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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64화 (64/206)

< -- 64 회: #5 -- >

어쩌면 성 입구에서 꽤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매번 이 공작성에 왔을 때는 그때마다 그 남자가 보냈던 공작성의 마차로 온 것이었기에 입구에서 제재를 당하지 않았었고 게다가 젠 경이 있었다. 공작성의 완벽한 충신 젠 경이 있었기에 따로 확인을 거칠 필요도 없이 공작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공작성을 나타내는 표식이 그려진 마차가 아니라 일반 마차다. 젠 경도 없다. 그러니 제재를 당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것이 당연하게 생각될 정도였기 때문에 딱히 그에 대한 불만도 없다. 단 한 가지, 그 동안 푹신푹신한 공작의 마차에 익숙해져버린 내 비겁한 몸뚱이가 딱딱한 일반마차의 불편함에 꼬물거려댄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게 다 괜찮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마차는 공작성 입구에서 제재를 받았다.

"여긴 알브레히트 공작성입니다. 누구십니까? 신원을 밝혀주십시오."

"아, 저기."

"방문 예약은 하셨습니까? 무슨 용건으로 알브레히트 공작성에 오셨습니까?"

쏟아지는 경비의 질문에 당연하게도 마부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저 어떻게 답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얼버무리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그 당황스러움이 마차 안에 있는 내게까지 전해져 와 나는 웃어버렸다.

이 마차는 공작성으로 가기 위해 내가 부른 것이다. 즉, 교통용 일반마차라는 소리다. 마부는 손님인 내가 공작성으로 가달라는 말에 별 생각 없이 이곳으로 왔을 뿐이고. 그런 마부가 내 용건 따위 알게 뭐란 말인가.

"저기, 아가씨."

결국 마부가 나를 부른다. 나는 서둘러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마부에게 미안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괜히 죄 없는 사람 곤란하게 만들었다.

"저는 유니시이나입니다."

"헉! 아가씨!"

"저는-."

"넵, 알고 있습니다."

"예, 그러니까 제가 온 이유는-."

"당장 공작성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미처 알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

다행이도 내 얼굴을 아는 경비였던 모양이다. 이것저것 준비했던 말들을 내려놓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사연을 구구절절 끄집어봐야 결국엔 그 남자를 찾아왔다는 말이 전부 아니던가. 그래, 결론은 그거다. 어떻게 포장해봐야 똑같은 말. 그리고 그 남자를 만나서 내가 할 얘기들도 어떤 식으로 시작하고 엮이든 마무리는 같은 말이 될 테지.

허가를 받지 못한 마차는 성안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경비가 부른 공작성 마차로 바꿔 타야했다. 마부에게 감사의 표시로 넉넉하게 돈을 지불하고 경비에게도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아마 이 경비는 그 남자가 나를 불러서 내가 이곳으로 온 것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어쩌면 '나'라는 이유만으로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고 나를 성 안으로 들여 문책을 당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직 내가 그의 정부로 있는 이상은 괜찮지 않을까?'

공작성 마차를 타고 본성 입구에서 내리자 마중 나와 있는 새론을 볼 수 있었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공손한 태도로 대기하고 있는 모양새에 웃음이 나온다. 새론은 이 공작성에서 내가 조금이나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늘 상냥하고 친절한 새론. 왜 내게 그런 호의를 베푸는지 모르겠지만 조용하고 침착한 그녀가 우울해져 있는 나를 위해 가끔씩 이야기 소재를 만들어내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따뜻해지곤 했다. 입가에 절로 반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새론."

"어서 오세요, 유나아가씨."

조용히 인사를 건네는 새론의 모습은 시녀라기보다는 단아한 귀족영애처럼 보였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새론은 단순한 시녀 같지가 않다. 한낱 시녀라고 하기엔 새론이 풍기는 분위기가 무척 정갈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떨 때의 그녀는 하나의 단단한 검 같았다. 왜 그런 이미지를 새론에게서 떠올린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는 그런 뭔가가 있었다. 사소한 동작이나 행동 하나하나에 빈틈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녀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내게 등을 보이고 있는 그 순간에도 내 행동을 다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 검은커녕 나무 막대기조차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내가 이런 말 해봤자 신빙성 제로겠지만 어쨌든 새론은 특별한 여자임이 틀림없다. 하긴, 공작성의 시녀장이 특별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겠지. 궁금하다 해서 내가 새론의 과거에 대해 캐물은 것은 아니기에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제가 갑자기 와서 놀랐죠?"

"아닙니다. 요즘 들어 자주 뵙는 것 같아 저는 좋기만 하네요. 안으로 드세요, 아가씨."

"킥, 네."

이젠 제법 익숙해진 길을 따라 성 안으로 들어섰다. 바닥에 깔린 이 비싼 카페트를 보면서 놀랐던 것이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인데. 저 비싼 것을 왜 바닥에, 그것도 현관 바닥에 깔아놓은 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속으로 중얼거렸었지. 하지만 이젠 이 카페트를 보며 나는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이 카페트보다 더 어마어마한 것들이 사방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간사하긴. 몇 번 봤다고 제법 익숙해졌나보지? 처음처럼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는 걸 보니.

그래도 각 복도의 모퉁이 선반 위에 놓인 고급스런 도자기들을 볼 때마다 여전히 심장이 불안불안 하다. 저 비싼 것들을 왜 저리 위험한 곳에 둔건지. 이건 아직까지도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다. 코너를 잘못 돌아 부딪치기라도 한다면, 혹은 어린 아이들이 뛰어 놀다 부딪히기라도 한다면, 쨍그랑~! 도자기는 너무나도 쉽게 떨어져버릴 테지. 게다가 저렇게 놓인 것들이 맘 놓고 깨도 놓을 만큼 만만하게 비싼 것들도 아니다. 여기서 만만하다는 단어는 내가 아닌 귀족들의 입장에서 한 말이다. 내게는 비싼 것들이 귀족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가격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저 도자기들 가격이 무려 일반마차의 10대 가격에 상향한다는 말을 듣고 난 후부터 저 정도 가격이라면 일반 귀족들에게조차 절대 만만하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 뒤로 도자기를 볼 마다 더욱 불안해지는 심장을 막을 수가 없다.

"아가씨,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예? 아, 저기, 그러니까 새론. 그러니까 저는 그 남자……아니, 공작님과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가급적 빨리 얘기하고 돌아가고 싶은데, 혹 지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오늘 다시 돌아가신다고요?"

"예. 할……일이 있어서요."

다행이 새론은 그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스꽝스런 말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아줘서 내가 무척이나 안도했음을 그녀는 모를 거다. 내게 할 일 따위 없다는 것을, 새론은 알고도 그냥 넘어가 준 걸까? 별장에서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사실상 당장 해야 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사실은 안 해도 되는 것들이었으니까.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쓸 자금도 모아야겠다는 생각에.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닌 그 남자의 체면 때문에 생각으로 멈춰야했다. 정작 그 남자가 아닌 별장 시녀들이 말렸다는 것이 더 웃긴 일이었지.

"그럼 지금 바로 공작님 집무실로 가시겠어요?"

"……거긴 아무나 들어갈 수 없지 않아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게요. 공작님께 제가 왔다고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응접실로 안내받았다. 그 동안 이 공작성에서 내가 쓰던 방외에 다른 곳을 거의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번엔 확실히 안내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정말로 난 그 남자의 집무실도 그 남자를 공적으로 찾아온 사람들이 머무는 응접실도 어디에 있는지 몰랐으니까.

새론이 나가고 응접실에 혼자 남겨진 나는 소파에 앉을까하다 그냥 서 있기로 했다. 방금 타고 온 마차가 딱딱한 탓이었는지 허리가 많이 찌뿌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쩐지 금방 돌아온 새론이 방에 올라가서 기다리라고 할 것 같기도 하고.

점심시간에 맞춰온 것도 아니고 한창 바쁜 오후 시간에 왔기 때문에 모르긴 몰라도 시간 내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다. 나는 왜 하필이면 이 시간에 온 건지. 하여튼 한 가지 고민에 빠지면 다른 것은 고려해 보지 못한다는 단점을 고스란히 깨닫는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여러 가지 것들을 고려해 봤다 손 하더라도 이미 결정을 내린 이상 바로 이곳에 왔을 것 같기도 하다. 그 남자를 만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리 달려온 것은 혹시나 해서다. 혹시나 그가 허락해줘서 상황이 좋으면 빨리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하는 얄팍한 생각 때문에.

그리고 내겐 무척이나 다행이도 그 혹시나 하는 상황은 내 손을 들어주었다. 잠시 후 응접실로 돌아온 새론이 그가 나를 집무실로 안내하라 명했다는 말을 전해주었으니까. 집무실로 오라는 말에 놀랐지만 어쨌든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 새론입니다. 아가씨를 모셔왔습니다."

"들어오지."

"네."

새론이 문을 열었고 내가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가만히 서서 처음으로 들어와 본 그의 집무실을 가볍게 훑어보았다. 다섯 명이 족히 앉을 수도 있을 법한 넓고 큰 책상 가운데 그가 앉아있었다.

사각사각. 뭘 저렇게 쓰고 있는 걸까? 책상 위에는 서류들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그 뭉치만 대충 세어도 7개 정도. 게다가 그 두께들이 장난이 아니다. 저 것들이 다 종이로 쌓인 거 맞는지 의심될 정도다. 속이 울렁거려. 쌓인 서류의 두께만 보아도 질릴 것 같다. 나보고 저걸 다 읽으라면 나는 그냥 술 마시고 배 째라고 하련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

"……네."

서류를 쳐다보고 있던 내 표정이 너무 노골적으로 구겨져 있었나보다. 어쩐지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자, 언제 펜을 논건지 가까이 다가와 있는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팔을 잡아 소파로 이끌며 나를 앉히고는 앞 쪽 소파에 그도 앉는다. 앉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가 앉은 소파 뒤쪽 벽에 걸린 그림에 시선을 두었다. 파란 모자를 쓰고 있는 어린 소녀가 유니콘의 갈기를 쓰다듬고 있는, 왠지 이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 아동틱한 느낌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안 어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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