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9 회: #4 -- >
"너도 그랬어?"
"응?"
"너도 그러니까, 음, 공……작님이 주물, 아니 만져……크흠. 어쨌든 관계 맺고 난 후에 커진 거야?"
"으응?"
얘가 지금 무슨 소리라니? 나는 힐끔 내 가슴을 쳐다보았다. 그 남자와 뭘 하고 나서 커졌냐고?
"!"
아, 그 순간 나는 레니가 떠올린 방법이 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풋,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웃음을 참는 바람에 굳어버린 내 얼굴이 무척이나 진지해 보였나보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레니도 덩달아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려댔다.
"그랬구나. 너도 그 후에 커진 거구나."
"……."
"나도 결혼하고 오빠와 잠자리를 같이 하고 난 뒤에는 너만큼 커져있겠지? 그렇겠지?"
"……그렇겠지."
"흐음. 걱정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어. 그렇지?"
"……그렇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괜스레 옷자락을 정리하는 척하고 레니가 다정하게 씌워준 모자를 정리하는 척하고 등등. 레니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아, 고마워. 덕분에 고민이 싹 날아갔어."
다시 발랄함을 찾은 레니를 향해 나는 웃어 보이려 노력했지만 제대로 웃었는지는 모르겠다. 이제야 내 건 처음부터 이 크기였다 말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레니는 내 가슴을 무척이나 큰 것처럼 부러워하고 있는데 사실 내 가슴 사이즈는 평균이다, 평균. 레니가 평균에 못 미칠 만큼 작은 거지.
빨리 둘만 있는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어서 나가자고 말한 뒤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고 보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남정네 생각도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기다리느라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평소 같으면 해주지 않았을 배려를 해주며 발걸음을 빨리하는 내 손을 레니가 턱! 하니 잡아챘을 때, 덜컹 내려앉은 내 심장이 얼마나 강했는지 그래서 명치끝이 얼마나 아팠는지는 분명 신만 아시리라.
나는 이미 한 손으로는 문을 열기위해 뻗은 상태였다. 손잡이와 내 손이 거의 닿을락말락한 그 순간 잡혀버린 또 다른 손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유나."
달콤하게까지 느껴지는 레니의 목소리에 오히려 뻣뻣하게 굳어버린 고개를 겨우겨우 돌려 레니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놀라고야 만다.
"!"
레니가 수줍은 듯이 웃고 있다! 대체 왜 저렇게 웃고 있는 거지? 왜 안 어울리는 웃음을 입가에 띠고 있느냔 말이다! 게다가 볼에 떠오른 저 홍조는 또 뭐고? 이젠 내 정신은 혼란에 빠져버릴 것 같다.
"유나."
대답 없는 날 위해 다시 한 번 레니가 나를 불렀다.
"으응."
목구멍에서 삐져나오는 형편없이 가라앉는 내 목소리에도 레니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친구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존중해 주듯 그녀는 나를 보며 방긋 웃기까지 한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다.
들킨 건가? 그런 건가? 사실은 내가 가슴이 커지는 방법 따윈 모르고 있단 것을 눈치 챈 건가? 나를 떠보기 위해 아무렇게나 지어낸 말을 내가 덥석 물어버린 건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레니에게 덜 당하면서도 사죄의 의미로 물건을 덜 뺏길 수 있을까? 비굴하지만, 그냥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작전이라도 써야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레니가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유나."
"으응?"
"봤어?"
"응?"
"봤냐고."
"그러니까, 뭘?"
조심스럽게 레니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레니의 얼굴엔 분노라던가, 분노라던가, 그래 분노의 빛이 없었다. 일단 그것으로 안심은 했지만 아직 마음을 완벽히 놓기엔 불안하다. 그래도 조금은 편해진 마음으로 나는 여유를 찾고 레니를 쳐다보았다.
"뭘?"
"그러니까 말이야, -거 봤냐고."
"응?"
중간 중간 단어가 잘 안들 리는 것으로 보아하니 저 단어들은 분명 야한 단어들이 틀림없었다. 이제는 몸까지 베베 꼬아가며 수줍어하는 레니의 모습에 나는 완벽히 안심했다. 아무래도 내 연기가 뽀록난 건 아닌 모양이다.
"이번엔."
"이번엔?"
"공……작께서 주무시는 걸 봤어?"
"……."
하여튼 너는…….
나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도대체 레니의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싶다. 수줍어하면서 물어보는 게 고작 그 남자가 자는 모습을 봤냐는 거냐? 쯧쯧. 내 잘못이다. 내가 왜 쓸데없이 그 남자가 자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등의 말을 너한테 지껄였는지 모르겠다.
레니의 초롱초롱한 눈을 마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눈에 나는 눈을 반쯤 내리깔고 지쳤다는 듯 한마디 해주었다.
"못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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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썩!
"하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공작 가(家) 마차에 올라 소파에 거의 몸을 내던지다시피 앉으며 큰 숨을 내쉬었다. 뒤따라 들어온 그는 마차 문을 닫고 내 맞은편에 앉아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상에, 내가 레니를 피해 이 남자와 단 둘이 있는 것을 선택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이런 날도 있구나. 여하튼 인생이란 알 수 없다.
레나는 페터 리제도 공자와 함께 리제도 백작 가(家)의 마차에 탔다. 우리는 지금 루벤스 제국의 수도 루노에서 가장 번화한 상점가로 가기 위해 각자의 마차에 올랐다. 왜 가는 거냐고? 그야 레니와 페터 리제도 공자가 화동 역할을 해 줄 내게 성의를 표하기 위해서다.
화동은 일반적으로 약혼식 때 치러지는 이벤트의 일종으로 활약하게 된다. 화동이라고 해봤자 요즘은 어린아이가 아닌 신부의 친구 중 한 명이 그 역할을 맡는데 그건 일종의 재롱잔치와 다름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작 한다는 것이 새로운 부부로 거듭날 이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한다거나 혹은 편지를 낭독한다거나 하는 등 자신에게 가장 자신 있는 장기를 하나 선택해 보여주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독특한 화동행사 중에서는 검무를 추는 사람도 있었다 하기도 하고 마법이나 정령술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었다 한다. 혹은 즉석요리라던가 춤을 추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고. 하지만 대부분은 노래를 하거나 악기를 다루는 무난한 선에서 그친다고. 때문에 화동역할에 대한 부담감은 딱히 없었다.
여하튼 별거 아닌 이 관습이 왜 이렇게 인기 있는 행사로 굳어져버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평생 내가 화동 역할을 맡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더랬다.
마구잡이로 퍼질러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얼굴 위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꽤 뻔뻔한 얼굴 두께를 가지고 있는 여자기 때문에 그가 얼마든지 쳐다봐도 무시해 줄 수 있다.
"모른 척 그만하지?"
"……."
저렇게 대놓고 말하지 않는 이상.
나는 뜨기 싫은 눈을 억지로 뜨고 앞에 앉은 잘난 나의 정부를 쳐다보았다.
내가 퍼질러 앉은 꼴이랑 그가 퍼질러 앉은 꼴이랑 표현에는 차이는 없는데 그 형태는 천지차이다. 거참, 불공평하네. 하지만 한 팔은 소파 등받이에 올리고 한 다리는 꼬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꽤나 자유분방하면서도 멋져 보였다.
"무슨 속셈이에요?"
"무슨 속셈이냐니. 매번 선택하는 단어마다 왜 다 그 모양이야?"
그야 당신이 이유 없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속으로만 웅얼거리고 만다. 어차피 내가 암만 추궁해봤자 저 남자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을 거다.
어차피 듣지도 못할 거 무슨 속셈이냐고 달달 볶아봤자 나만 피곤하지.
설령 그가 말해준다 해도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지 역시 알 수 없다. 내가 바보라서가 아니라 저 교활한 남자가 알아듣지 못하게 설명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어차피 그가 무슨 일을 하던 그가 하는 일에 대해 난 궁금해 한 적도 없고 관심을 둔 적도 없다는 거다.
어쨌든 나한테 피해만 없으면 돼.
"머리가 울려요."
아무래도 빈속에 술 마신 탓인가 보다. 공작 가(家)의 마차는 무척이나 좋았지만 비린 속은 조금씩 울렁거려대기 시작했다.
"쯧. 괜히 술 따윌 보내줬나 보군."
그런 내 몰골에 여전히 여유작작한 포즈로 앉아 나를 구경하듯 쳐다보던 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혀를 차댄다. 얄미우리만치 느긋한 그의 목소리는 내 속을 더 울렁이게 만들고 있었다.
"술은, 잘 보내줬어요."
"설마 매일 이런 꼴로 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빈속에만 마시지 않으면 되요."
그래, 빈속에 마신 탓이다. 그리고 바로 마차에 탔기 때문이다. 만약 빈속에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이렇게 마차를 타지 않았더라면 멀미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나는 손을 뻗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시원한 공기가 조금은 찬바람과 함께 마차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왔다. 갑작스런 찬 기운에 닭살이 좀 돋았지만 속은 한결 나아진 것 같았다.
"그냥 옆으로 누워서 자."
"……그게 더 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