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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56화 (56/206)

< -- 56 회: #4 -- >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올 만큼 강렬한 자극은 관계가 끝난 뒤로도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가만히 누워만 있는데도 밑 부분에 아릿함이 느껴질 만큼, 혹은 앙증맞은 가슴 꼭지의 분홍색이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만큼.

"그 남자, 당신. 또 나를 뭐라 부르지?"

"……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 모습을 한쪽 팔로 머릴 괴며 내려다보고 있던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난 막 잠에 빠져들려고 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꿈결의 문턱에서 다시 현실로 넘어온 나는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뭐라고 했지?

나는 잠시 후 그 말을 이해했다.

"공작님이라고도 부르지요."

"흐음."

"아아, 그럼 뭐라고 불러요?"

늘 그렇게 불러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그가 딱히 제재를 가했던 적도 없었고. 이제와 뭐가 잘못됐단 말인가?

하지만 무언가 잘못되었나 보다. 혹은 그의 맘에 들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진 것을 보니. 비틀린 입술 사이로 들리지도 않는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덕분에 남아있던 잠기운이 확! 달아나 버렸다.

"넌 네가 대체 내 뭐라 생각하고 있는 거지?"

"저, 크흠. 정부요."

"그 말도 틀리진 않지."

"다른 것도 있었나요?"

"아니."

그럴 줄 알았다. 그러면서 왜 자꾸 내 입으로 내가 정부임을 확인 시켜줘야 하는 상황을 만드는 건지. 내 생각으로는 아무리 그게 사실이여도 별로 듣기 좋은 어감이 아닌 단어라면 되도록이면 사용하지 않은 편을 택하겠다. 그 표현 외에 다른 표현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하는 그런 일이라면 더더욱.

계속해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점점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평소대로 몸을 돌려 그를 등지고 누웠다. 아니 누우려했다. 그런 내 행동을 짜증난다는 듯 방해하는 손길이 없었다면 난 계획대로 그리 했을 거다.

"……왜요?"

그가 내 어깨를 잡아 바로 눕히더니 침대에 꾹 눌러 놓는다.

"등 돌리지마."

그러더니 아예 내 몸 위로 자기 몸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숨 막혀요!"

거짓말 안하고 나보다 적어도 20kg은 훨씬 더 나갈 몸으로 이렇게 내 몸을 눌러버리면 숨이 안 막힐 수가 없다. 나는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보았지만 말짱 헛수고였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곤란하다. 이런 자세는 아주 곤란하다. 관계를 나눌 때라야 워낙 정신이 없어 이보다 더 가깝게 맞닿는다 해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관없다지만. 하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이렇게 살이 아주 가깝게 맞닿는 건 상당히 곤란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깝게 있기 때문에, 그의 눈빛이 너무 가까워 피할 수가 없기 때문에. 무엇보다 어색해 죽어버릴 것만 같다.

"뮤."

"네?"

"뮤라고 불러."

"……."

제 정신인가?

커다래진 눈에 불신의 빛을 담고 그를 쏘아보았다.

나는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않는 사람이다. 배롤린 남작 가(家)에서 살기 시작한 뒤 내게 베풀어지는 호의 뒤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었고 혹은 대가가 있었다. 대가……. 어쩌면 평생을 내게 따라다닐 단어인지도 모르겠다. 참으로 슬프지 않은가. 사람이 사람에게 받을 수 있는 호의에 무조건 적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이. 하지만 난 그렇게 살아야 했고 그랬기 때문에 사람의 친절에 누구보다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호의를 넘어선 특별한 관계를 의미하는 이름을 허락해주겠다고? 그 것도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 현 공작 이름을? 말도 안 돼.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일이 닥쳐왔을 땐 웃겨도 웃음조차 나지 않는 법이다.

"전 살고 싶은데요."

"살아."

"네. 그러니까 그 이름으로 당신을 부르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당신이라."

이번엔 정말로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다. 이 남자의 입술에 그려졌던 미소가 한층 짙어진 것을 보아하니. 그런 그의 모습은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오싹하기도 하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지만 그 눈부심에 고개를 돌려버리고 만큼.

"귀족이면서 이름을 허락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하시지는 않으시겠죠?"

"설마. 내가 그 정도도 모를까?"

"모르시는 것처럼 구시니까요. 왜 저한테 그 귀한 이름을 허락하세요?"

나는 단 한 번도 이 남자를 이름으로만 부르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또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듣지도 못했다. 그런데 내가 그를 이름으로만 부른다? 아마 이 남자가 나를 정부로 인정했을 때보다 더 큰 파장이 일어날 것이다. 이 루벤스 제국 내에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진실로 단 한명도 없을지도 모르지. 나는 심지어 이 나라의 황제폐하도 나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다 들었다. 정말 대단한 남자다, 당신은. 당신 덕분에 나는 감히 내가 생각해 본 적도 없을 만큼 유명해졌다.

"당신보다는 낫지 않겠어?"

"차라리 공작님이라 부를게요."

당신이라 부르든 공작님이랑 부르든 그건 상관없지만 이름으론 절대 못 부르겠다. 만약 이 남자를 정말 이름으로 부른다면……. 상상만으로도 절망이야. 사교계는 엄청난 로맨스 소설로 시끌시끌 거릴 테지. 어쩌면 그와의 결혼이 임박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웃기지도 않는 소문이 돌지도 모르겠다. 그와 헤어지고 조용히 살 계획을 꾸리고 있는 내 입장에서 지금 이 이상으로 유명해지는 것은 절대 사양이라고.

"날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드문데 말이지."

"……저도 무서워하는 걸요."

내 말에 그가 웃기는 소릴 들었다는 양 웃었지만 그의 눈빛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 그 때와 똑같은 눈이네.

이 남자는 처음 봤을 때도 이랬다. 기가 막힌다는 듯 웃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말도 못하게 살벌했지. 그와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혼자였다. 그 때는 그와의 연결은 그것으로 끝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놀랐던 것일까? 그 후 삼일 뒤 배롤린 남작 가(家)로 나를 데리러 온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의 문양이 박힌 제복을 입고 있던 그의 수하를 보았을 땐.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아름다운 그를 보았을 때.

생각은커녕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기에 나는 놀랐고 또 놀랐던 것 같다. 그런 내 멍한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는 지금처럼 이렇게 웃고 있었다. 배롤린 남작을 쳐다보며, 그리고 때마침 나를 희롱하고 있던 론을 쳐다보며.

그리고 그 날 나는 배롤린 남작 가(家)에서 탈출했고, 그날부로 이 곳 별장은 내 새로운 터전이 되었다.

"그대가 날 무서워한다? 레몬이 달콤하다는 말을 들은 기분이군."

"안 믿기세요?"

"그대가 믿으라면 믿지."

앓느니 죽지 싶다. 나는 허리춤에서 슬금슬금 올라오는 그의 손을 냉정하게 쳐냈다. 끝난 지가 언제라고 벌써 다시 시작하려는지 모르겠다. 아직 힘들어 죽겠는데. 웬만하면 그에게 맞춰주고 싶지만 그 것이 내 생명과 직결되는 사항이라면 좀 생각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그의 손을 내치자 그의 목소리가 심히 퉁명스러워진다.

"잘도 무서워하시는군."

그는 그렇게 툴툴대면서도 다시금 내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았지만 그저 올려놓기만 할 뿐 더 이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날 괴롭힐 심산이 아니라면 상관없었기에 나는 그의 손은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아직 공식적으로 발표되진 않았지만 곧 배롤린 영애의 약혼 발표가 있을 것 같던데."

그가 등지고 누워있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고개만을 돌려 창가로 시선을 주고 있던 내 귀에 나른한 그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시간이 조금 흐른 뒤였다.

사람은 죽어서 신의 곁으로 간다. 하지만 사람이 살다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죽음을 맞이했을 땐, 신은 잠시 동안의 유예기간을 그에게 준다고 한다. 그 사람이 살았을 적 이 세상 속에 남긴 사랑을 보호하고 지켜볼 수 있도록. 이 세상의 별이 되어 여전히 사랑할 수 있도록 해 준다고.

언젠가, 나 어릴 적 아빠는 동화책을 읽어주며 그리 말해주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하늘의 별 속엔 엄마 아빠가 있다.

<그러니까 먼 훗날, 엄마 아빠가 신의 곁으로 간다고 해도 우리 유나는 절대 혼자가 아니란다. 알았지? 이 사실을 꼭 기억하렴.>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니라고 우리가 늘 곁에 있을 거라고, '텔'의 꽃밭에 누워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사랑한다 말하고 또 말했다.

그 땐 우리 가족 중 단 한 사람도, 이렇게 일찍 나 혼자 이 세상에 남겨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우연히 떠올라 시작된 동화 속 이야기를 본떠 내게 해주었던 그 사랑의 말이 마치 운명인 냥 유언처럼 되어 버릴 거라는 것 역시. 쏟아지는 별빛을 눈으로 담으며 나는 그 날의 엄마 아빠의 웃음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때였다. 그 웃음을 떠올려 행복해 지려던 그 때, 그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소중한 회상을 방해하는 것과도 같았던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확 밀려들었지만 그 내용은 짜증을 부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진심으로, 잘못들은 것이길, 기도했다.

"배……롤린 영애? 혹 라니 배롤린을 말하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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