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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68화 (68/206)

< -- 68 회: #5 -- >

수다가 절실히 필요하다. 속에 있는 말을 아무렇게나 마구 뱉어낼 수 있는 그런 수다가.

그만큼 이곳은 내게 갑갑했다. 머릿속으로 레니의 얼굴이 두둥실 떠올랐지만 고개를 젓는다. 여긴 별장이 아니다. 공작성이다. 별장도 아닌 이곳 공작성으로 내 맘대로 레니를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다. 물론 내가 레니를 찾아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나는 될 수 있으면 다른 곳으로의 '방문'은 피하는 편이다. 이건 내가 방문하게 됨으로써 휘말리게 될 웃기지도 않을 풍문으로부터 주위 사람들을 지키는 내 방식이었다. 물론 초대와 방문은 다르다고 미리 말해둔다.

쳇. 방문이라고 해봤자 레니밖에 없지만.

나와 친하게 지내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이미 레니에게 따라붙는 편견어린 시선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먼저 레니를 찾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도 때도 없이 날 찾아와 주는 레니가, 실은 무척이나 고마웠다. 레니 본인도 사람들이 뒤에서 뭐라 속닥거리는지 잘 알고 있음이 분명할 텐데, 레니는 단 한 번도 내게 그런 내색을 보인 적이 없다.

그저 레니의 가족인 롱아르 백작 가(家) 사람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레니의 가족들은 아마도 레니가 나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싫어할지도 모른다. 아니, 싫어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좋아하지는 않을 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가십 메이커를 그 누가 반기겠는가. 그것이 나처럼 보잘 것 없고 아무런 작위도 없는 일개 '정부'일 뿐인 여자라면 더욱더 그러할 테지. 정부에도 급이 있다는 사실에 웃음이 터질 것 같다.

요 며칠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남자의 의중이 뭔지 모르겠다. 소소꽃차를 마시지 말라니. 완전 미친 거지. 대체 그 남자는 소소꽃차의 효능을 어떻게 안 걸까? 소소꽃차의 효능은 책에도 적혀있지 않은 것이었다. 오래전 집 근처 화원 할머니께 우연히 들은 소소꽃차의 효능을 엄마가 임신을 하지 않기 위한 일환으로서 마시기 시작한 것이 소소꽃차였던 것이다. 그 효능이란 것이 딱히 검증된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정확한 정보도 아니었기에 처음부터 피임효과를 기대하고 마신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이 제법 엄마의 입에 잘 맞았던지 어찌어찌 즐겨 마시기 시작했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결국엔 효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으로 이어졌던 거다. 즉 엄마는 일종의 실험 대상이었던 셈이다.

엄마는 나를 낳다 거의 죽을 뻔했다고 했다. 결혼 후 몸이 급속도로 약해져 가는 엄마 때문에 아빠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가임 기간을 속여 나를 가지고 난 후에 아빠랑 많이 싸웠다고.

그 남자와 관계를 갖기 훨씬 이전부터 나는 소소꽃차를 즐겨 마시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내가 소소꽃차를 즐겨 마시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분명 그랬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하지만 나라고 처음부터 소소꽃차 하나로 안심했던 것은 아니다. 그와의 정식적인 관계가 시작되고 난 후 몇 달 동안은 차를 마시며 동시에 피임약을 복용했더랬다. 소소꽃차만 마시는 것은 불안했기 때문에. 그렇게 둘을 병행하던 것을 소소꽃차만으로 줄인 건 그와 관계를 맺고 난 후 반년이 흐른 뒤부터다.

그런 소소꽃차를 앞으론 마시지 말라고?

소소꽃차를 마시지 않으면 다른 피임약을 복용하면 된다. 하지만 어쩐지 그 피임약을 구하는 것 자체가 여의치 않을 듯싶다. 피임약을 쉽게 구할 수 있도록 해줄 요량이었다면 애초에 소소꽃차를 마시지 못하게 할 이유 따윈 없지 않겠느냔 말이다.

"아이를……원하는 건가?"

그렇다면 결혼을 하면 되지!

그 많은 약혼녀 후보들이 그 남자 하나만을 바라보며 엉덩이를 흔들어대고 있는데!

아니, 아닐 거다. 아이를 원하는 것은 아닐 거다. 적어도 내게서 아이를 원하는 것은 절대 아닐 거다. 만약 내가 아이를 낳게 되면 그 아이는 사생아가 된다. 사생아. 가문의 인정을 받기는 힘드나 피가 반은 섞였다는 이유로 무작정 내치기는 애매한 그런 아이. 분명 가문의 골칫덩어리가 되겠지. 그리고 나는? 나는 미혼모가 된다. 단지 미혼모가 되는 것뿐이라면 그건 상관없다. 하지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내가 이곳을 떠나고 싶을 때 훌훌 날아갈 수 있을까? 만약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다한다면 그게 아이를 버리는 것과 뭐가 다르지?

그렇다고 아이를 쉬이 데려갈 수도 없을 거다. 그래도 피가 반은 섞였다는 이유로 제재를 당할 테니까. 만약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다면 그 아이는 그 때부터 내가 부양해야 하는데 내 한 몸 건사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아이까지 책임이라……. 과연 내가 아이를 잘 돌볼 수 있을까? 뭐 어쨌든 그렇게라도 아이를 데려갈 수만 있다면야 다행이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는 평생을 그 아이에게 미안할 것 같다. 아이는 홀어미 밑에서 아버지의 사랑 한 번 받지 못하고 자라는 사람으로 클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나는 온전한 가정의 따스함을 알고 자란 사람이다. 그 속에서 내가 무척이나 행복했고 얼마나 밝게 웃을 수 있는 아이였는지 안다. 그걸 내 아이에게 줄 수 없다는 건 상처겠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어쨌든 아이가 생긴다면 비단 나와 아이뿐 아니라 그 남자에게도 좋지 않다. 그 남자에게는 처치 곤란한 짐 덩어리가 생기는 셈일 테니까.

"응, 응. 아이를 원하는 건 아닐 거야. 분명해. 그럼 대체 뭐지?"

우매한 나는 도무지 고귀한 그의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며칠이 지났다. 이곳에서 별의별 고민을 다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새론에게 라니의 약혼 소식이 발표되었는가 여부를 물었지만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건지 아직까지 그런 발표는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발표가 영영 없게 만들기 위해서는 머지않은 시일 내에 그 남자가 요구한 것에 대한 대답을 해야 하겠지. 그것도 모두 긍정적인 대답을. 그런 대답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하루가 다르게 나를 질식시키고 있었다.

"나가자. 이대로 계속 여기 있다가는 내가 먼저 죽겠어."

딱히 외출 금지란 말은 없었다. 더 이상의 갑갑증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거친 발걸음으로 씩씩하게 복도를 거닐자 저 멀리서 새론이 내게 다가온다.

"뭐가 필요하세요?"

"아니요."

"그럼 공작님께 가시는 거세요?"

"아니요."

"그럼요?"

"그냥 좀 나갔다 오려구요."

"어디를 가시는데요?"

"……롱아르 백작 가(家)요."

맹세컨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의지로 롱아르 백작 가(家)에 가본 적은 없다. 물론 지금 이순간도 가지 말까 망설이고 있지만. 하지만 지금 내겐 내 옆에 있어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 날 그 이야기를 한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그 남자를 볼 수 없었다. 그 말은 즉, 그 뒤로 우린 한 번도 관계를 나누지 않았다는 소리다.

"롱아르 백작 가(家)에 가신다고요? 알겠습니다.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부탁할게요, 새론."

다행이다. 혹여나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이곳에 잡아두려는 목적은 아니었나보다. 어쩌면 질식시켜 스스로 죽어버리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인가라는 생각까지 했던 나로서는 나가겠다는 내 말에 토씨하나 달지 않은 새론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대체 그 남자는 왜 그 따위 제시들을 해서 내가 얼토당토하지도 않은 생각들을 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혹여나 하는 불안감에 거의 뛸 듯이 밖으로 나왔다. 마차는 오래지 않아 내 앞에 섰다. 그런데.

"새론?"

"네, 다녀오세요."

"아니, 그게 아니고."

대체 이 사람은 뭔가요?

나는 설명을 부탁한다는 시선으로 마차 옆에 선 남자와 새론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의 문양을 단 제복을 입은 저 남자는 분명, 이 공작가의 기사가 분명할 텐데. 그런 남자가 왜 여기 있는 걸까? 그것도 마치 나를 에스코트하려는 듯이?

"오늘 아가씨를 호위해줄 기사님이세요."

"……호위요?"

농담이죠?

하하. 이렇게 재미없는 농담도 오랜만이다. 나는 정색한 얼굴로 새론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새론은 그런 내 얼굴에도 굴하지 않았다.

"귀찮으시더라도 그냥 데리고 나가세요."

"저한테 왜 호위가 필요한데요?"

"공작님께서 그리 명령하셨으니 까요."

"……그러니까 왜 제게 호위가 필요한데요?"

"그냥 데리고 가세요. 안 그럼 못나가세요."

"……."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나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마차 옆에 선 남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부담스러워. 대체 왜 내게 호위가 필요하냔 말이다.

"시노슬리 경은 공작 기사단 내에서도 상위 실력자랍니다.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뭐에 대한 걱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걱정 따윈 안했어요. 그저 부담스럽고 또 부담스러울 뿐이죠.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호위를 대동하지 않고는 나갈 수 없다지 않은가.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잘 부탁한다는 듯 남자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유니시이나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마크 시노슬리입니다."

그는 무뚝뚝했지만 예의가 몸에 밴 남자였다. 그런 행동에 이 남자의 신분이 가볍지 않을 거라 생각된 나는 또 다시 한숨을 내쉬고야 말았다.

마부는 이미 새론에게서 내 목적지에 대한 말을 들었는지 내가 올라타자마자 출발해주는 놀라운 센스를 발휘해주었다. 롱아르 백작 가(家)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나는 기사를 떼어낼 방법과 백작 가(家)로 쳐들어가고 난 후의 계획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기사를 떼어낼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레니와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선 고민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건 단 한가지였으니까.

술판! 난 술이 고팠다. 너무나, 절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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