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9 회: #4 -- >
배롤린 남작 가(家)에 들어와 산지 1년 쯤 되는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까 내 나이 11살 때, 나는 론에게 성추행 비슷한 것을 당한 적이 있었다.
누누이 언급하지만 론은 배롤린 남작과 완전 판박이다.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론의 눈빛은 굉장히 역겨운 사람의 것이었고, 그가 하는 짓 하나하나는 시정잡배들이나 할 법한 비열한 것들이었다. 성추행을 당했을 그 당시, 그곳엔 배롤린 남작도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아들의 그런 더러운 행동에도 그저 쯧, 혀를 한 번 찼을 뿐 나를 도와주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뒤, 론은 또다시 날 성추행 하려 했고 나는 온 힘을 다해 도망쳤다. 그 뒤로도 론의 더러운 시도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나마 다행이랄 수 있는 점은 그것은 모두 다 추행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내 나이 15살 때, 한 밤 중 내 방에 몰라 들어와 잠자던 나를 덮치려 했던 론의 행동은 더 이상 추행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성폭행을 시도한 것이었다.
"더러운 자식!"
늘 품고 있던 칼을 꺼내 사정없이 팔을 그었다. 그로인해 벌어진 상처 사이로 피가 벌겋게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아프다고 인식할 새도 없었다. 나는 그저 온 힘을 다해 소릴 질러댔다.
"꺄악~~."
사방으로 피를 뿌려대며 마구마구 소리를 내쳐 지른 덕에 남작 가(家)의 사람들이 모두 잠에서 깨어나 내 방으로 모여들었다. 그 밤, 마치 미친년 보듯 그렇게 나를 노려보며 론은 침을 바닥에 퉤 내뱉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후로 며칠 뒤, 나는 그에게 또 한 번의 성폭행 당할 뻔했다. 아슬아슬했었지. 며칠 전에 실패했던 경험도 경험이라고 내 미친 행동을 기억해 놓았던 론은 미리 내 입을 막고 두 손을 묶으려 했던 것이다. 소리 지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배롤린에서 맘 놓고 편히 잤던 적이 없었다. 늘 예민한 상태로 잠을 자던 나였기에 나는 론이 내 입을 막으려 했을 때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천은 내 입속에 박혀 묶이던 중이었고 온 몸으로 발악해대던 몸은 배에 꽂힌 론의 주먹으로 힘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두 손마저 묶여버리고 말았다.
다리로만이라도 저항해보려 했지만 얻어맞은 배가 너무 아파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게다가 힘이 센 론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무릎으로 내 허벅지를 아프게 찍어대며 더럽기 짝이 없는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던, 음욕으로 가득 넘실거리던 론의 눈동자를 보았을 때의 그 끔찍함이란!
이대로 죽어도, 그에게 당할 수는 없다. 당하기 싫다!
론은 사람이 아니었다. 짐승이었다. 그에게 당한다는 건 죽음보다 더욱 끔직하다는 강한 의지가 내 온 몸을 지배했다. 혀라도 깨물 수 있었다면 나는 당장 그리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입을 막기 위해 묶은 천은 혀를 깨물 수도 없게 만들었다.
한 순간, 단 한순간이라도 좋으니까 기회가 오길 간절히 기도했다. 내 옷자락을 끌어내리며 침을 뚝뚝 흘려대는 론을 벗어나 저 창문으로 몸을 던질 수 있는 그 한순간의 기회만을 바라고 또 바랬다.
하지만 내가 몸을 날리려는 시도를 하기 전, 날 구한 사람은 뜻하지 않게도 라니였다.
라니, 라니…….
"그만해, 그만 좀 해! 제발 짐승 같은 짓 좀 그만 하라고! 제발제발제발제발 좀 그만해에에!"
"미친년! 나가! 저리 안 꺼져? 한 대 맞기 전에 얼른 나가!"
론이 무시무시한 소리로 라니에게 고함을 쳐댔다. 하지만 그런 그 고함에 뒤지지 않을 만큼 더 큰 목소리로 라니가 론의 고함을 맞받아쳐냈다. 그건 목에 피가 맺히고 가슴이 한이 맺힌 그런 목소리였다.
"왜 이렇게 더럽게 살아? 응? 왜 그렇게 더럽게 사냐고! 왜? 왜? 왜? 왜 사람 얼굴도 들지 못하게 만들만큼 추잡한 짓만 골라서 하는데? 응? 왜 그렇게 내가 죽어버리고 싶게 만들어? 왜 그렇게 배롤린이란 이름을 내가 가졌다는 걸 끔찍하고 혐오하게 만드는 건데? 왜 그렇게 내가 너와 같은 피를 나눴다는 사실에 좌절하게 해? 왜 그렇게 너를, 이곳을 숨 쉬기 조차 끔찍한 곳으로 만들어? 응? 대답해봐. 왜 이렇게도 사람 미치게 만들어어? 왜? 왜에?!"
미친 발악과도 같았던 라니의 외침은 배롤린 남작 가(家)를 쩌렁쩌렁하게 울렸고 결국 그 소리에 사람들은 또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웅성웅성.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내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론은 주저앉아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며 울고 있는 자신의 반쪽 여동생을 내려다보며 욕지거릴 내뱉고 내 방에서 사라졌다.
"왜, 왜 사람 살기 싫게 만들어, 왜……?"
"……."
방안에는 우리 둘만이 남겨져 있었다. 라니는 작게 뭔가를 계속 중얼거렸고, 나는……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런 라니를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나는 두 손이 묶인 채 누워있었고 라니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
"……."
그러다 라니가 먼저 일어섰다. 얼굴이 흥건히 젖은 상태 그대로, 미처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내가 다가온 라니는 아무 말 없이 내 입에 묶인 천을 풀어주었고 내 손을 풀어주었다.
"괜찮아?"
"……."
나는 아무 짓도 당하지 않았다. 당할 뻔 했던 것뿐이다. 라니와 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더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마주보다 라니는 조용히 내 방에서 나갔다. 찰칵하고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려왔다.
나는 한참을 그대로 앉아있었다. 머리가 무척이나 아팠고 어지러워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론에게 얻어맞은 배가, 너무너무 아팠다. 숨 쉬는 것조차 힘겨울 만큼. 숨을 쉴 때마다 따끔거릴 만큼.
하지만 계속 이대로 앉아 있을 수는 없어 천천히 온 힘을 다해 일어섰다. 그리고 현기증에 온몸의 통증에 쓰러지지 않기 위해 벽을 더듬더듬 집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욕실에 들어섰다. 샤워기 밑으로 기어가 물을 틀고 그 물줄기 아래 주저앉았다. 옷도 채 벗지 않고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라니 덕분에 론에게 끔찍한 짓은 당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충격이 사라지는 아니다.
론의 손이 닿았던 모든 곳이 말도 못할 만큼 역겨웠다.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일어나 거울 속의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생기라곤 하나도 없는 멍한 표정의 나를, 울지도 못하고 가슴 아프다 말도 못하는 불쌍한 내 얼굴을 한 참을 들여 보다 겨우 한 마디 툭 내뱉었다. 갈라지고 메마른 목소리였다.
"참……엉망이네."
정말이었다. 누가 봐도 엉망인 얼굴이 거울 속에 있었다. 론에게 반항하다 얻어맞은 모양인지 광대뼈에 보라색의 멍이 들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손목도 굉장히 시큰 거린다. 힐끔 고개를 숙여 양 손목을 확인해보자 아니나 다를까, 우악스럽게 잡혀 묶인 탓인지 손자국과 묶인 천 자국이 선명한 피멍이 들어있었다.
슬그머니 상의를 들어 올려보자 론에게 얻어맞은 배에도 역시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참, 엉망이네."
하지만 자칫했으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나는 샤워 솔을 집어 바디 워시를 잔뜩, 과도하게 많이 덜어 엄청난 거품을 낸 다음 온 힘을 다해 내 몸 구석구석을 닦아냈다. 특히 론의 손이 닿았던 곳은 피부가 벗겨질 만큼 세게, 오래 닦아냈다.
너무 심하게 문질러댔던 걸까? 하얀 피부에 설핏 핏물이 맺히기까지 한다. 그래도 내 몸을 닦아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리 닦고 물로 헹궈 거의 기절하고 싶은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 때서야 나는 욕실에서 나왔다.
목이 심하게 말랐다. 물 한잔이 절실했다. 하지만 주방까지 가기는 너무 힘에 부쳤다. 그런데,
"……."
테이블 위에 찻주전자와 잔이 놓여있었다. 원랜 없던 것이었다. 그런데 없던 것이 이 밤중에 새로이 놓여 있었다. 가만히 소파에 가 앉았다. 그리고 주전자를 만져보았다.
"……."
울컥, 순식간에 솟구치는 서글프고 외로운 감정을 억누르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주전자를 들어 잔에 따랐다. 쪼르르 맑은 소리가 흐른다. 향긋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풍겨져 나왔다. 이 향기는, 이 향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차의 향기였다. 꽃 잎 몇 개가 주전자의 고리를 타고 잔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분명 뜨거웠으리라. 처음 이 주전자는 무척 뜨거웠을 거다. 내가 좋아할 만큼.
대부분의 귀족들은 마시기 적절한 온도의 차를 마신다. 후후 입으로 바람을 불며 차를 마시는 것을 볼품없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입이 델 정도로 뜨거운 차를 좋아한다. 그네들이 볼품없다 여기는 건 나에겐 중요하지 않다. 나는 뜨거운 차를 좋아한다.
"꽃잎이 이렇게 떨어져 나올 정도면 많이 뜨거웠었나 보네."
여기에 가져다 놓고 시간이 꽤나 흘러버렸는지 뜨거웠을 것이 분명한 주전자는 어느새 미적지근해져 있었다. 아무래도 욕탕에서 너무 늦게 나온 모양이다.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쓰지만 향긋하고 어쩐지 아프기까지 한 그 맛에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이미 식을 대로 식어버려 미지근해져버렸지만 나는 처음으로 이런 미지근한 차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라니가, 라니가 타 주고 간 차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