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7 회: #4 -- >
"배롤린 영애의 이름이 그런 이름이었던가?"
"……배롤린 가(家)의 진짜 영애는 단 한명이지요."
내 말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배롤린 가(家) 영애의 이름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래, 그에게 그 이름은 상관없을 거다. 굳이 기억할 필요도 없는 이름이겠지. 하지만 내게는 다르다. 내게 그 이름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름 따위가 아니었다. 배롤린 가(家)에서 내가 유일하게 혐오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이름의 주인공뿐이었으니까. 심장이 불길함을 예측하듯 빠르게 뛰어댔다.
"라니가 약혼할 거 같다고요? 언제요? 아니, 누구와요? 네? 누구와 약혼한대요?"
언제 약혼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구랑 하는 건지가 중요하다.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이었던 것 같은데?"
"다시카 몬……백작? 그 백작!"
배롤린 이 빌어먹을 새끼!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나야 애초부터 비싸게 팔아먹으려 데려온 상품이야 그렇다 쳐도 자기 친딸까지 팔아먹으려 들어?
"하! 말도 안 돼!"
속에서 천불이 들끓어 오른다. 부글부글 솟구치는 열과 쏟아지려는 욕지거리에 가만히 누워있을 수가 없어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공중에 나풀거리던 머리카락이 곧 흘러내린다. 그 부드러움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등이니 가슴이 무척이나 간지럽다. 나는 짜증이 가득 묻어난 손길로 머리를 돌돌 말아 아무렇게나 묶어버렸다.
"하여튼 성깔은."
내가 일어나 앉자 덩달아 일어나 가만히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대고 있던 그가 손을 뻗어 대충 올려 묶은 머리채를 확 풀어헤쳤다.
"왜 그래요?"
"이리 와."
신경질이 가득 섞인 내 반항어린 목소리에 그는 겉으로는 무뚝뚝한 혹은 굉장히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목소리만은 한없이 나른했다. 허나 목소리가 나른하다 해서 그의 눈빛까지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의 속에 이는 어두운 기운을 감지하고 나는 더 불평을 쏟아내려던 입을 닫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가 그가 요구하는 대로 그의 품에 안겼다.
단단한 팔이 내 등을 두르고 내 몸을 더 가까이 끌어당긴다. 딱 달라붙은 이 자세는 상당히 불편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이 포즈로는 이것보다 더 편한 자세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카 몬텔로스 백작이면 이미 60을 바라보는 사람 아닌가요?"
"몬텔로스 공자가 아닌 백작이면 그 나이 때가 대충 맞겠지."
"맞을 거예요. 제가 그 백작한테 팔려갈 뻔해서 알거든요."
"……."
"하아. 대체 배롤린 남작은 몬텔로스 백작에게 뭘 받기로 한 걸까요? 아니, 이미 받은 건가?"
세상의 모든 욕을 다 끌어 모아 쏟아 부어도 부족한 심정이다. 대체 인생을 왜 그 따위로 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쩌다 그런 인간으로 자란건지 역시 이해할 수 없고. 하지만 배롤린의 후계자인 론 배롤린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따위 인간이 길렀으니 그 따위 후계자가 성장하여 제 아비와 똑같은 인간이 되는 거겠지. 론은 배롤린 남작과 똑같은 부류의 인간이다. 의심할 여지없는 쓰레기. 앞으로 배롤린 가(家)로 들어올 여자가 누가될지. 분명 좋아서 들어오진 않을 텐데. 그 여자의 인생이 불쌍해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라니의 어머니 전 배롤린 남작부인 역시 사람들의 동정을 한 몸에 받았다고 들었다. 배롤린 남작부인 역시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었다고, 거의 팔려가는 신세와 다름없었다고. 하긴 누가 원해서 그런 쓰레기와의 결혼을 원했을까. 게다가 후에 안 사실이지만 론과 라니는 배다른 남매다. 즉, 배롤린 남작부인이 배롤린 남작과 결혼하기 전 다른 여자와 사고 쳐 낳은 아들이 론이라고. 아, 사고라는 단어는 상대방 여자에게 해당되는 내용이고 배롤린 남작에게 겁탈은 늘 있는 일이었겠지만.
"정말 말도 안 돼……."
세상에. 배불뚝이에 개기름 뚝뚝, 게다가 나이는 자기 아버지뻘인 남자와 결혼을 한다? 세상 그 누구도 라니가 원한 결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 몬텔로스 백작은 이미 두 번이나 결혼을 했던 사람. 그 두 명의 아내들이 모두 원인 모를 근거로 죽었는데 그 원인이 몬텔로스 백작의 변태적인 성관계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곤 했었다.
하물며 라니는 첫 결혼이다. 게다가, 분명……처녀일 것이 확실하다.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인 배롤린 남작과 오빠인 론 배롤린 공자를 무척이나 경멸하고 있다는 말은 소문이 아닌 사실이고, 그 이유가 그들의 문란한 정신과 행동 때문이라는 것 역시 사실이니까. 그런 그들의 행동에 혐오감을 느끼는 그녀가 쉽게 자신의 몸을 타인에게 허락하리라고는 절대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배롤린이라는 이름 때문에 자신에게 붙여질 사람들의 편견에 힘겹게 싸우는 사람이 그녀니까. 남들보다 배는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말 한마디라도 조심스럽게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물론 이렇다 할 대화가 라니와 내 사이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라니를 동정했지만 감히 그것을 표현하지는 않았고, 라니는 나를 동정했지만 라니가 날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동정했지 미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서로에게 애정을 품고 있었지만 표현하지 못했고, 서로의 존재를 애서 무시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친근한 관계를 맺지도 않았다. 그렇게 라니와 나는 설명하기 굉장히 힘든 그런 사이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 약혼이 성사될까요?"
"그렇겠지. 이미 배롤린 남작이 몬텔로스 백작에게 거금을 받았으니."
그의 말은 확답에 가까운 것이었다. 단순한 추측 따위의 것이 아닌. 나는 가슴에 기댔던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내 눈 바로 앞에, 그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빛나고 있다.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그 빛은 마치 진짜 보석 같았다.
"이미 받았다고요?"
"그렇지 않고는 배롤린 따위가 그 많던 빚을 한꺼번에 청산할 수 있을 리가 없었을 거라 생각되는데?"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롤린 가(家)에 빚이 많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배롤린 남작은 주제에 맞지 않는 사치를 부려댔고 그것은 론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당연히 배롤린 가(家)의 빚은 늘어날 수밖에. 아마 그 빚 때문에 나를 하루라도 더 빨리 팔아버리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왜?"
내가 그를 가만히 쳐다보자 그가 묻는다. 나는 잠시, 지금 내 입에서 나올 말이 그에게 얼마만큼의 화를 불러일으킬지 생각해보다 조심히 입을 열었다.
"배롤린 남작한테 얼마를 주셨어요?"
"……."
"흠흠, 왜, 왜 그렇게 보세요?"
"……가끔은 네가 제 정신인지 의심이 될 때가 있어."
"……."
그가 웃었다. 화려하게, 아주 화려하게. 눈빛에 이는 격렬한 분노를 그대로 내게 쏘아 보내면서. 화를 낼 줄은 알았다. 그의 입장에선 내 질문이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는가? 그만큼 내 말은 건방졌고 또 주제넘은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물어야 했다. 그래야 했다.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내게 물었는지는 알겠다만 그래도 용케 그 말을 잘도 입 밖으로 꺼내는 구나."
낮게 가라앉은 그 말 속에 담긴 분노에 말문이 턱 막혀온다. 침을 조금씩 목구멍으로 보내면서 진정하려 애써보았다. 그가 화가 났다는 건 알겠다. 이해도 한다. 그래도 나는 답을 들어야겠다. 정말로 그래야 했다. 여전히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런 내 눈빛에 그가 으르렁거리듯 말을 씹어 내뱉어냈다.
"내가 왜 그 작자에게 뭔가를 줘야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배롤린은 그의 어깨 위에 그 목이 온전히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감사해야 한다."
"……."
"얼마를 주었느냐고? 기가 막히는군. 내가 그에게 준 것은 돈 따위가 아닌 생명 연장뿐이야."
"……."
결국 날 바치고 배롤린 남작은 목숨만 잃을 뻔했다는 소리군.
그 말은 즉, 배롤린 남작이 이 남자를 건진 것이 아니다?
나는 새삼 알게 된 사실에 그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하긴,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한 점은 많았다.
먼저 눈앞의 이 남자는 배롤린 남작 따위가 어떻게 해볼 만한 상대가 결코 아닌 것부터 이상한 점이다. 신분의 격이 달랐고 지위가 달랐으며 위상이 다르다. 그건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랬다. 배롤린 남작은 이 남자에게 뭔가 거래를 틀 만한 위인이 되지도 못할 뿐 아니라 말 한마디조차도 걸지 못하는 상대라는 걸, 왜 그 때는 제대로 생각해 내지 못했던 걸까? 그날, 난 그저 의아해 했을 뿐이다.
"제가, 제가 대체, 그러니까 대체 어떻게 당신을 만나게 된 거죠? 당신은 왜 배롤린 따위를 따라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