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6 회: #5 -- >
이 말은 정말로 주제를 넘어선 것이겠지.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주제를 넘어선 일이라도 사실은 말하고 싶다. 부디 소원컨대 이것까지 들어 달라 당장이라고 그 말을 내뱉고 싶다. 하지만.
'라니가 날 정말 미워하면 어떡해.'
내 오지랖에 진심으로 분노할 지도 모르는 라니를 떠올리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것까지 이 남자가 들어줄 지도 의문이다.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야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그 대가로 나는 그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그는 내게 무엇을 요구할까? 과연 내게 요구할만한 것이 있기라도 한 걸까?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기에 더욱 무섭다.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이 남자가 얼마든지 내 부탁 따위 무시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더욱 무섭다.
"마저 말하지?"
"네?"
"방금 하려했던 말. 마저 말해보라고."
"아니……그건……."
내게서 한 치도 시선을 떼지 않던 그가 미묘하게 날이 선 시선을 내게 고정시키며 천천히 입술을 뗀다. 그 행동은 무척이나 느렸지만 나는 거미줄에 얽힌 벌레마냥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내 상태를 눈치 챘는지 그가 씩 매력적인 웃음을 지었다.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에 나는 도리어 꽁꽁 얼어붙은 듯 그저 멍하니 그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미치도록 심장이 뛰어댄다. 대체 이 긴장감은 어디에서 오는 거란 말인가?
"난 네가 하고 싶다는 그 말이란 걸 끝까지 들어봤으면 좋겠는데."
"……."
"응?"
"……."
"말해."
그가 명령했다. 그랬다. 그건 명령이었다. 거역해선 안 될 것 같은 강한 명령. 그 명령에 나는 떼어지지 않으려하는 입술을 간신히 떼어냈다. 어쩐지 목이 타 들어가는 것 같다.
"……별 말 아니에요. 단지 제 말과 생각이 라니에겐 모욕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말을 삼가려했던 것뿐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도우려 하는 사람의 말을 모욕으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도울 가치가 없겠지."
그의 말은 아픈 것이었다. 많이, 아주 많이.
"……모든 사람이 전부 당신처럼 강한 건 아니에요."
"강하다?"
"라니는-."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오늘처럼 원망스러웠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라니에게 자존감이란, 그 지옥 같은 집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탱하기 위한 유일한 삶의 방법일 뿐이에요.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그게 알량한 자존심과 뭐가 다르지?"
글쎄,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선 더 이상 그와 말할 필요가 없단 생각에 나는 원래하려던 말을 꺼냈다. 그는 평생 이해하지 못할 문제일 테니. 당신은 그런 상황에 놓일 일조차 없겠지.
"……어쨌든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과 결혼이 깨진 다해도 배롤린 남작은 또 그런 식으로 라니를 팔아먹으려 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최소한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과 맺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라니가 싫어할 것 같아서 하지 못했어요."
"……."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침묵을 지켰다. 이제 진짜, 더 이상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없다. 다했다. 이젠 그의 선택만이 남았다. 내 부탁을 들어줄 것인지 아님 그냥 흘려듣고 말 것인지는 모든 건 순전히 그의 마음에 달렸다.
그에게선 별다른 말이 없었다. 덕분에 집무실엔 어색하고 차가운 침묵만이 가라앉았다. 그 무거움에 도망가 버리고 싶다는 본심을 꾹꾹 누르며 나는 그의 앞에 온 힘을 다해 앉아있었다.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 그는 날 보고 있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시선을 느꼈다. 그건 내게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랬다. 그는 이렇게도 큰 남자였다. 딱히 화를 내지도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두렵게 만들어 버릴 수 있을 만큼, 그는 진짜 높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한없이 낯설게 느껴졌다. 같은 사람이 맞을진대 어떻게 이리도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이 남자가 나와 같이 밤을 보냈던 그 사람이 맞나? 정말? 난 어떻게 그를 받아들였지? 어떻게 이런 남자와 잠자리 관계를 갖고도 멀쩡히 숨을 쉴 수 있었을까?
그는 이토록이나 큰 사람이고 나는 너무나도 평범하고 또 평범한 여자아이일 뿐이데.
지금 이 순간 그 차이의 크기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눈앞에 앉은 이 남자가 사람들이 그토록 수군거려대는 바로 그 알브레히트 공작이라는 사실을.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다. 잠시 그가 한 말을 곰곰이 입 안으로 되새기던 나는 그 의미를 깨닫고는 숙였던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제 부탁, 들어주신다는 거예요?"
그가 원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 그 말의 뜻이 무언지 분명히 이해했음에도 나는 다시 되물었다. 확답, 내게는 확답이 필요하다. 불안한 나를 안심시켜 줄 수 있는 확답이, 나중에라도 절대 번복하지 못할 그런 확답이.
그런 내게 아름다운 그가 웃어 보인다. 눈까지 휘어지는 그런 웃음을.
"내가 원하는 것을 네가 이행하겠다는 존재 하에서."
"당신이, 아니 공작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제가 하겠다하면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다고요? 그 두 가지를 다요?"
제발 그렇다고 얘기해. 내게 분명한 대답을 달라고!
"어지간히도 의심이 많군 그래. 들어주지."
그의 말에 한껏 긴장했던 어깨가 스르륵 풀어져 내렸다. 들어준다고 그 입으로 직접 말했으니 확실히 들어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남자니까.
"그럼 이젠 내가 원하는 걸 말해도 될까?"
눈을 내리깔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콩콩 두드리고 있는 내가 웃겼는지 다시 본 그의 눈이 조금 더 휘어져있었다. 나는 재빨리 손을 내리고 그의 말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사실은 궁금하다. 대체 그가 내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도 그럴 것이 생각해 봐라. 내게 바랄 것은커녕 무엇이든 원하는 건 다 손에 쥘 수 있는 사람이 굳이 내 부탁을 들어주면서까지 내게 원하는 것이 있으리라 여겨지는지. 정말 있기는 있는 걸까 싶기도 하고. 있다면 그게 대체 뭘까? 그는 내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어쩌면 앞으로는 대가를 주지 않겠다는 말일 수도 있겠다. 이젠 대가 없이 나를 가지겠다고 할 수도 있겠고. 그런 것이라면 상관없다. 이미 그에게서 받은 보석은 충분히 많으니까. 어쩌면 앞으로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라는 말을 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상관없다. 어차피 뭔가를 요구하는 것이 내 성격상 마냥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으니까. 그가 어떻게 생각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원체 뭔가를 조른다거나 하는 것에 익숙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또…….
"……."
그리고 또 없다. 모르겠다. 그가 내게 무엇을 원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짐작도 하지 못하겠다.
"내가 원하는 건 세 가지로군."
"세……가지나요?"
그가 웃는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한 가지도 짐작조차 못하겠는데 세 가지나 된단다. 그것보다 정말로 내게 원하는 것이 있구나하는 사실에 더 혼란스러웠다. 그런 내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의 입가에 띄워진 미소는 한층 더 나른한 것으로 바뀌었다.
"먼저 첫 번째는 그 놈의 호칭 좀 바꾸지."
호칭?
"……저번에 말씀하신 걸로요?"
"기억하는군."
떨떠름한 내 말에도 그는 아랑곳없이 고갤 끄덕여댄다.
"그 놈의 당신, 공작님 이딴 소린 좀 때려치우라고. 특히 침대에서까지 공작님 소릴 들으면 피곤해. 일하고 있는 기분이 드니."
"……."
아무래도 사교계에 한바탕 난리가 나겠군. 그 파장이 예상돼 절로 이마가 찌푸려지려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 파장이 얼마든 얼마나 크든 내가 한 부탁을 들어준다면야 남들의 수다 따윈 개의치 않을 수 있다. 게다가 파티장같은 곳에는 나보다 이 남자의 참석이 더 잦지 않은가. 상식적으로 말이다. 함께 참석할 일은 아예 없을 테고, 내가 반드시 참석해야 할 파티 또한 거의 없을 테지. 초대 받아봤자 안 나가면 그만이다. 귀족도 뭣도 아닌 내게 파티 참여 의무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 사람들 앞에서 이름을 부르는 모습을 보여줄 일 또한 없다. 그 사실에 안도하며 나는 순순히 그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알았어요. 앞으로는 뮤아르노와님이라고 부를게요."
"알긴 뭘 알아? 뮤라고 불러."
"……뮤아르노와님이요."
"라니 배롤린의 일은 그냥 없던 것으로 할까?"
급기야 그가 협박을 해온다. 절대 무를 수 없을 거라는 그 말투에 어쩐지 부아가 치밀었지만 사실 내가 한 부탁과 그가 내게 요구한 일의 경중을 따져봤을 때 내 득이 더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다.
"뮤님."
"뮤."
"뮤님."
"……좋아."
그가 나름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는 뭔가요?"
"두 번째도 간단해."
"간단이요? 제 입장에서요, 아님 당시……아니, 뮤님……입장에서요?"
"별 일도 아닌 걸 참 어려워하는군."
그는 단순한 호칭 부르는 것 따위를 굉장히 어려워한다며 나를 타박했지만 나는 입술만 삐죽거려댔을 뿐, 다른 반박은 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네가 이 공작성으로 들어올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