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는 아름답다-60화 (60/206)

< -- 60 회: #4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두 여자가 얼굴을 마주 보고 앉은 소파 테이블 위에는 두 개의 잔이 놓여있었다. 크기가 서로 다른 잔이었는데 하나는 찻잔이요 다른 하나는 주스 잔이다.

나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다시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다 레니의 신경질 적인 손짓에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레니의 얼굴이 재대로 보인다. 인상을 가득 찌푸린 채로 레니가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데? 지금 화동 역할로 뭘 할지에 대해서 의논하고 있잖아."

"아."

맞다. 지금 우리는 레니의 약혼식에서 내가 맡게 될 화동 역할로 무엇을 할지에 관해 의논하고 있는 중이었다. 딱히 이렇다 할 재능이 없는지라 의논이고 자시고 할 것도 사실 없었지만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가는 레니의 눈 째림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너도 잘 알잖아.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별 거 없다는 거. 그나마 피아노를 조금 칠 줄 안다는 거? 그거 딱 하나 있네."

노래에도, 춤에도 그다지 재능이 없다. 특히 춤은……. 아, 난 그냥 서있는 걸로도 만족하는 여자다. 그렇다고 시 낭송을 하거나 추억의 편지를 써 눈물 찔끔찔끔 흘려가며 낭송하는 건……, 죽어도 하기 싫다.

누구는 즉석 꽃꽂이로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다느니 누구누구는 화려한 춤 솜씨로 감탄을 자아냈다더니 레니가 나에게 이런저런 사례를 읊어주었지만 그런 것들은 전혀 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죽어도 못하는 것들이라고나 할까.

"할 줄 아는게 이렇게도 없어? 네 잠재능력에 대해 고민 좀 해봐."

"잠재능력은 무슨 얼어 죽을. 그날 꽃 씨 심기 강좌라도 열어봐? 아님 꽃 잘 키우는 법에 대해서? 그것도 아님, 꽃 이름 나열하기?"

"아, 맞다! 너 꽃가지고 이것저것 잘 만들잖아. 요렇게 꼬았다가 저렇게 꼬았다가, 어쨌든 꽃으로 뭘 만들어보는 건 어때?"

예전에 내가 했던 행동을 따라해 보려던 것인지 요상한 손동작을 보이던 레니는 곧 자신의 한계를 재빨리 직시하고 그만두었다. 그 모습이 제법 웃겨 나는 깔깔거려댔다.

"남들 앞에서 선보일 만한 실력은 아니야. 게다가 온갖 보석으로 잔뜩 꾸며진 꽃다발에 익숙한 귀족들한테 단순히 꽃만 엮어대는 내 작품이 눈에나 차겠니? 레니 네 약혼식을 나 때문에 망칠 순 없지. 그나마 다른 귀족영애들과 비슷하게 할 수 있는 건 피아노밖에 없다니까 그러네."

"물론 피아노도 괜찮아. 정 할게 없으면 그냥 피아노로 하자고. 하지만 후보 몇 가지를 더 생각해 본다고 머리 터져 죽지는 않잖아, 안 그래? 게다가 고민을 하고 또 해봐야 좋은 아이디어라도 떠오를 거 아냐!"

피아노 하나면 됐지, 굳이 후보 몇 가지를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나 싶다. 머리가 터져 죽지는 않더라도 두통은 생기려는 듯 골이 울려댔다. 하지만 일생에 한번 밖에 없는 약혼식, 괜히 레니의 기분 상하게 하지 말자 싶어 그저 조용히 한숨을 내쉴 뿐이다.

약혼식은 한 번뿐이다. 일생에 단 한번. 결혼은 각자의 사정에 따라 한 번이 아닌 여러 번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약혼은 그렇지 않다. 오직 한 번뿐이다. 뭐, 결혼이 두 번째인 사람이 첫 결혼인 사람 덕분에 약혼식을 두 번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긴 하지만 그럴 땐 간소히 치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약혼을 하지 않고 결혼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결혼을 해본 사람이라던가, 혹은 빨리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사람들뿐이고.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식보다 약혼식을 더 소중히 여기기도 한다.

약혼식, 일생에 단 한번, 레니, 그리고 라니…….

라니, 라니, 라니. 자연스럽게 나는 라니를 떠올렸다. 아직 약혼 발표가 공식적으로 나진 않았지만 약혼 예정이라는 배롤린 라니를.

그 남자가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한 사항이니 허황된 소문 따위가 절대 아니니라.

"레니."

"응?"

"혹 라니 배롤린이 곧 약혼한다는 소문, 들어봤어?"

"배……롤린, 라니?"

배롤린이란 말에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살피던 레니가 곧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직?"

"아직, 이라니? 곧 약혼한대? 누구랑?"

오히려 레니는 내게서 그 말을 처음 듣는다는 둥 눈을 커다랗게 떴다. 원체 연기를 잘 못하는 레니인지라 저 모습이 거짓은 아닐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직 인가 보다. 아직 공식적으로 진행상황이 이뤄지기 전인 모양이지.

"유나?"

"미안한대, 이 말은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아줘. 제발. 응?"

"……방금 말한 배롤린 영애 이야기 말야?"

"응."

레니의 조심스런 말에 내가 확고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나를 뻔히 쳐다보던 레니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레니기에 저렇게 확답했을 땐 정말 죽어도 입을 열지 않을 아이란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한결 안심이 되었다.

다시 잔을 들어 소소꽃차를 홀짝이며 우울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암만 봐도 신기해. 어떻게 그렇게 맛없는 차를 맛있게 마실 수 있는 거야? 넌 정말 그 차가 맛있다는 듯 마셔."

"……글쎄."

씁쓸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맛없는 차라……. 레니가 맛없는 차라 여기는 이 차가 내 입에는 상당히 잘 맞는다는 걸 이미 그녀에게 수백 번 정도는 말했던 것 같다.

"난 어렸을 때부터 마셨던 거니까. 그리고 실제로 맛있어서 마시는 거기도 하고."

그런 내 대답에 레니가 암만 그래도 그렇지 정말 신기하다고 중얼거리며 주스를 홀짝였다. 레니가 즐겨 마시는 저 망고주스는 무척이나 달달하다. 나는 오히려 저렇게 달짝지근한 것을 좋아라 마시는 레니의 입맛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런데……배롤린 영애 말야. 누구랑, 약혼한다는 거야?"

궁금하기도 하겠지. 나도 그 얘길 듣자마자 그에게 묻지 않았던가. 대체 누구와 약혼하느냐고. 그러니 레니의 호기심에 타박을 줄 수만은 없다. 빌어먹을 두 돼지새끼들. 절로 가라앉는 기분을 애써 상기시려 노력해보았지만 그게 뜻대로 쉬운 일은 아닌가보다. 여전히 난 힘이 없었고 기운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결국 기운 차리는 건 포기하고 한숨 섞인 목소리 그대로 입을 열었다. 내 목소린 내가 듣기에도 꽤 우울한 것이었다.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

"다시카 몬텔로스 공자라면 나이가 스물 두……. 뭐? 누구?"

경악, 경악, 경악. 지금 레니의 눈빛에 떠오른 저 감정은 경악이다. 그 뚜렷한 감정 선에 나는 다시 씁쓸해졌다. 레니가 정상적이고 평범한 약혼을 앞둔 상태이니만큼 더 경악스러운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러한 반응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맞아. 몬텔로스 공자가 아니라 백작이야."

"백작이라면……지금 나이가……."

"배롤린 남작보다 열 살 더 많더라구. 정확히 58세지."

"……맙소사."

"……."

정말 맙소사다. 빌어먹을, 썩을. 온갖 욕이 다 튀어나온다. 레니는 두 팔을 교차시켜 자신의 팔뚝을 꼭 쥐고 있었다. 그 모습이 원치도 않는 일을 당할 소녀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아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니 배롤린. 난 그녀를 동정한다. 무척이나 동정한다. 하지만 그녀 앞에서 그런 내 감정을 들어내 보이진 않는다. 드러내 보일 수 없다. 왜냐하면 라니를 동정하는 것보다 라니를 사, 랑하는 마음이, 그래 라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 누구보다 라니를 더 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감정이겠지만 라니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다. 내 안에 크게 자리 잡은 사람이란 말이다. 비록 그것이 그녀가 원하든 원치 않던 간에.

"그래서 물은 거구나? 배롤린 영애의 약혼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느냐고."

"응? 아, 응."

레니의 얼굴은 꼭 뺨 한 대 얻어맞은 사람마냥 구겨져 있었다.

"정말 끔찍해."

앙칼진 목소리엔 경멸과 끔찍함 소름끼침 등등 온갖 불쾌한 감정이 섞여있었다.

"상상만 해도…… 그렇지?"

내 말에 레니가 고개를 끄덕끄덕 거린다. 누가 끔찍하지 않겠는가.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 그런 남자와 관계를 맺는다?

하, 상상만 해도 속이 울렁거린다. 만약 성인식을 치루고 막 16살이 되었던 그날, 그날 내가 팔려갔던 그 장소에서 만났던 사람이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이었다면, 나는 차라리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결을 택했을 것이다. 현실에 어느 정도 순응하고 난 뒤 훗날을 도모하는 것도 그 정도가 있는 법이다. 몬텔로스 백작은 현실에 순응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가만히 그날의 일을 떠올려보자 그날 알브레히트 공작이 날 거부했을 경우, 두 번째 팔리기로 내정되어 있던 놈이 바로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이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더러운 짐승 새끼. 이제 보니 처녀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양심도 없지. 자기 나이에 어린 계집을 밝혀? 나의 라니가 그런 남자와 결혼이라고?

"죽여 버리고 싶어."

"……하아. 네 심정 이해해. 오늘따라 네가 자꾸 딴 생각에 빠지는 것도 이해하고, 내 이야기에 집중 못하는 것도 이젠 다 이해해."

"……."

"아까부터 정신 나간 사람마냥 굴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런 끔찍한 일이 있었구나. 넌 그래도 라니 배롤린은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왔었으니까."

이해한다는 듯 말하는 레니의 모습에 나는 고맙다는 뜻을 내비치며 애써 웃어보였다. 레니에게 미안한 감도 없지 않았다. 오늘 레니의 말에 조금도 집중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일반적인 수다라면 상관없었지만 레니의 약혼과 관련된 이야기였기에 더욱 미안했다.

하지만 요즘 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남자에게서 라니의 약혼 소식을 듣고부터 나는 사실상 패닉상태에 빠져있었다.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예전, 내가 라니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나도 그녀를 도울 수 있을까?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았지만 사실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도 난 하찮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정말 내가 해도 괜찮은 거야?"

"뭐가?"

"화동 말이야."

"이제 와서 빼겠다고?"

"그게 아니라."

절대 도망치지 못한다는 시선으로 날 노려보는 레니에게 간단한 코웃음을 쳐주었다. 하나도 안 무섭다.

"내 말은 롱아르 백작부부께서, 그러니까 네 부모님께서 싫어하시지 않으시냐고. 내가 화동으로 나서는 거."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