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2 회: #4 -- >
"나는 당신의……."
정부일 뿐이라구요.
속으로 하고픈 말을 삼킨다. 안 그런 척 나와 그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레니와 페터 리제도 공자 때문에.
물론 이 남자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나는 신경 쓰인다. 그리고 누구보다 레니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야 기분 나빠도 무시할 수 있지만 레니는 무시할 수 없으니까. 궁금한 것이 생기면 그 즉시 별장으로 찾아와 자기가 원하는 말을 들을 때까지 나를 괴롭히고 또 괴롭혀댈 레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삼킨 건지는 그도 잘 알고 있으리라. 요 근래에 계속 이어지던 말다툼 중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그의 질문이고 내 대답이었으니까.
"고집은."
"고집이 아니래도요."
왜 나를 떼 부리는 어린아이로 전락시켜버리는지 모를 일이다. 물론 이 남자가 나보다 8살이나 많고 어른이고 또 원체 잘나고도 잘났다는 건 안다. 그런 그가 보기에 평범한 나는 마냥 어려 보일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나를 여자로 취한 건 다름 아닌 당신이야. 정말로 당신이 나를 어린 여자아이로만 봤다면 당신은 절대 나를 안아서는 안됐다. 그렇지 않나?
"알았으니까 옷이나 고르지."
"쳇."
그와 내가 계속 말다툼하는 덕분에 옷을 다 들여놓고도 뻘쭘하게 서 있던 마담이 그의 고갯짓에 가까스로 미소 지으며 하나씩 레니와 내가 고른 옷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약혼식 날 입을 레니와 내 옷을 골라야 했기에 우리는 우리가 고른 것 외에도 이번에 새로 들여온 신제품을 함께 구경하며 그 중에서 맘에 드는 옷을 3개씩 골라 입어보기로 했다.
"이 옷 어때?"
"너무 파이지 않았어?"
"그래? 하지만 색깔이 맘에 드는 걸. 내 약혼식인데 화려해도 되지 않을까? 하얀색을 입어야 하나?"
레니가 입은 옷은 치마가 주황색 오간자로 겹겹이 쌓인 드레스였다.
"결혼식은 아니니까 굳이 흰색을 입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파인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렇다 쳐도 너는 네가 맘에 든다면 괜찮지 않아?"
"그렇겠지?"
"응."
내가 입은 옷은 레니의 기준으로 보았을 땐 좀 단순한 디자인이었지만 단순해서 내 맘에는 들었다. 아이보리색 상의에 짙은 푸른색 실크 천으로 둘러진 이 드레스는 치마 부분이 살짝 풍성하게 펼쳐진 것 외에는 큰 무늬도 러프도 많지 않은 옷이었다.
"넌 너무 심플하지 않아?"
"내 약혼식도 아닌데 뭐 어때?"
"……하여간. 자기 약혼식 아니어도 다들 자기 약혼식처럼 치장하고 오거든?"
"그러고 싶은 사람은 그러라고 해."
우리는 갈아입은 옷을 선보이기 위해 탈의실에서 나와 룸으로 나왔다. 사실 조금 걱정했더랬다. 내가 걱정한 게 아니고 레니가. 누굴 걱정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페터 리제도 공자를 걱정했다. 생각해봐라. 그다지 친분이 있지도 않은 그 남자와 그 것도 같이 있기 그리 편안한 상대도 아닌 그 남자와 단 둘이 룸에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곤욕스러운 일인지를 말이다.
그 걱정 때문이었을까? 우린 정말 너나 할 것 없이 엄청난 속도로 옷을 갈아입었다. 옆에서 옷 입는 것을 도와주는 직원들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뜰만큼. 그런 레니의 걱정대로 우리가 들어서자 너무너무 어색했다는 것이 역력한 페터 리제도 공자가 아주 밝게 레니를 반겨왔다.
"예쁜데?"
"정말?"
"응."
그들의 다정한 대화를 들으며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얼굴만 봐서는 도무지 모르겠다.
"저는 칭찬 안 해주세요?"
"……집에서 입으려고?"
"……약혼식 날 입으려고요."
"……."
그렇게 별론가? 그의 얼굴엔 딱히 이렇다 할 어떤 표정도 없었지만 방금 전 꺼낸 말로 유추해 보면 내가 고른 이 옷이 그다지 맘에 들진 않는 모양이다.
"거 봐. 내가 너무 수수하다고 했잖아."
옆에서 레니가 살짝 타박을 준다. 화동 역할을 해주는 보답으로 레니와 페터 리제도 공자가 내게 사주는 옷이니 만큼 내가 너무 수수한 옷을 고른 것이 공작의 눈치가 보인 모양인지 레니는 계속 그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별로예요?"
"별로라기 보단. 흠."
사실 전체적인 느낌이 좀 수수해서 그렇지 질감이라든가 디자인이 촌스러운 건 아니다. 오히려 은은한 맛이 있어 뷰티크 살롱에 이런 옷이 있으리라 생각지 못한 내겐 이것보다 눈에 들어오는 옷은 없었다.
"여기 비치된 보석 중 가장 화려한 것이 뭐지?"
"네?"
"목걸이, 귀걸이, 반지 아무거나. 가장 화려한 것들 전부 가져오지."
"아, 네. 알겠습니다."
갑작스런 그의 명에 마담은 뒤에 서 있던 직원에게 재빨리 손짓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마담의 손짓에 나갔던 점원이 엄청난 보디가드들을 동반하고 룸에 들어섰다.
"호호호. 공작님께서 친히 명령하시니 아무 거나 내놓을 수는 없겠지요. 이걸 보시겠습니까?"
담겨진 케이스부터가 부담스럽다. 마담이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우리들 앞에 보석을 내밀었다.
"가넷으로 만든 펜던트입니다. 브로치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지요. 가넷의 붉은빛을 강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뒷부분에 호일을 사용했답니다. 어떠십니까? 붉은 빛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으십니까?"
"색은 괜찮지만 커팅이 그리 맘에 들지 않는군. 다음."
"네."
한 번 힐끔 보고 내치는 그의 태도에도 마담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히 내칠 줄 알았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것을 우리 앞에 내려놓는다.
"포도주를 흡수한 듯 짙은 보라색으로 물든 자수정 반지와 팔찌 세트입니다. 한 팔에 두 개의 팔찌를 끼고 다른 편 손에 반지를 끼는 형식으로 착용합니다. 색이 투명하고 짙은 최고급 자수정이지요."
"다음."
"아쿠아마린 귀걸이입니다. 보시지요. 아름답게 빛나는 하늘빛이 아가씨와 어울리지 않습니까? 물론 아시겠지만 푸른색의 아쿠아마린은 참으로 구하기 어렵습니다. 내포물이 없는 투명한 것 일수록 값어치도 높아지지요. 이것 보십시오. 참으로 청명한 푸른 빛 아닙니까? 디자인은 간단한 물방울 모양이지만 이대로도 충분히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제 생각엔 아가씨께서 좋아하실 만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음."
하지만 그는 가차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 뒤로도 계속 나오는 보석들의 향연에 나는 질린 얼굴로 그의 옆에 앉아있었다. 대체 이 남자가 어떤 보석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마담이 여기에 내놓은 보석들도 충분히 눈 돌아갈 만큼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이다.
내 돈으로 단 한 번도 구입해 본 적 없고 구입할 수도 없는 그런 보석들.
그 찬란함에 눈이 부셔 머리까지 아플 지경인 나와 달리 레니는 제법 의욕적인 얼굴로 마담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하나 구입할 모양인가 보다.
"다음."
하지만 계속되는 그의 불만족에 마담의 얼굴엔 이제 난감한 빛이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최고라 자부하는 보석들을 죄다 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의 욕구에 맞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대로 그가 맘에 드는 보석을 찾지 못하고 그냥 나서게 된다면 그 소문은 삽시간에 사교계에 돌 것이다. 그럼 이 뷰티크 살롱도 어느 정도 타격을 받을 것이다. 고작 이런 일로 타격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만큼 그의 명성이 대단하다는 뜻이다. 반대로 공작의 맘을 흡족하게 만든 보석을 이곳 뷰티크에서 판매하게 된다면 앞으로 뷰티크 살롱의 이름은 더욱더 유명해지는 거고.
"더는 없는 건가?"
딱히 실망했다는 어투도 그렇다고 기대하는 어투도 아닌 목소리로 그가 말하자 마담은 가만히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보석을 사도 돈을 내는 건 내가 아니다. 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란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마담의 시선에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맘에 들었던 것이 있었나?"
"저요?"
"그럼 누구?"
"사주시게요?"
"골라봐."
고르라면 못 고를 줄 알고?
사준다는데 마다할 사람 없다. 나도 그렇다. 그의 말에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마담이 쭉 펼쳐놓은 보석들은 훑어보았다. 그냥 쳐다만 봐도 황홀한 이 보석들을 보고도 눈에 차지 않아하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다.
"저거, 예쁘지 않아?"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나와 같이 보석을 열렬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레니가 한 방향으로 손가락을 쭉 폈다. 그 손가락 끝이 향하는 곳엔 붉은색의 보석이 놓여있었다. 꼭 자기 같은 것만 고른다, 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