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7 회: #5 -- >
"별 일도 아닌 걸 참 어려워하는군."
그는 단순한 호칭 부르는 것 따위를 굉장히 어려워한다며 나를 타박했지만 나는 입술만 삐죽거려댔을 뿐, 다른 반박은 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네가 이 공작성으로 들어올 것."
"……네?"
내 대답은 조금 늦게 튀어나왔다. 듣긴 들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남자가 뭐라고 한 거야? 아무래도 귀가 잘못된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친절하게도 다시 한 번 내게 같은 말을 반복해주었다.
"당장 공작성으로 들어와."
"……."
"아, 이대로 머물면 되겠네. 그럼 굳이 별장에 갔다 올 필요는 없겠군. 별장에 있는 네 짐은 사람을 시켜서 가져오면 되는 일이니."
나는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눈앞의 이 남자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지금 제정신으로 이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혹시 머리라도 다친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이상한 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내가 공작성으로 들어오는 문제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그런 파장을. 지금 그것을 모르고 내게 이런 말을 꺼낸단 말인가? 설마. 내가 아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지.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을 그가 생각하지 못할 리 없다. 그렇다면 대체 뭘까? 왜 이 남자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가십들을 왜 자꾸 만들어 내려 하는가?
"아까부터 어려운 것이 아닌 것들을 무척이나 어렵게 받아들이는군."
"……이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구요?"
물론 말은 어렵지 않다. 행동이 어려울 뿐. 아니 사실 행동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사람들의 입소문이 짜증나고 퍼질 파장이 시끄러울 뿐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다른 것이다. 그동안 별장에서 내가 누렸던 자유들을 이곳에 오게 된다면 알게 모르게 모두 구속될 거란 생각에 나는 절로 고개를 젓고 싶었다.
"공작성으로 들어와."
"……싫다면 라니에 대한 부탁도 없던 일이 되는 건가요?"
"당연한 소릴."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나는 이제 장난으로라도 웃을 수 없었다.
"아직……아직 저한테 질리지 않으셨나요?"
내 질문에 그는 냉랭한 눈빛이 되어 나를 쏘아본다. 하지만 눈빛만 그럴 뿐 그의 미소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세 번째 조건을 말하지."
"……말씀하세요."
나는 거의 포기상태가 되었다. 이젠 그가 어떤 말을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공작성으로 들어오라는 말보다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말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나의 오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온 그의 조건은 내 이성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소소꽃차."
"네?"
"그 차는 앞으로 금지다."
"!"
"네게 소소꽃차를 타 주는 사람은 앞으로 없을 거다. 물론 네 스스로도 타 마시지 못해. 네 눈앞에 소소꽃 자체를 아예 없애버릴 테니. 물론 네가 별장에 심은 그것들까지 전부."
"……어, 째서요?"
말, 도, 안, 돼…….
목이, 맨다. 정신이 어질어질해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제 알았다. 처음부터 이 남자가 내게 원한다 말하려 했던 진짜가 무엇인지를.
이 남자 목적이 이거였구나!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이건, 이건 아니다. 이건, 이건, 이건! 내게 이럴 수는 없어.
만약 지금 이런 상황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 말을 들었다면 나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무조건 이 남자 곁을 떠났으리라. 공작성으로 들어오라는 말 따윈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엄마, 엄마랑 아빠는 왜 맨날 소소꽃차만 마셔? 그 맛없는 걸.>
<후후. 엄마가 몸이 약해서 우리 유나 동생은 가질 수가 없거든.>
<소소꽃차를 마시면 내 동생을 가질 수 없어?>
<꾸준히 마시면. 그러니까 넌 마시면 안 돼. 알았지?>
<쳇. 쓰고 맛없어서 마시라고 해도 안 마셔.>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몇 달 뒤, 나는 배롤린 가(家)에 들어서자마자 소소꽃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거의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소소꽃차를 마신 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소소꽃차를 능숙하게 타내는 내 모습에, 원래부터 가족이 다 함께 즐겨 마셨던 차라는 내 말에, 사람들은 그저 가족을 그리워하는 구나라고 단순하게 여겼다.
지금까지는, 지금까지는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이 덜덜 떨려온다. 나는 양 손을 꾹 쥐는 것으로 떨림을 막아보려 애써보았다. 눈물이 나려했지만 눈물이 왜 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가급적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를, 태연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차는 어렸을 때부터 즐겨마시던 건데요. 아빠 엄마와 즐겨마시던 차라구요. 지금 제게는 그 때의 추억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유일한 거란 말이에요!"
"아, 유감이야."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 차가움에 귀가 아닌 가슴이 아파온다.
"그렇게 의미 있는 차를 못 마시게 해서 진심으로 유감이군. 하지만 앞으론 안 돼. 그 차 말고도 다른 차도 많이 있지 않나?"
"……."
"내가 제시한 조건 세 가지를 모두 이행 하던가 아니면 라니 배롤린에 관한 부탁을 없던 일로 하던가. 이제 다시 선택은 그대에게 맡기지."
"……."
선택은 다시 내게 있다지만 나는 사실 선택할 것이 없었다. 그건 나도 알고 누구보다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다. 지금 그가 세세히 나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란 것을.
목이 막혀왔다. 나는 이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체 이 남자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무엇을 알고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싶었지만 오히려 내 속내가 간파당할까 무서워 나는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다 알고 있는 거죠?"
"아아."
내가 속삭였고, 그가 답한다. 내 속삭임은 작았고 그의 답은 짧았지만 그는 내 속삭임을 들었고 나는 그의 짧은 대답 속에서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아, 이 남자는 정말로 다 알고 있구나.
"소소꽃차를 마시지 말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것이 나중에 어떤 사태를 가져올 수 있을지 똑똑한 당신이 모른다고 말하지 마세요."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몸의 떨림은 입에까지 번져 나는 어느새 이를 딱딱 부딪치고 있었으니까. 나의 알량한 자존심이 말한다. 이 웃기는 소리만은 내고 싶지 않다고. 그러기 위해서 나는 온 힘을 다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아, 아는 거죠, 그렇죠? 왜 그런 조건을 내거는 거예요? 앞의 두 가지는 할게요. 하지만 마지막은 다시 생각해주세요."
사정하듯 내가 속삭였지만 그에게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그는 그저 결정된 사항을 재검토 해달라는 나를 이미 끝난 일을 괜스레 들추어대는 사람 바라보듯 무덤덤할 뿐이다. 그 단호함을 난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당신 미쳤어요?"
"이젠 별소리가 다 나오는군."
"그럼 대체 왜 그러는 건데요? 제게 왜 그러는 건데요? 네?"
하지만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가 대답하지 않을 거란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정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마구 울어버리고 싶다. 그런 웃기는 모습으로 이 남자의 마음을 돌릴 수만 있다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그렇게 했을 거다. 일그러진 내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다급한 시선으로 그의 행동을 쫓았다. 머리가 핑- 돌아버릴 것 같았다. 지끈지끈 아프기도 하고. 이 집무실이 빙빙 도는 기분이 들었지만 어쩌면 돌고 있는 건 집무실이 아니라 나일지도 모른다.
떨림이 점차 빨라져간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정신을 부여잡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눈앞의 모든 것들의 형체가 흐릿해졌다. 내가 지금 제대로 앉아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쩜 나는 이미 쓰러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 조건 세 가지. 기다리지."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새론. 그녀를 방으로 데려가."
"네."
어느새 새론이 들어온 건지 모르겠지만 아니 알았다 해도 신경 쓸 여력도 없었겠지만 새론이 멍하니 앉은 내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켜주었다. 나는 줄 끊긴 마리오네트 인형마냥 새론에게 기대 그녀의 부축에 의해 움직였다. 내 자의식이란 지금 이곳에 한 줌도 남아있지 않았다.
"네 부탁이란 것을 내가 들어주길 바란다면."
그 조건 세 가지를 다 이행해야 할 거야.
마지막 말은 아주 작았지만 내 귀에 천둥보다 더 크게 울렸다. 망가진 내 몰골과는 다르게 그는 목소리 톤 끝자락까지 차분하다. 그 침착한 목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나를 찔러댄다. 가시가 온 몸을 찌르듯 아프게. 나는 고함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닌 건 차분한 목소리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실제로 한 대 얻어맞아야 하더라도 이보다 더 아프진 않으리라.
다른 한편으론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나를 이렇게 사정없이 망가트려놓고 넌 뭐가 그렇게 냉정해?
입술을 깨문다. 저 남자가, 지금 이 순간처럼 야속해 본 적은 결코 없었다. 또 저 남자가, 지금 이 순간처럼 무서웠던 적도 결코 없었다.
비틀거리는 내 몸을 새론이 요령 있게 잘 받쳐주었지만 내겐 그것에 대해 고마워할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내 상태를 알아채고 배려한 듯 새론은 그저 묵묵히 나를 부축해주었다.
"새론, 당신 주인이 미쳤나 봐요."
"……."
"대체 왜 저럴까요?"
"……."
"나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계속해서 새론에게 뭔가를 말해댔지만 딱히 새론에게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런 내 심정을 새론도 알았는지 그녀는 현명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위로하듯 등을 몇 번 토닥거려줄 뿐이다.
어렵사리 방에 도착하고 나는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지금은 일단 쉬고 싶었다. 혼란으로 뒤죽박죽 엉클어진 머리를 일단은 냉정히 가라앉히고 싶었다. 눈을 감았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도 나는 자갈이 깔린 바닥에 누운 사람처럼 한껏 몸을 움츠렸다. 그렇게 몸을 웅크린 내 몸 위로 새론이 다정하게 이불을 덮어준다. 그 생각지도 못한 따스함에 울컥, 눈물이 나려했다.
맙소사.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미쳤다. 저 남자가 미쳤다.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다.
============================ 작품 후기 ============================
* M.
K님, ㅎㅎㅎ 일종의 피임약이죠^^;;;; 안 먹을 수가 없죠, 사실;;;
* 지구주민님,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기 보단 사실 그쪽에 대해서 크게 고려하지 않았을 거예요^^
* 별빛같은마음님,우리 유나, 넌 왜 그렇게 되는 일이 없니?
ㅠㅜ
* 유키렌님, ㅎㅎㅎ댓글 보았답니당 ㅎㅎㅎ 대단하세요! ㅎㅎ 추리력 짜아앙~!
* 팔톤님,아 좋아라 ㅎㅎㅎ
* Maybe I Can님, ㅎㅎㅎ엄마는 유나에게 사사꽃차를 주지 않았답니다. ㅎㅎ
* 게으른냥님, ㅠㅜ 에구 불쌍한 것 ㅠㅜ그래도 걱정마라. 니가 뮤한테 크게 한 방 먹일 테니까.
* 정우규리하님, 정부쌈?? 보고 한참 생각했습니다. 보쌈이름인가? ^^;; 죄송;; ㅎㅎㅎ 뮤를 꽁하다, 의뭉스럽다 ㅎㅎㅎㅎㅎㅎ아, 속시원하다. 사실 저도 뮤가 얄미워서 약간 그런식으로 쓰긴 했는데, 나중에 제 친구가 수정을 요구할지 모르겠네요-.
-;;
* whomi님, ㅎㅎㅎ 나름 여러번 깔았지용~ 갑자기 피임차다! 하면 너무 어색할 것 같아서 ㅎㅎㅎ
* aaaara님,ㅎㅎㅎ담편 얼른 올려드립니다 ㅎㅎ
* 배고파5님,넵! 앞으로 유나는 사사꽃차는커녕 사사꽃도 못봅니다 ㅎㅎ
* lulullu님, 사사꽃차를 못마시게 하는 것 자체가내 애를 가져도 상관없다는 뜻 아닐까요? ㅎㅎ
* 워킹데드can님,ㅎㅎ 독점욕도 강하고 자부심도 강한 놈이니 아마 제대로 빡쳤을 듯? ㅎㅎ
* 유진유민쓰마미님,...... 존경스럽습니다!!! 뭔가 오로라같은 것이 느껴지는!! 나중에 면담이라도?? ㅎㅎ
* 미야혀니님,ㅎㅎㅎㅎ유나 편 생겼네요. 에헤라디야~~ ㅎㅎㅎㅎㅎ 뒤에 뮤가 고생 좀 할테니 그걸로 맘 좀 푸세요 ㅎㅎ
* 페르디엔님,후회해야죠. 잘난 인간이라 자기 감정 쉬이 인정하려 들지 않을 텐데, 그만큼 여자를 고생시키는 형이니 후회하는 씬은 꼭 넣어야죠!! ㅎㅎ
* 우왕ㅋㅋ님, ㅎㅎㅎ 유나가 알아서 척척 피임하고 있었습니다!! ㅎㅎ앞으로가 문제지요! ㅎㅎ 쿤, 쿤~~ ㅎㅎ
전 제가 하루 세시간이면 몇 장은 뚝딱 쓸 수 있을 줄 알았더랬습니다...
오만이었죠. 네, 그것도 아주 큰 오만이었어요...
세시간에 반장 쓰기도 힘들어지는 걸 보면
점점 힘들어지는게 글쓰는 작업인가 봅니다 ㅎㅎ
벌써 또 새벽이네요.
다들 좋은 꿈 꾸시고요~
선작 코멘트, 추천해 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