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1 회: #4 -- >
꽤나 거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거짓말같이 내 쪽을 향해 고갤 돌리며 정확히 나를 찾아냈던 그 순간, 영애들은 꺅꺅 거리며 난리를 쳐댔었다. 그 모습에 나는 내 모습을 절대 그녀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구석으로 더 구석으로 파고들어가 레니가 날 찾으러 올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시력 좋아요?"
생뚱맞게 나는 그 때 그가 정말로 나를 알아보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는 아주아주 밝은 곳의 중심에 서 있었고 나는 조금 어두운 그것도 구석자리에 서 있었으며 우리 둘 사이에는 사람들은 무척이나 많이 있었고 또한 거리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냥 대답이나 해줘요. 시력 좋아요?"
"나쁘진 않아."
그렇군. 그 때는 우연히 내 쪽을 본 거겠지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정말로 나를 쳐다본 걸지도 모르겠다. 뒤를 힐끔 보니 우리보다 살짝 뒤에서 걸어오는 레니와 페터 리제도 공자가 다정하게 얘길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우리는 곧 뷰티끄 살롱에 도착했다. 그 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살롱에 들어선 나는 내 뒤를 따라 들어선 그의 모습에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들을 보고 그제야 아차 싶었다.
"꺄악~~~~~~."
"어머어머어머어머어머어머!!!!!!"
"세상에, 어쩜 좋아!!!"
"신이시여!!!"
멀미에, 숙취에, 포션의 아까움에! 깜빡 잊고 있었어. 젠장, 이 남자와 같이 다니면 골치 아픈 일이 한 가득이란 걸 어떻게 잊고 있을 수 있지? 바보 같으니라고.
그제야 나의 크나큰 실수를 깨닫고 불쌍한 표정으로 레니를 쳐다보자 레니는 이런 반응을 처음 보는지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향해 소릴 질러대는 살롱 안 영애들과 그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렇구나, 레니는 처음 보는 광경이겠구나. 하긴, 레니가 그와 함께 쇼핑을 다녀본 적이 없으니 딱히 볼 일도 없었으리라.
갑작스런 시끄러움에 살롱 마담이 급히 뛰어나왔다. 직원들이 뭔가 실수한 건가 잘못된 일이 있나 싶었는지 걱정스런 기색이 가득했던 마담은 소란의 한 가운데 선 그를 보고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완벽한 거물이 이곳에 친히 납시셨다. 기분이찢어지게도 좋으시겠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공작님."
사방에서 들려오는 인사를 거의 무시하듯 방관하고 있던 그는 마담의 안내에 내 허리에 손을 얹고 곧장 안쪽으로 향했다. 우리가 모두 살롱 최고급 방에 안내되어 들어오는 그 순간까지도 영애들의 꺅꺅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시끄러웠다, 머리 아플 정도로.
여러 개의 문이 차곡차곡 닫히고 나서야 우리는 드디어 그 소음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완벽하게 소리가 차단된 것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방음 마법이 쳐져있는 모양이다. 대부분 귀족의 집무실 같은 곳에 친다는 방음마법은 비밀유지에 아주 효과적인 반면 뭐, 당연하겠지만 비쌌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소파에 가 앉는다. 그가 그러든 말든 나는 우리가 들어오자마자 마치 우리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들여오는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레니에게 맞는 옷을 찾아보았다. 그런 내 옆에서 레니도 진지한 표정이 되어 옷들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의 귀족영애들이 자리에 앉아 점원들이 옷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설명해주는 것을 선호한다면 몇몇 귀족영애들은 그렇게 보는 것을 무척이나 답답해해서 직접 늘어선 옷가지들을 먼저 살펴본 후 맘에 드는 곳을 꺼내 자세히 따져보는 방식을 더 선호한다.
레니와 나는 물론 후자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와 옷에 달라붙어 옷가지들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나와 레니 때문에 곤란한 상황을 맞이한 사람은 아무래도 페터 리제도 공자였던 모양이다. 백작 가(家)의 장남이라고는 하나 아직 백작 가(家)를 이어받지 않은 그는 아무런 직위가 없다. 하지만 소파에 떡하니 앉아 있는 저 남자는 어린 나이에 이미 공작 가(家)를 정식으로 인계받아 공작 가(家)를 다스리는 현 공작이었다. 그 신분차란 어마어마한 것이다.
"앉지."
"네."
그런 그의 고민을 안다는 듯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힐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그와 좀 떨어진 곳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페터 리제도 공자의 모습을 보며 나는 옆에 바짝 붙어선 레니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저 남잔 왜 데리고 온 거야?"
"누구? 공작님?"
"그래."
내 질문에 레니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오빠랑 내가 모시고 온 거 아니야."
"그럼?"
"우리도 놀랐다고. 공작님께서 함께 가신다고 하셨을 땐."
그렇게 말하는 레니는 정말로 놀란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오늘 내내 페터 리제도 공자 역시 좌불안석인 모습만 보여주고 있으니 레니의 말이 거짓은 아닐 터고. 한 가지 웃긴 건 페터 리제도 공자에 반해 레니가 저 남자 앞에서 훨씬 더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데……."
"응?"
"공작님하고 같이 다니면 항상 이렇게 시끄러워?"
방금 전 목소리보다 작게, 아주 더 작게 레니가 물었다. 나는 방금 전 살롱에서 있었던 소음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시끄러워. 많이 시끄러워. 오늘은 그나마 나은 편이야. 다행이 살롱 안에 영애들이 많이 없었으니까."
"아까 그 소리가 나은 편이라고?"
"응. 어쩔 때는 짜증나리만치 시끄러울 때도 있거든. 아름다운 약혼녀 후보들을 마주쳤을 경우엔 말도 못하게 정신없어. 하나하나 그 입을 꿰매주고 풀까지 완벽하게 발라주고 싶은 충동까지 인다니까. 아니, 제발 잠시라도 좋으니까 제발 조용히만 해준다면, 난 키스라도 마구 퍼 부어줄 수 있을 것 같아."
"키스? 푸히히."
"게다가 목소리는 또 얼마나 째지고 높은지. 귀족 영애가 연약하다는 이미지는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니까. 한 시간만 그 낭랑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그 것보다 더 큰 무기는 없는데 말이야. 왜 전쟁터의 장수들은 영애들의 목소리를 무기로 사용할 생각을 못하는 걸까? 전쟁터로 성량 크고 수다쟁이인 영애들 열 명만 데리고 나가도 분명 백전백승인데 말이지. 아직까지도 그 대단한 무기를 활용할 생각들을 전혀 못 한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야."
"킥킥."
"있지. 나는 말이야, 하루 종일 책을 읽을 때도 안 아프던 머리가 그 영애들 목소리 10분만 들어도 지끈지끈 아파와. 그런데 그 목소릴 저 남자랑 같이 있으면 거의 백발백중으로 들어야 하거든. 그래서 난 저 남자하고 어디 같이 가는 거 싫더라."
오래 전 저 남자와 함께 살롱에 갔다 만났던 아를랜디 눌리아 영애를 떠올리자 절로 소름이 돋는다. 그 때 그 소란이란. 정말 끔찍한 것이었지.
내가 몸을 부르르 떨며 당시의 공포에 질려하고 있는 그 때 뒤쪽에서 큭큭큭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에 설마하고 레니와 내가 뒤를 돌아보자 이젠 정말 모든 걸 포기했다는 듯 초월한 표정을 짓고 있는 페터 리제도 공자와 웃겨죽겠다는 눈빛으로 웃으며 나를 쳐다보는 그 남자가 있었다.
젠장, 들었구나. 저 눈빛 봐라. 저 올라간 입 꼬리도 봐라.
저 남자는 우리 대화를 들은 게 분명하다. 저 남자뿐만이 아니라 페터 리제도 공자도 들은 모양이지만 내겐 저 남자가 들었단 사실만이 중요하다. 시력만 좋은 줄 알았더니 청력까지 좋은 모양이지? 레니도 겨우 들을 수 있을 만큼 작게 말했다고 말했는데도 어떻게 들을 수 있는 거람? 검술을 배우면 다 그런 건가?
그가 들었단 생각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도 잠시. 곧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흥, 들었으면 어때! 틀린 말 한 것도 없는데.
나는 그를 향해 싱긋 웃어주고는 하얗게 핏기가 사라지고 없는 레니의 몸을 돌려 다시 옷가지에 열중했다.
"괜찮아, 괜찮아. 긴장하지 마. 없는 말 한 것도 아니니까."
안심도 시켜주면서.
곧 우리는 몇 개의 옷가지들을 골라 나는 그 남자 옆에 레니는 페터 리제도 공자 옆에 앉았다.
내가 옆에 앉자 그의 손이 내 허리에 감겨온다. 자연스럽게 아주 자연스럽게. 진한 연인들 사이에서나 할 수 있는 그 스킨십에 슬그머니 인상이 써지려했지만 어차피 그의 정부로 알려진 마당에 이 정도가 대수인가 싶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허리에 감긴 손에 힘이 더해져 간다.
"나와 다니는 것이 싫다?"
어쩐지 비꼬는 말투라 눈만 떼구르르 굴려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내 착각인 모양인지 평소에 짓던 예의 그 삐뚜름한 미소가 걸려있을 뿐이다.
"밥 먹을 때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 쳐다보고 있다고 상상해 봐요. 잘 먹을 수 있겠어요?"
"못 먹을 건 또 뭔데?"
……잘나셨지요. 멋지세요. 정말 감탄이 나올 지경이랍니다. 당신의 잘남에 대해선 정말이지 더는 할 말이 없네요.
"저는 못 먹거든요? 그런 상황이라면 물만 마셔도 체할 거라구요. 당신이랑 다니면 모든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주시해대는데 그런 당신하고 다니는 걸 제가 좋아할 것 같아요?"
"날 보는 거지 그대를 보는 게 아니잖아?"
"……저도 보거든요? 따지고 보면 당신보다 더 열렬하게 저를 본다구요."
마치 칼로 싹둑 잘라버리고 싶다는 듯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는데 시력도 좋고 청각도 좋은 남자가 그런 사나운 눈빛들의 의미는 왜 파악하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무시하는 거겠지만.
하여튼 당해도 내가 당하고 욕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짜증나거나 유치하거나 악랄하거나 기타 등등의 질투를 받아도 내가 받는다. 그러니 이 남자에겐 그런 것 따윈 신경 쓸 사항이 아니라는 소리지.
"내 여자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