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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54화 (54/206)

< -- 54 회: #4 -- >

"정말 속셈이 뭐예요?"

"속셈?"

그가 눈썹을 찌푸린다. 속셈이라는 단어가 어지간히 맘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이 속셈이라는 단어보다 이 상황에 더 어울리는 단어는 못 찾겠는 걸. 적어도 나는.

"오늘 당신이 하는 모든 일들이 수상하니까 그렇죠."

"당신이라……."

"제가 예민한게 아니라고요. 오늘 당신이 한 행동 하나하나를 따져 봐요. 누구라도 경계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당신이라……."

정말로, 정말로 수상하다. 찝찝함이 맘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만큼. 그런데도 저 남자는 자꾸 엉뚱한 것을 들먹이고 있다. 지금 내 말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단어는 당신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속셈이라든가 수상하다든가 그런 것들이다.

대체 저 남자의 머릿속엔 뭐가 있는 걸까? 무슨 꿍꿍이지?

도무지 알 수 없다니까.

<무려 공작이라는 신분을 가진 남자가 정부에게 따로 별장까지 내리고 그렇게 많은 보석을 준다고? 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절대 그냥일 리 없어! 아니, 별장은 그렇다고 쳐. 여기저기에 가지고 있는 별장이 워낙에 많은 분이니 그 중 하나를 아무 생각 없이 너한테 줬다고 해. 하지만 지금까지 네가 받은 보석들은? 그건 어떻게 설명한 건데? 그 보석들의 질이 애들 장난이니? 까놓고 말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보석들보다 네 보석들이 훨씬 더 많다고! 게다가 내 거보다 훨씬 비싼 것들이고! 세상 어떤 남자가 한낱 정부일 뿐인 여자에게 그렇게까지 하겠니? 응?>

<너 눈 뜬 채로 꿈꾸냐?>

단순한 레니는 눈을 반짝이며 꿈같은 소릴 지껄여댔지만 나는 지극히 현실주의자다. 배롤린 남작이 나를 이 남자에게 팔아준 것을 나름 고맙게까지 생각하고 있을 만큼 제법 냉정한 아이란 말이다.

사람들은 알브레히트 공작이 이렇게 오랫동안 한 여자를 정부로 두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그런데 나 역시도 길어지고 있는 시간에 놀라고 있다 말하면 믿어줄려나? 하지만 그것이 로망을 꿈꾸는 어린소녀들이 상상하는 그런 쪽이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제 머리가 그리 좋지 않아서 대체 공작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이러시는 건지 정말 모르겠어요. 하시는 일이 뭔지는 물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제게 피해는 없게 해주세요."

"기가 막히는군. 왜 자꾸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데?"

"그렇게 웃고 계시는 거요."

"내가 웃고 있는 게 뭐?"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무표정일 때가 많다지만 내 앞에선 유독 잘 웃는 이 남자가 사실 저렇게 날 바라보며 웃을 땐 뭔가 꿍꿍이가 있다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란 걸 난 알고 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마라. 나도 모르니까. 여자의 직감인건지 아님 우연히 어느 순간 둔했던 직감이 폭발해서 알아챈 건지 나조차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난 차라리 무표정일 때의 그가 더 마음이 편하다. 저렇게 웃고 있는 저 남자에게선, 위험한 향기가 나기 때문에.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띠며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별장으로 가고 있었다. 레니와 페터 리제도 공자와는 저녁을 함께 하고 바로 헤어졌다. 중간 중간 루이 토킨 공자가 그에게 와서 뭔가를 전하곤 했지만 그가 하는 일에 딱히 신경 쓰지 않기에 난 레니와 수다를 떨며 열심히 배를 채웠더랬다.

"조심해서 가세요."

별장에 도착했다.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마차에 내려섰다.

그래도 그는 내게 제법 예의를 챙겨주곤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마차에 같이 타고 있을 때 먼저 내려서 내가 내리는 것을 도와준다거나 하는 것 등등이다. 하지만 그런 귀족적인 예의, 어차피 그를 벗어나면 받을 일도 없고 또 지금도 그런 예의 받지 않아도 전혀 모욕적이거나 기분 나쁘지 않다. 물론 그런 예의를 챙겨준다면 나야 그저 고마울 뿐이지.

내려서 대충 치맛자락을 정리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가 올라서 문이 닫히길 기다리고 있는 그는 내게 아직 할 말이 남았던지 올라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았다.

"하아. 정말이지 어이없군. 질릴 지경이야."

조금은 신경질적인 하지만 정말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와 함께 그가 마차에서 비켜섰다. 쾅! 그러더니 다소 과격한 손짓으로 마차 문을 닫아버린다. 얼마나 세게 닫힌 건지 마차가 조금 흔들릴 지경이었다.

"자고 간다."

"……그러시던가요."

자기 별장에서 자기가 자고 간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는가. 알았다고 바로 답하는 내 말에도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입 꼬리가 위험스럽게 치켜 올라갔다. 턱! 그와 동시에 내 몸이 그에게 바짝 끌려갔다. 그의 손이 내 허릴 부여잡고 자기의 몸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긴 탓이다.

"그거 아나?"

"……뭘요?"

"너무 그렇게 선을 그으려 들면 화가 난다는 거."

"……."

선을 안 그을 수 없는데요.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첫 번째는 잠시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말하려고 했을 땐 이미 그의 입이 내 입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열기를 품은 그의 입술이 경직된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깜짝 놀랄 겨를도 없이 난 그의 입술을 받아내야 했다.

"흡."

아, 어느새 또 묶여버렸다. 한 손은 내 허리를 다른 한 손은 내 머리를 잡고 그를 거부하지 못하도록 나를 옭아매는 버릇과도 같은 이 남자의 습관에 한숨이 인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그를 거부하지 않을 텐데. 왜 그는 매번 이렇게도 내 몸을 꽁꽁 묶어대는지 모르겠다.

밖에서 이루어진 질척이는 키스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노골적으로 입 속을 헤집는 말캉거리는 혀의 존재가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잊지 말라는 듯 끊임없이 자극해대고 있었다. 입술이 쓸린다. 계속되는 그 압박에 혀끝이 조금 아려왔다. 숨을 어떻게 쉬어야 좋을지 모르겠다.

"으음."

그렇게 강하게 시작되었던 키스는 영원히 그리될 것만 같더니 이내 부드럽게 변한다. 숨에 벅찬 내가 살기 위한 반항 아닌 반항을 보였기 때문이다. 내 입술을 핥아주던 그가 곧 내 아랫입술을 머금더니 빨았다 살짝 깨물었다는 반복해댔다. 내 머리를 잡던 그의 손이 어느새 내려와 마냥 늘어져 있던 양 팔을 이끌어 그의 목에 감도록 종용한다. 나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조금 더 강하게 그가 나를 끌어당겼다. 다시 머리칼 속으로 파고들어온 그의 손이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주었다.

덕분에 살랑이던 키스가 다시 깊어졌다. 숨결은 더욱 거칠어져 나는 어느새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한참 만에 떨어진 그의 입술이 매력적으로 반짝거렸다. 참 신기하지. 이 남자와 키스하는 것도 나고 이 남자 입술이 괴롭히는 입술도 내 건데, 같이 키스하고 떨어졌어도 항상 내 입술만 붓고 이 남자 입술은 멀쩡한 것이.

입술을 뗀 그의 눈빛엔 채 풀지 못한 욕망의 덩어리가 넘실거렸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이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게 된 내가 헐떡이는 숨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그의 얼굴에 더운 입김을 쏟아 뱉어댔다. 그런 내 모습에 그의 입술 선 위로 만족스런 미소가 걸린다.

"하아. 하아."

차라리 저런 웃음은 괜찮다. 적어도 저런 웃음은 기분 나쁠 때 짓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니까.

그가 기분 나쁠 때 짓는 웃음은 보기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마치 누군가를 유혹하듯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띄고 있는 그런 미소가, 그가 가장 위험한 때란 걸 과연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그는 내 손을 잡고 안으로 척척 걸어갔다. 시녀들의 인사에도 대답하지 않고 방으로 곧장 들어와 거칠게 문을 닫는다. 빠르게 벗겨지는 옷자락들을 나는 그냥 내버려두었다. 이 남자를 막을 힘은 애초에 내게 없으니까. 그리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어차피 거부할 생각도 없다. 그리고 내가 말했잖은가. 관계는 중간과정의 순서와 시간만 조금씩 다를 뿐 처음과 끝은 비슷한 거라고.

급하게 그가 내 안에 들어왔을 땐, 아직 덜 젖어 조금 아프긴 했어도 괜찮았다. 단지 조금만 부드럽게 해달라는 듯이 손으로 그의 등을 토닥거렸을 뿐이다. 한 번에 밀려들어온 뜨거움에 허벅지에 바짝 힘이 들어간 것도 잠시. 내 토닥거림이 효과가 있었는지 거칠게 들어온 것과는 다르게 그는 부드럽게 움직여 주었다.

예민해져 바짝 서버린 분홍색의 꼭지가 그의 손바닥으로 짓눌러져 굴려진다. 조금씩 달아오르는 여체가 어느새 흥분으로 인해 분홍빛을 머금고 늘어졌을 때, 그는 이제야 시작이라는 듯 강하게 움직이며 내 몸을 헤집기 시작했다.

한없이 단단하고 뜨거운 그의 몸이 밖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반복해 댈 때마다 가벼운 몸뚱이는 속절없이 흔들려댔다. 그 잠시의 헐렁임조차 맘에 들지 않았는지 그가 양손으로 엉덩이를 붙잡고 내 몸이 자신의 것을 온전히 받아낼 수 있도록 그의 몸이 쏟아지듯 들어올 때마다 내 몸을 그에게 바짝 붙이듯 올려댔다. 몸이 쪼개질 것과도 같은 충격과 동시에 이어진 쾌락이 정신을 울리듯 강하게 솟구쳤다. 서로 맞닿은 깊은 곳에서 울렁임과도 같은 수축과 이완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힘이 풀려버린 다리는 그의 허리에조차 두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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