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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65화 (65/206)

< -- 65 회: #5 -- >

"안 어울려요."

"응? 아아."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한 건지 아는 모양인지 돌아보지도 않고 그가 고갤 끄덕인다. 마치 내 말을 인정하기라도 하듯이.

"전 공작부인, 그러니까 내 어머니께서 걸어두신 거지. 이 삭막한 환경을 어떻게든 개선해 보고 싶다 하시면서. 결국은 실패하신 것 같지만."

"음."

그러고 보니 이 남자도 부모를 일찍 여위었구나. 워낙에 잘난 인간이라 지금까지 그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었는데.

언제였더라? 정확히는 모르겠다. 오래 전, 알브레히트 공작부인의 사망 소식이 있었다. 원체 몸이 좋지 않았었기에 공작부인의 죽음이 갑작스런 것은 아니었다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충격마저 가볍지는 않는 법이다. 그 충격으로 알브레히트 전 공작은 무리한 업무와 과로로 몸을 혹사시키다가 부인의 죽음 이후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고. 사실 알브레히트 전 공작의 죽음에 관해서는 이런 저런 말들이 많았지만 그 중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른다. 그 때 루벤스 제국은 공작의 죽음으로 한동안 시끄러웠더랬다.

그로 인해 현 알브레히트 공작인 이 남자는 그 때 당시 공작 위를 이어받기엔 아직 벅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무거운 자리에 앉아야 했다고 한다. 다행이 타고난 실력이 워낙에 출중하여 전 공작의 부재는 쉬이 가라앉았다고도 했지.

그 때 그의 나이가 몇이었을까? 아마 내 나이 14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음, 맞구나. 내 나이 14살이 맞다. 그 때부터 론 배롤린 자식이 나를 틈틈이 노려댔었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 내 나이 14살이면 이 남자는 22살이었을 때.

22살. 어른 같지만 어른은 아닌 나이. 내 나이 22살에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그리 대단한 일을 하고 있을 것 같진 않다. 아무리 우수한 교육을 받았다 손 치더라도 확실히 22살의 남자가 공작 위를 이어받는다는 건 쉽지만은 않았을 법 싶다. 그래서 모두가 그리도 걱정했었던 거겠지. 하지만 그는 그를 걱정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주 훌륭하게 아니 오히려 월등하게 일을 해냈다. 그의 일처리에 그 누구도 불평하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그건 그렇고. 웬일이지? 부르지도 않았는데."

"거짓말 마세요. 제가 찾아올 줄 알고 계셨잖아요."

"그랬던가?"

"저한테 큰 떡밥을 던져 주시고 가셨으니까요."

"떡밥?"

떡밥이란 단어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니 어쩐지 우스웠다. 순진한 어린아이에게 몰래 욕을 가르친 기분이랄까. 묘하게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애써 부여잡고 나는 그를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어쩜 진짜 노려본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소문조차 나지 않은 일을 일부러 제게 말씀하셨다는 거, 다 알아요."

"그래서?"

"뭘 원하세요?"

나는 말재주가 없다. 돌려 말할 줄도 모른다. 그리고 돌리고 돌려 말해봤자 어차피 통하지도 않을 사람이 눈앞의 이 남자다. 이 남자는 내가 최선을 다해서 뛰면 그 위에서 둔갑하고 있을 사람이지. 그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래서 며칠을 고민하고 또 고민한 뒤, 나는 결국 고민을 포기했다.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과 돌려 말하는 것에 차이가 없으리라. 그러니 그냥 말하자. 내 욕심 그대로. 이미 내 패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에겐 솔직하게 말하는 것보다 더 좋은 직구는 없을 것 같다.

천천히 숨을 들이쉰다. 천천히, 천천히 그리고 깊게.

어쩌면 이 일로 인해 뭔가가 크게 틀어질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그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다. 아니 희박하다. 이 남자에게 이 일이 무슨 대수라고 내게 큰 것을 요구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나는 한층 또렷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저렇게 쳐다보고 있을 건 뭐람.

조금도 거침없는 시선이 나를 직면하고 있었다. 그 시선 한방에 방금 전의 용기가 볼품없이 수그러들었다. 왠지 거북스러워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

그렇다고 시선마저 사라지진 않지.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고야 말았다. 가끔, 아니 자주 나는 그의 그런 똑바른 부딪힘이 무척이나 거북스러웠다.

"내게 뭘 줄 수 있는지 먼저 말해보지?"

"제가 줄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다는 것을 잘 아시면서."

"그 말은 방금 전 네가 나에게 붙이려했던 흥정에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내게 뭘 원하느냐 물은 건 넌데."

"그러니 제가 먼저 물은 거죠. 제가 줄 수 있는 걸 당신이……아니 공작님께서 답하실 테니까요. 어차피 공작님도 제게 받을 수 있는 걸 요구하셔야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고계시지 않나요? 그러니까 말씀해주세요. 제게 뭘 원하세요?

"어차피 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나보고 알아서 줄 수 있는 것을 찾아 청구하라, 이 뜻인가?"

"……정답이에요."

이래서 똑똑한 사람과 대화하는 건 편하고도 피곤하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고 너무 내 속마음을 잘 간파하니 피곤하다. 이 얼마나 이중적인 사고방식이란 말인가.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것은?"

"네?"

"네가 이곳에 왜 온 건지는 잘 알지. 여기에 오도록 만들었다는 그 말 전부가 틀렸다고 하진 못하겠군.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것은?"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대충 예상은 되지만 그래도 그 말만은 직접 들어야하지 않겠나. 그래서 내가 어찌해 주었으면 하는데?"

"……."

그렇게 말한 그는 조용히 내 말을 기다리겠다는 듯이 소파에 깊게 기대앉았다. 평소에 자주 짓던 언뜻 장난스럽게 비치던 미소가 지금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평소보다 차갑게 가라앉은 것 같은 그 분위기가 제법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도 여겨졌지만 어쩌면 그건 단순한 내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무 긴장해서, 갑작스런 분위기에 당황해서 그리 보인 걸지도……. 어쨌든 그의 얼굴엔 그 어떤 표정도 없었다. 그저 단단하고 차분하다.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겠다는 건가? 그럼 나도 한층 더 용기를 내야겠지.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라니 널 위해서, 난 이보다 더한 용기도 낼 수 있어.

"라니 배롤린이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과 결혼하지 않게 해주세요.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소름 돋는다고요. 배롤린이라는 성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은 편견에 찬 시선으로 라니를 평가해대곤 하지만, 라니는, 라니는 배롤린 남작과 같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절대 아니에요.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과 결혼해야 할 만큼 모자란 아이가 절대 아니라고요."

"……."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이 어떤 사람인지는 소문만 들어봐도 아시겠지만, 백작은 소문보다 더 끔찍하면 끔찍했지 덜하지 않은 짐승이죠. 설령 백작이 실제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그 나이 때 사람과 억지로 결혼해야 할 만큼 라니가 값어치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귀족 가(家)에서의 정략결혼은 흔한 일이지. 아버지뻘이 아닌 할아버지뻘 되는 남자와 결혼해야했던 백작, 후작, 심지어 공작 영애들도 수두룩하다. 불행한 결혼을 앞둔 귀족영애가 비단 배롤린 영애 하나만은 아니라는 소리야."

"그런 말 마세요."

"……."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 일에 신경이나 쓸 것 같아요? 제가? 다른 영애들이 어떻게 사는지 저와 무슨 상관이라고."

무슨 상관이라고, 다른 사람 따위. 다른 영애가 불행해지던 말든 그게 대체 나와 무슨 관계라고!

목이 탄다.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딱히 마실만한 것이 없었다.

"다 알면서, 다 알고 계시면서 저를 떠보려 하지 마세요. 지금도 충분히 힘들다고요."

"……."

"라니와 관련된 일이 아니었다면, 절대 찾아오지 않았어요. 라니와 관련된 일이라 해도 이런 최악의 일이 아니었다면, 찾아오지 않았을지 몰라요. 절 이곳으로 부르셨으니 도와주세요. 이 일로 라니 대신 다른 영애가 그 백작과 결혼을 해야 한다 해도, 전 몰라요. 저한텐 라니만 중요하니까요. 다른 영애 따위, 알게 뭐예요."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 그 끝에 살며시 울음이 맺힌다. 이기적으로 굴 거면 끝까지 그리 굴 것이지 눈물이라니! 이제와 착한 척이라도 하려는 건가? 그런 내 모습이 스스로도 가증스럽다.

하지만, 하지만 이왕이면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 따위, 그런 인간쓰레기 따위,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다른 희생자가 나오기 전에 누군가가 죽여줬으면 좋겠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해보라는 듯 내 머뭇거림마저 묵묵히 인내해 주 듯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다.

"제가, 제가 어떤 식으로 말해도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단 한가지예요. 라니의 결혼, 막아달라는 거요. 그리고 가능하시다면……, 가능하다면……."

"……."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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