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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69화 (69/206)

< -- 69 회: #5 -- >

오래지 않아 롱아르 백작 가(家)에 도착하고 나는 시노슬리 경의 에스코트를 받고 내려섰다. 저 멀리 백작 가(家)의 집사가 나오고 있었다.

"공작성으로 돌아가세요."

"괜찮습니다."

"저야 말로 괜찮아요. 저는 이곳에 계속 있을 거거든요. 아시겠지만 롱아르 영애와 친구사이여서요. 둘이서 계속 수다 떨 계획이랍니다."

거짓말. 레니가 허락하자마자 나는 별장으로 달려갈 거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이 기사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지.

"저는 계속 백작 가(家)에 있을 테니까 차라리 저녁 시간에 맞춰서 데리러 와주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죠. 여자들끼리 수다를 떠는게 딱히 위험한 일은 아니잖아요."

어느새 가까이 온 집사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 인사를 받으며 나는 다시 한 번 강조하듯 시노슬리 경에게 말했다.

"바쁘실 텐데 가시 일 보시다가 오세요. 약속드릴게요. 경께서 오실 때까지 얌전히 백작 가(家)에만 있겠다고요."

"……알겠습니다."

롱아르 백작 가(家)와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는 나름 사이가 괜찮은 가문이었기 때문에 시노슬리 경도 별다른 위험은 없을 거라 여긴 모양이다. 내게는 백작 가(家)뿐 아니라 다른 곳이라 할지라도 딱히 위험 같은 건 없었지만. 어쨌든 다행이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시노슬리 경을 떼어 보낸 나는 집사의 안내를 받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곧 술파티를 벌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절로 어깨가 들썩거린다.

"너 뭐하냐? 춤추냐?"

"레니야, 안녕. 나 탈출했다. 응, 지금 이 기분이라면 춤도 얼마든지 출 수 있을 것 같아."

"탈출? 어디서?"

"질식에서."

"……뭐라는 거야?"

그런 내 앞에 레니가 나타났다. 상당히 어이없다는 얼굴로.

뚱한 레니의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히죽 웃음이 나왔다. 요 며칠 계속해서 품고 있던 긴장이 조금은 풀어지는 기분이랄까. 내가 히죽히죽 웃어대자 레니의 얼굴은 더 이상해졌다.

"암만 봐도 너 지금 상태 이상해."

"이상해야 정상이거든."

"왜?"

"내 말을 듣고 나면 너도 내 상태가 될 테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아마도 네가 들으면 좋아서 기절할만한 말?"

"내가 좋아하는 말?"

"꿈과 사랑이 가득한 말 좋아하잖아. 그게 비록 환상이여도."

"흐음."

그제야 레니의 얼굴에 호기심이 무척무척 피어난다. 그 갑작스런 변화가 무척이나 웃겼지만 안타깝게도 그 얼굴을 놀려먹을 만한 기운이 지금은 없었다. 하지만 곧 기운이 날 것이다. 머지않은 시간 내에 술판이 벌어질 테니까. 맛있는 술을 마시면 내가 원하는 만큼 레니를 놀려먹을 수 있는 기운이 무럭무럭 생겨나겠지. 그럼 레니의 놀라는 얼굴을 마음껏 감상하면서 재미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 그 벼락과도 같은 조건들을 말해주면 레니는 분명 미친년처럼 소리 지르고 팔짝팔짝 뛰어댈 것이 틀림없을 테니까. 어울리지 않는 레이스를 달고 다니는 저 기집애는 어이없는 사랑지상주의자 아니던가.

"뭔데?"

"지금은 말 못해."

"조금만. 힌트라도 줘라, 응?"

"맨 정신으로 얘기할 수 없다니까. 우리 술판 벌이자."

내 제안에 레니의 눈동자가 떼구르르 굴러간다. 심히 땡긴다는 그 표정에 나는 방긋 웃었다. 레니를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을 듯하다.

"나 엄니한테 죽을지도 모르는데?"

"처녀파티라고해."

"아버지가 롱아르 백작 가(家) 술 창고 출입금지 명단에 내 이름 올려놓으셨어."

"장난해? 누가 여기서 마시재? 네 부모님 다 계신 이곳에서? 나도 불편해. 별장가자. 별장에 술 많아."

"내 약혼식이 얼마 안 남았어."

"술판 벌이면 네 약혼식 날 피아노 칠게."

"너야 말로 장난해? 원래 피아노 치기로 했었거든?"

"노래까지 불러줄게."

"호오~ 정말? 너 노래 잘해?"

"몰라."

"……."

응접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며 우리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거려댔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술판을 벌인다고 해서 좋아할 만한 사람이 이곳엔 없었던 탓이다. 별장이라면 또 모를까. 아직 그 곳에서는 술판을 벌인 적이 없으니 그곳 하녀들은 술판을 벌인 다해도 멋모르고 그러려니 할 테지.

"빨리 결정해. 응접실 다 와 가는데."

우리 둘의 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목소리도 한층 더 낮아졌고. 내 재촉에 레니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신음성을 흘린다.

"정말 땡기는데……."

"그렇지? 저번에 너 한 모금 마셔본 거 기억나? 그것보다 더 맛 좋은 것들이 잔뜩 있다."

"쩝쩝."

이제 우리는 거의 서 있다시피 했다. 레니의 등장으로 응접실로 들여갈 차를 준비하러갔던 집사가 다시 돌아와 복도에 서 있는 우리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집사는 그런 우리를 바라보다 천천히 다가왔다.

"아가씨?"

"응. 아, 잠깐. 뭔가 고민 중이었어."

레니가 집사에게 얼버무리는 그 때 내 방문 소식을 듣고 나온 건지 아니면 우연히 나오다 마주친 건지 레이준 롱아르 공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레니에게 빨리 결정하라는 듯 눈짓으로 재촉하고는 가까이 다가온 롱아르 공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레이준 롱아르 공자."

"오랜만에 뵙습니다. 유니시이나 영애."

그래도 롱아르 공자는 레니에게 들은 게 있는 모양인지 내 이름 뒤에 배롤린이라는 성을 붙이지 않는 센스를 발휘해주었다.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내가 한껏 동그랗게 눈을 말며 웃어보였다. 난 정말이지 내 이름 뒤에 그 거지같은 성이 붙는 것이 너무나도 싫다. 억지로 붙일 수밖에 없었던 성이었기에 더더욱이나 치가 떨린다. 기분이 좋아져 방긋방긋 웃고 있는데 롱아르 공자의 뒤편에 서 있던 한 시녀가 머리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도련님, 배롤린 영애. 백작부인께서 응접실로 부르십니다."

"엄마가?"

"네."

"무슨 일로?"

"그건 저도 잘……."

난처해진 시녀의 표정에 레니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레니의 약혼식이 가까워져 오니 뭔가 상담할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부른 걸지도 모르지.

시녀를 보내 기다린다는 말까지 들었는데 오래 지체했다가는 무례가 될 거다. 우리는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옮기는 내내 나는 레니의 팔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빨리 결정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내 재촉에 레니가 투덜거려댔지만 곧 입모양으로 알았다고 표시를 보낸다. 그 말에 나는 한껏 기분이 좋아져 포만감 어린 고양이마냥 소리 없이 웃어댔다. 별다른 소리를 내지 않고 대화하며 웃어대는 우리의 짓궂은 모습을 롱아르 공자가 힐끗 쳐다보았지만 별 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레니에게 듣기로는 잔소리가 장난 아니라는데, 아무래도 내가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똑똑.

"마님. 도련님과 아가씨, 그리고 배롤린 영애입니다."

집사가 방문을 알렸고 안쪽에서 백작부인의 허락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매우 우아한 목소리였다.

"이럴 수가."

레니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진다. 힐끗 올려 본 롱아르 공자의 얼굴도 어쩐지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있다. 그건 아마……웃음을 참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실은 나도 웃음보가 터질 것 같다. 왜냐하면 레니에게 듣기로 백작부인은 레니 못지않은 말괄량이라고 했으니까. 백작부인인 지금까지도. 말괄량이 백작부인의 우아한 목소리라. 입술을 깨문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누굴 닮았겠니? 엄마는 지금까지도 응접실 출입예의 따윈 제대로 지키지도 않는데! 아빠는 왜 자꾸 나한테만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내가 있어서 저러시는 것 같은데, 굳이 잘 보일 필요도 없는 나 때문에 왜 피곤한 행세를 하시는지 모르겠다.

응접실로 들어서자 우아하게 찻잔을 들고 단아한 모습으로 차를 마시는 백작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푸웃!"

걸어가는 내내 레니는 웃음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레니는 레이준 공자의 뒤에 바짝 붙어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어떻게든 숨겨보려 했다. 그럼에도 어쩌지 못하고 튀어나와버린 웃음 한 조각에 백작부인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레니!"

"아, 아니 엄마 대체 무슨- 푸하하하하."

"레니! 이게 무슨 버릇없는 행동이니!"

"……."

나는 조용히 천장을 쳐다보았다. 그래, 네 성격이 어디서 나왔겠니. 고지식한 백작과 우아하신 백작부인 사이에선 레니같은 성격의 영애는 절대 나올 수 없을 터. 백작의 성격이 보수적이라는 건 한번만 만나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니 아무래도 레니의 성격은 백작부인에게서 물려받았을 확률이 백이면 백이다.

나는 레니가 얌전을 빼고 앉아 우아한 척 하며 주스도 아닌 차를 마시고 있는 모양을 상상해 보았다.

"……."

아, 그래, 레니야. 네가 지금 왜 웃는지 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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