롤린 영애."
"감사합니다."
"푸핫! 엄마 제발 목소리 좀 어떻게 좀. 큭큭."
"레니!"
계속되는 레니의 웃음소리에 백작부인의 우아함이 점점 벗겨지려한다. 그에 다급해 지는 건 나다. 저 눈치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레니 녀석이 뭘 알겠는가? 나중에서야 땅치고 후회할 녀석이. 레니의 개인적인 일이라면 그냥 내버려두겠지만 지금은 곤란하다. 지금 일이 틀어지면 그 타격은 나에게도 심각하다. 아니나 다를까 우아함이 벗겨지면서 그 자리를 채우는 건 백작부인의 분노다. 이러다간 술판은커녕 수다도 못 떨고 레니가 방에 처박힐 것 같은 불안감에 나는 재빨리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백작부인. 레니와 함께 외출해도 될까요? 알브레히트 공작께서 레니를 위해 친히 별장으로 보내주신 것이 있답니다."
나는 알브레히트란 성이 귀족들 사이에서 얼마나 대단한 역할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어디서나 그 누구에게나 알브레히트 공작의 이름은 대단한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내 말에 백작부인은 분노를 끌어올리다 말고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알브레히트란 이름에 백작부인은 잠시나마 레니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내버려두었다.
"알……브레히트 공작께서 레니에게요?"
"네."
나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레니를 위해 보낸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레니와 술판을 벌이기 위해서 보내달라고 한 것들이다. 난 그 목적을 분명히 밝혔었고. 그러니 그 남자가 레니를 위해 보냈다는 말이 전부 다 거짓은 아닐 거다. 음, 그럴 거다.
"흠흠. 알브레히트 공작께서 레니를 위해 무엇을 보냈나요?"
한껏 기대에 찬 얼굴이다. 그 얼굴에 나는 공작의 이름을 괜히 쓴 건가 싶어 순간 후회했지만.
"와인……입니다."
"와인? ……술?"
어차피 술판이 벌어지면 백작부인도 알게 될 사실. 그냥 말해버렸다.
조심스런 내 말에 백작부인은 잠시지만 표정관리에 실패하셨다. 술이란 단어에 저절로 찡그려지는 눈매를 막지 못했던 거다. 아아, 싫으시기도 하겠지. 레니와 일주일동안 벌인 그 술판은 오래전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설처럼 취급될 정도라고 하니. 백작은 레니가 일절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기 위해 롱아르 백작 가(家)의 모든 시녀들에게 명령했다고 한다. 레니에게 아주 약한 도수의 칵테일조차 가져다주지 말라고. 금주 당했다고, 망했다고 울상을 지으며 레니가 말해주었었다. 그 말을 하는 레니의 목소리엔 분노가 가득했었지. 어쨌든 그렇게까지 해서 레니와 떨어뜨려 놓으려 한 술이 다시금 언급되었으니 싫은 것도 당연지사. 하지만 나는 그 남자의 영향력을 믿고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께서는 제가 롱아르 백작 가(家)에서 받은 환대를 감사하게 여기세요. 그래서 그에 대한 보답으로 별장으로 아주 고급술을 보내주셨지요. 롱아르 백작 가(家)의 환대에 보답하기 위해서요."
물론 그 남자가 롱아르 백작 가(家)에 실제로 고마운 감정을 품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아?
"크흠. 알브레히트 공작께서 레니에게 약혼선물로 사주셨단 루비 목걸이는 보았습니다. 감사드린다고 전해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네?"
백작부인은 어쩐지 조심스러워보였다. 이 말을 해도 되는지 가늠해보는 것도 같다. 나는 편히 말씀하시라는 의미로 사르르 웃어보였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 말을 끝으로 레니를 별장으로 빌려준다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 그러니까."
편히 말하라고 내가 눈짓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백작부인은 한참을 말을 골랐다. 그런 행동이 의아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레니와 레이준 공자 역시 의아한 얼굴로 자신의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크흠, 하암. 한참동안 목소리만 가다듬던 백작부인이 드디어 말을 꺼내려했을 땐 이미 내가 조금은 지친 뒤였다.
"배롤린 영애께서 레니의 약혼식 날 화동을 한다고 레니가 그러던데."
"네."
나는 긍정의 의미로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도 최대한 발랄하게 했다. 하지만 어쩐지 불안해진다.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았지만 이미 예상했었던 그 말을 듣게 되려나 보다.
아무래도……내가 레니의 화동으로 나서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으신 모양이지. 그도 그럴 것이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린 여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떳떳한 처녀도 아닌 내가 약혼식의 화동 역할을 한다는 건, 그야말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이해한다. 이해하고 이해한다.
백작부인의 말이 어느 쪽으로 향할지 레니 역시 눈치 챈 모양이다. 방금 전까지와 다른 목소리로 레니가 목소리를 높였다.
"엄마!"
"넌 조용히 해."
"엄마!"
레니가 다시금 항의했지만 백작부인은 엄격했다. 말괄량이 백작부인과 엄격함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지만 지금은 이 순간은 그 모습이 전혀 웃기지 않다.
"어머니."
롱아르 공자의 가라앉은 목소리도 들렸다. 그도 자신의 어머니가 무엇을 말하려하는지 눈치 챘겠지.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 채기 어렵지 않은 일이다. 살짝 책망하는 것 같은 그 목소리가 의외로 내게 위안을 주었다. 기실 롱아르 공자가 백작부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백작부인은 레니와 롱아르 공자의 말을 모두 무시한 채 나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담담히 받으며 나는 웃었다. 그리고 모두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유나!"
레니가 소리쳤지만 나는 괜찮다는 듯이 레니의 손등을 토닥거려주었다. 백작부인이 나쁜 게 아니다. 딸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 되길 바라는 모든 어머니들의 생각은 백작부인과 같을 테니까. 내게도 그런 엄마가 있었다. 나도 레니와 같은 사랑, 엄마한테서 받았었다. 그래서 이해한다. 백작부인의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아주 잘 이해한다.
내 담담한 끄덕임에 백작부인이 미안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안도했다는 뜻이 역력한 그 얼굴에 나는 차마 마주 웃어줄 수가 없었다. 이해한다. 백작부인의 마음을 아주 잘 이해한다. 하지만, 하지만 이해한다는 말이 속상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손을 레니가 재빠르게 잡았지만 나는 그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유나야."
미안함과 걱정, 그리고 부끄러움이 가득담긴 시선이 나를 향한다.
"오늘은 먼저 갈게."
"유나야."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백작부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공손하게 백작부인에게 롱아르 공자에게 또 레니에게 인사를 해보이곤 조용히 그 곳을 나왔다.
"엄마! 어떻게 그런 말을-."
탁.
문이 닫히기 직전 레니의 고함 소리가 들었지만 냉정하게 돌아섰다. 어떤 말을 하건, 별로 듣고 싶지 않다.
발걸음이 절로 빨라진다.
또각또각또각.
호흡이 점점 거칠어져 갔다.
속상함, 슬픔, 아픔, 억울함이 뒤섞인 감정이 소용돌이치듯 나를 잠식한다.
"하-."
……레니가 부럽다. 정말 미치도록 부럽다. 레니를 사랑해주는 부모님과 철없는 레니의 응석을 받아주는 남동생. 그런 행복한 가족을 가지고 있는 레니가 눈물이 날만큼 부럽다.
우리 엄마도 그렇게 날 사랑했다. 우리 아빠도 날 너무너무 사랑했다. 그래서 그 두 분은 끝까지 나를 당신들의 품에서 놓지 않았다. 소중하게 감싸주었다. 다치지 않도록, 무사히 살 수 있도록. 목숨 받쳐 날 구해주었다.
거의 뛰듯이 백작 가(家)에서 나온 나는 정처 없이 마구 걸어갔다. 어디로 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디로 가든 그게 어느 방향이든 어차피 '내 장소'라는 건 이 세상에 없는 말이 되어 버리지 않았던가.
"내가 화동 안한다니까. 레니 기집애, 괜히 고집 피워선."
원망의 화살이 레니에게 향한다. 어쩔 수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레니를 원망하지 않고 누굴 원망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