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3 회: # 4-4 그 남자 -- >
"히힉!"
호세의 말에 사키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굳어버렸다. 호세는 가만히 주군을 쳐다보았다. 날카로워지는 눈빛과는 반대로 입가의 미소는 더욱 부드러워진다. 저 시선에 정면으로 쏘이면 제대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드물리라. 백장노인이든 그 어떤 심지가 강한 무인이라 할지라도 저 눈빛을 감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호세 자신 역시도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가는 것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이럴진대 검이라고는 잡아본 적도 없는 여인이 만약 저 시선을 받게 된다면? 아마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치도 못하고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버려 주저앉고 말 것이다. 주저앉기만 하면 다행이지. 그대로 숨넘어갈지도 모른다.
"정말 재미있네. 반발심이 생길 정도야."
"아가씨가 어렸을 적부터 온 가족이 즐겨 마셨던 차라고 합니다. 그러니 아가씨께선 소소꽃차가 어떤 효능을 지녔는지는 모르실 수도-."
탕.
뮤의 말에 호세가 어쭙잖은 변명의 말을 대신 꺼내보았지만 길게 말하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들어야 할 사람이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세의 말을 무시하고 뮤는 그대로 집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문은 거칠게 열리지도 세게 닫히지도 않았지만 호세와 사키는 어쩐지 크게 문 닫힌 소리를 들은 듯 했다.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크게. 하지만 이미 닫힌 문은 그저 고요할 뿐이다. 그리고 그 안에 남겨진 사람들도 고요했다. 호세와 사키는 갑작스런 그 적막 속에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호세."
그 적막 속에서 사키의 조심스런 음성이 삐죽삐죽 새어나왔다. 호세는 사키의 부름에도 고갤 돌리지 않고 여전히 문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호세. 그 아가씨는 대체 왜 소소꽃차 같은 걸 마신다냐? 응? 이해할 수가 없네."
다들 저 알브레히트 공작에게 안기고 싶어 난리들인데.
작게, 사키가 말을 덧붙인다.
어떻게든 그 씨앗을 품어보려고 남들은 무서울 정도로 달려드는데, 왜 그 아가씨는 피임약 따위를 먹느냐는 사키의 어투에 호세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다른 누군가가 일반론을 펴 네 놈을 판단하는 것은 극도로 싫어하는 주제에 결국 네 놈이 똑같은 짓을 하는 거냐?"
"……아니, 그게."
"그렇다면 상식이 있는 사람으로서 소소꽃차의 성분을 아는 사람이 그 차를 마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 내게 묻고 있는 건가?"
"……이런, 내가 실수했군."
사키는 제 실수를 인정했다. 너무도 잘난 주군이다 보니, 그런 주군께 매달리는 여인네들을 질리도록 봐오다 보니 잠시 머리가 돈 모양이다. 깨끗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사키의 모습에 호세가 인상을 풀었다.
"그나저나 대단한 아가씨로군."
사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처음 소소꽃차의 효능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보다 표정은 한결 진정돼 보였지만 여전히 말투는 그 때나 지금이나 가벼웠다.
"저렇게까지 주군께 냉담할 수 있는 아가씨가 있을 거라곤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 놀라워. 게다가 하는 행동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주군께서 더 이상 찾지 않으면 아예 이곳을 떠날 계획인가 보던데. 그 사실을 주군도 아시나?"
"네가 아는 것을 주군께서 모르실리 없지."
"……호세 네 놈의 말은 가끔씩 기분이 나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 쳇. 하여튼 그 아가씨, 괜히 걱정스럽네. 어쩌자고 자꾸 주군의 심기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거지? 떠나려면 조용히 있다가 떠나도 좋을 텐데."
"주군의 심기에 거슬리는 것이 바로 그 떠나려고 하는 행동이란 생각은?"
"뭐?"
호세의 말은 분명 사키도 생각했던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주군이 타인에게 마음 따위를 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자신의 의문을 그저 웃고만 넘겼을 뿐이다.
"연정……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직 연정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호세는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사키는 호세의 말 속에 다른 부분을 잡아챘다. 미묘하게도 지금까지 사키의 마음속에 걸리적거려 찜찜하게 남아있었던 그 무언가를 호세는 알아낸 모양이다.
"아직이라고?"
호세는 자신의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쏟아져 있을 서류 뭉치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것들을 다 모으면 손바닥 두께정도 되겠지. 게다가 한장 한장 모두 꼼꼼히 살펴보아야 것들로만. 모두 한시라도 빨리 처리해야 할 것들이었다. 게다가 호세가 처리해야 할 서류는 이곳에도 있었다.
더 이상 사키와 잡담할 시간이 없다 판단한 호세는 서둘러 자신이 처리해야 할 서류뭉치를 대충 모아들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일터로. 호세가 자신의 사무실로 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 뒤를 사키가 쫄래쫄래 쫓아온다. 귀찮아도 너무 귀찮은 녀석인지라 호세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봐, 호세. 우리 잠깐 대화 좀 나누자고. 사실 나도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은 없었지만 그 아가씨와 주군을 생각할 때마다 드는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거든."
"그 의문 그냥 가슴 속에 묻지 그래."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쏟아내는 사키에게 호세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어댔다.
"어떻게 그래? 주군의 일인데."
"주군의 일이니 묻으라는 소리다."
"뭐?"
"주군께서 결정하시지 않은 것을 네가 나서서 판단할 필요 없어. 그건 월권이고 주제넘은 짓이지."
"그러다 나중에 후회하실 결정이라도 하게 되면 어쩌려고?"
사키의 말에 호세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거칠게 멈춰 섰다. 하여튼 이놈은 말이 너무 많다. 저 입을 꿰매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호세가 사키를 노려보자 사키는 그런 호세에게 도리어 씩 웃어 보였다. 어쩐지 그 모습이 참으로 불쾌해 호세는 다시 발걸음을 놀려 사키를 무시하고자 했다. 물론 그게 호세의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그런 호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사키가 날렵한 발걸음으로 다시 호세 뒤를 졸졸 쫓아왔다.
"말해봐. 그러다 주군께서 후회하실 일이라도 하게 되면, 그땐 어쩌게? 응?"
"그것 역시 주군의 일이다."
"에이~. 나는 너와 생각이 다르다고. 주군의 명에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군을 위해서야. 만약 주군께 해가되는 일이라던가 주군께서 후에 후회하실 것이 분명한 것이라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걸 막아낼 거라고. 물론 이번 건 일이라고 하기엔 좀 애매하지만 말이지. 그치만 '여자'라는 단어가 주군과도 관련되는 날이 올 줄이야 상상이나 해봤겠어?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난 주군께서 한 여자를 세 번 이상 안으시는 걸 본 적이 없다고. 그것도 고작 한 명뿐이었잖아, 안 그래? 그 때 그 아가씨 말야. 무지 예뻤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쨌든. 제일 많이 만났다던 그 아가씨도 딱 세 번이 끝이었고. 그 뒤로 그 아가씨가 얼마나 끈덕지게 굴었는지는 너도 잘 알 텐데? 하지만 이번엔 암만 봐도 좀 다르단 말야. 그렇지 않나? 거의 2년이라고, 2년. 그 뿐이야? 공작성으로까지 부르셨다며. 참, 내가 없을 때 그런 일이 있었다니! 게다가 새론의 말에 의하면 그 아가씨가 이 공작성에 일주일 이상 머문 적도 여러 번이라던데? 이 정도면 주군께서-."
"그만."
"응?"
"그만 해라."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사키의 말을 끊어내기 위해 호세는 있는 인내심을 모두 동원해야 했다. 만약 사키가 몇 주 전 외근 가는 그를 놀려댔던 자신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이리 떠든 거라면, 그건 성공했다. 자신은 지금 사키의 호들갑스런 말에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눈에 핏발이 서는 기분이었으니까. 치이는 업무 외에도 갑작스런 주군의 명에 며칠 동안 밖으로 싸돌아다녀야 했다. 그래, 바로 그 소소꽃차의 효능인지 뭔지 때문에.
부관에게 명령해 알아보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소소꽃차의 효능에 대한 것이 퍼지게 된다면 그것 또한 골치 아픈 일이라 직접 움직였던 것이 피로를 더 가속화시켰다. 공작의 여인으로 알려진 아가씨가 가장 즐겨 마시는 차가 소소꽃차라는 것은 그 차를 즐겨 마시는 아가씨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 루벤스 제국을 들썩이게 할 것이다. 가십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를 주제로 무궁무진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겠지. 주군을 그런 풍문에 노출되게 할 수는 없었다. 감히 그 누가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의 공작을 한낱 이야깃거리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이봐, 호세. 생각 외로 일이 심각해질 수도 있어. 태평하게 손 놓고만 있다가 나중에 수습이 곤란해지면 그 땐 어떡하려고 그래?"
"……그래서 너는 주군께서 아가씨를 놓을 거라 여기는 거냐?"
"응?"
"주군께서 그 아가씨를 놓을 기미가 보이냐 이 말이다."
"아니, 아직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공작 가(家)의 기사단까지 보내 지키게 한 여자다. 그런 여자를 주군이 쉽게 버릴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호세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사키는 곧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 아가씬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잖아, 안 그래? 그러니 그 전에-."
"백날 준비를 한 다해도."
하지만 신나게 자신의 의견을 펼쳐놓으려던 사키의 말을 다시 자른 건, 이제 진짜로 눈에 핏발이 서 버린 호세였다. 그 피곤한 모습에 사키는 속으로 움찔했지만 겉으로는 그저 싱글싱글 웃어 보일 뿐이다.
"그 어떤 준비를 철저히 마친 다해도 주군께서 허락하지 않은 한, 그 아가씨는 절대 떠날 수 없어."
"그건 그렇지."
사키의 긍정에 호세가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가 사키가 들어오기도 전에 문을 쾅! 닫았다. 그 명백한 축객 령에 멍하니 밖에 서 있던 사키가 순간 씨익 웃었다.
"전에 나 놀렸던 대가다, 이놈아. 큭큭큭."
물론 주군에 대한 걱정이 대부분이었지만 자신의 사심을 조금, 아주 조금 넣어 호세를 몰아붙인데 성공한 사키의 기분은 무척이나 상쾌했다.
============================ 작품 후기 ============================
* 우왕ㅋㅋ님, ㅎㅎ 사탕은 청포도맛이 최곱니다!! ㅎㅎㅎㅎㅎ
* M.
K님,세지요ㅎㅎ 파닥파닥 물난리 쳐도 못 빠져 나갑니다 ㅎㅎ
* 천상유하라님, ㅎㅎ무슨 이벤트가 있나봅니다~ ㅎㅎ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스레 부끄럽네용 ㅎㅎ
* 별빛같은마음,공작은 배롤린 남작의 수작에 슬쩍 숟가락만 얹은 거랍니다. ㅎㅎ
* 매를리위님, '그아'라~ 줄임말 괜찮은데요!! ㅎㅎㅎ 추천해주셔서 감사드려용! ㅎㅎ
* whomi님, 에구~ 과한 칭찬에 몸둘바를 모르겠네요^^그래도 요즘 칭찬이 고픈 관계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ㅎㅎ 한국드라마는... ^^;;; 보질 않아서;;; 얼마전 아는 언니랑 밥먹다 걍 틀어져 있던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데........... 무슨 식구들?? 하여튼 제목은 잘 모르겠지만 오만석이 개망나니로 나온 드라마였네요. 그거 보고 식겁했습니다.... 저게 우리나라 드라마? 눈을 비비고 또 비볐지요.
* 월하한유님, 아잉아잉~! 그런 크나큰 선물을~! 좋아서 혼자 막춤 한번 춰봅니다~~! ㅎㅎㅎㅎ 에헤라디야~제 뜰에 오셔서 포토 게시판에 올려주시면 냉큼 제가 소설 표지로 쓰겠습니당~ 감사합니다^^
* 정우규리하님, 밥 두공기에 뱃살이!
ㅠㅜ ㅎㅎ 뮤가 의지하게 만들었으니 의지해 줘야죠!! ㅎㅎ 유나야, 힘내라!
* 배고파5님,ㅎㅎㅎ 나름 센 걸 요구할 겁니다~ㅎㅎ
* 페르디엔님, ㅎㅎ 뮤가 원하는 게 있어서 그물을 쳐 논거니 힘없고 빽없는 유나는 파닥파닥 걸려줘야죠~! ㅎㅎ
* 게으른냥님, 뮤 놈이 착해지려면.... 음, 아마 그 때는 되어야 할 것 같네요~ ㅎㅎㅎ
ㅋㅋ졸린 밤입니다. 근데 이상하게 배가 고프네요.....
다들 좋은 꿈 꾸세요 ㅎ
선작 코멘트 추천해주신 모든 분들, 복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