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8 회: #4 -- >
"있잖아. 실은 술판을 벌일 계획을 한 것도 화동 얘기를 꺼낼 겸 준비한 거야."
어라? 이 거짓말은 그냥 못 넘어가겠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술판을 준비했었다고?"
"뭐, 이유 중 하나였지."
개뿔. 나는 술판을 준비한 이유는 오로지 맘껏 마시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절대적이라 확신한다. 절대 화동 따위의 말을 전하기 위해 그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레니가 준비할 리가 없으니까.
의심스런 내 눈초리에 견디지 못한 레니가 배시시 웃어 보인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화동을 말하기 위해 술판을 마련했다는 건 지금 레니가 지어낸 것이 분명해졌다.
"어쨌든 나는 말하려 했어. 네 말대로 술을 진창 마시고 싶다는 욕구가 좀 더 강하긴 했어도 말이야."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쳇. 좀 속아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리고 네가 바로 공작성으로 가서 일주일 동안이나 머물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니?"
이 말은 맞다. 나도 공작성에 가서 일주일 동안이나 그곳에 머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으니까.
"아."
마침 공작성 얘기가 나오니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상해."
"응?"
"이상하다고."
"뭐가? 내가 고른 이 드레스가?"
그러면서 자기가 든 드레스를 내려다본다. 아, 물론 드레스는 예쁘다. 저 드레스는 그 남자의 대가 몇 혼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대가 중 하나였다. 심플한 상의 부분과는 대조적으로 몇 겹으로 층층이 이뤄진 블랙의 스커트는 화려하면서도 과하지 않아 내가 맘에 들어 하는 옷 중 하나다. 저 드레스와 한 세트인 스커트 자락과 같은 재질의 모자는 환상적 궁합이었고. 심플하면서도 화사한 느낌이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게 아니라. 이번 내가 공작성에 머물렀을 때 말이야."
"응."
나는 레니의 도움을 받아 더러워진 옷을 벗고 새 드레스를 입으며 중얼 거렸다. 사실 혼자 입어도 상관없지만 도움을 굳이 거부할 필요도 없다. 우린 종종 이러고 놀기도 했었으니까. 일종의 인형놀이라고나 할까.
드레스를 몸으로 끌어올리며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늘 공작성에 갈 때 마다 꼬박꼬박 찾아오던 아를랜디 눌리아 영애가 이번엔 한 번도 오지 않았거든."
"정말?"
"응."
"일주일 동안 단 한번도?"
"응."
웬일이래. 뒤에서 레니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으며 나도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웬일이래.
그런데 그 때 지퍼를 올려주던 레니의 손이 지퍼가 채 다 오르기 전에 옷 안쪽으로 쑥 들어왔다. 헉! 그리고 강하게 내 양 가슴을 움켜쥔다. 헉헉!!
뭉클뭉클. 이, 이봐? 이게 대체 뭐하는 짓?
갑작스런 그 행동에 난 제대로 놀라지도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 모든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
"……."
"……레니?"
"응? 아, 미안. 미안."
저도 모르게 저지른 짓인지 오히려 침착한 내 목소리에 비해 레니의 목소리는 굉장히 높고 불안정했다. 슬쩍 뒤돌아 째려봐주자 빨개진 얼굴로 양손을 마구 흔들어대는 레니가 보인다. 당장 저 기집애를 붙잡아 똑같이 당해보도록 해주고 싶지만 지금은 옷부터 먼저 제대로 입어야 할 것 같다. 그것도 가능한 빨리.
난 누가 보아도 서두른다는 티를 내며 한 팔을 어깨 너머로 보내고 다른 손은 드레스 뒷자락을 팽팽하게 잡아내려 지퍼를 집은 손이 지퍼를 잘 끌어 올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런 내 모습에 레니가 서둘러 다가오며 도와주려했지만 난 그런 레니의 행동을 눈빛으로 제압했다.
가까이 오지 마, 이 변태야.
그리고 그런 내 눈빛에 레니가 잠시 주춤한 사이 재빨리 지퍼를 위까지 쭉 올려 채웠다. 체력은 형편없을지 몰라도 뼈는 나름 유연한 사람이 나다. 혼자 지퍼를 채우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이런 불상사가 터질 줄 알았다면 절대 레니 저 기집애에게 지퍼를 맡기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언제부터 저 기집애가 내 가슴을 노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변명은 들어봐야겠지 싶다.
"말해."
"응? 아니, 그게, 그러니까 말이지. 일단 오해야, 유나야."
"제대로 말해."
"아, 음, 그게, 그러니까 너 보기보다 가슴은 좀 있구나. 그 정도로 볼륨이 있는지는 몰랐…… 아니, 그게 아니고."
"……."
"그러니까 만져보니 가슴이 꽤 폭신폭신……아니, 그 의미는 나쁜 뜻은 아니고 어쨌든 감촉이 생각보다 좋더-,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더 만져보고 싶다는……. 아, 이게 아닌데……."
"……."
"……."
"너 변태냐?"
헛소리 해대는 레니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내가 경멸스럽다는 듯 째려보자 몇 번 움찔거리던 레니가 포기했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트린다. 가히 불쌍한 사람의 형상이었다.
"눈 좀 풀어라, 기집애야. 그냥 부러워서 만져봤다. 부러워서 만져봤다고!"
"부러워?"
내 반문에 레니가 약간 구부정하게 굽혔던 허리를 꼿꼿이 펴며 양손으로 자신의 갈비뼈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상체를 부각시키듯 가슴을 내밀었지만.
"……."
그다지 도드라지지 않는 정점에 레니의 얼굴이 슬며시 붉어져간다.
"으음."
"봐. 나는 콩알 같아서."
"으음."
"나도 쫌 있으면, 음, 그러니까, 페터 오빠랑, 그러니까, 할 텐데……."
목소리가 완전 기어간다. 덩달아 방금 전까지 쑥 내밀었던 상체도 기어들어가듯 쪼그라든다. 그 힘없는 모습에 나는 혀를 쯧쯧 찼다. 아무래도 레니의 만행을 이 번 만은 아무런 조건 없이 용서해 주어야겠다. 방금 전에 보았던 그 안쓰러운 크기를 생각해서라도. 비단 내가 착해서가 아니라 여자라면 누구라도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만큼, 작았다, 안타깝게도.
"휴. 오빠가 실망하면 어쩌지?"
결국 최종 고민은 이거였구나.
같은 여자로서 또 레니의 친구로서 나는 그녀의 고민을 인정해주었다. 점점 달아오르는 레니의 표정을 보아하니 곧 감정이 폭발할 것 같다. 그녀의 감정이 폭발해 이성이 폭주하기 전에 나는 레니를 달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커질 거야."
"응?"
"커질 거라고."
"어……떻게? 무슨 방법이 있어? 응?"
뭐? 어떻게 라니? 어떻게 라니? 원래 성장할수록 가슴도 커진다는 의미로 말한 건데 레니에게는 마치 다른 방법이 있는 것처럼 들려버린 건가?
"어떻게? 응? 어떻게 커진다는 거야? 응?"
"으."
저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니 차마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커질 거라는 입에 발린 말은 못하겠다. 아마 난 얻어맞을 지도 모르지. 레니의 주먹은 꽤 매운데.
난 서둘러 방법, 방법을 생각해 봐야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이 말이 레니에게 먹혀들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적어도 이 순간만은 피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피팅룸에서 나와 방 안을 서성이며 뾰족한 수를 떠올리려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런 내 뒤를 레니가 조르르 쫓아 나온다. 그 정신에도 내 모자 챙길 여력은 있나 보다. 커진다는 내 말에 잔득 기대한 모양인지 평소보다 배는 다정한 손길로 모자를 씌워주며 레니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해야 커지는데? 응?"
이보다 더 나긋나긋할 수가 없다. 심지어 레니의 목소리에는 향기가 묻어나는 것 같다. 여기서 나도 잘 모르겠다는 등의 얘길 꺼낸다면 나는 살아남지도 못할 듯하다. 그러겠지? 분명? 그만큼 레니는 내 대답을 아주 희망에 찬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에, 에잇! 너는 로맨스 소설을 그렇게 많이 보면서도 몰라?"
"응?"
제길, 그냥 위로나 해줄 것이지. 괜히 쓸데없는 소릴 해서 위기로 내 스스로 몰아넣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되는대로 마구 말을 쏟아냈다.
"답답하게. 나한테 말해달라는 것도 웃겨. 술에도 안 취했는데 어떻게 멀쩡한 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냐?"
"응? 응?"
"너, 로맨스 소설 많이 보잖아! 안 그래?"
"그렇지."
레니가 맞는다는 듯 고갤 끄덕인다. 아마 페터 리제도 공자는 모를 것이다. 레니가 얼마나 로맨스 소설을 즐겨보는지. 남자한테 관심 없다, 없다 하니 진짜 없는 줄 알지. 하여간 제대로 속고 계신다. 하지만 나는 레니가 로맨스 소설이라면 환장한다는 것도 또 꽤 수위 높은 것들도 척척 읽는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
웃긴 건, 그런 수위 높은 로맨스 소설을 자기네 집에 뒀다간 시녀장한테 걸려 뺏길 것이 분명하다면서 내가 머무는 이곳 별장에 가져다 놓는다는 거다. 그래서 솔직히 나도 몇 권 덩달아 읽었더랬다. 덕분에 여기 이 별장에 사는 시녀들은 그 소설들을 다 내가 산 줄 안다. 맙소사.
"그래서?"
"으이구, 이 바보야. 내가 방금 말했지! 맨 정신으로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내가 어떻게 하냐고!"
사실, 할 말이 없는 것뿐인데.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그런 내 속내를 모르는 레니는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곧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 하고 깨달음의 신음성을 내는 걸 보아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 있는 모양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레니가 떠올린 것을 내가 생각하고 있던 바로 그 방법이었노라고 덮어씌울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렇구나. 저절로 커지겠구나."
"그……렇지."
어떤 방법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긍정해 주는 내 말엔 그리 자신감이 없다. 하지만 희망에 찬 레니는 그런 내 반응을 분석할 만한 정신이 없어 보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고민할 필요가 없었어. 고마워, 유나."
"……뭘, 그 정도 가지고."
대체 레니는 무슨 방법을 떠올린 걸까? 심히 궁금하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는 편이 화제를 바꾸는데 용이할 거란 생각에 나는 궁금증을 꾹 밀어 넣었다. 나중에, 나중에 슬쩍 물어봐야지. 레니가 눈치 채지 못하게 슬쩍. 그렇지만 고맙게도 레니는 지금 당장 내 호기심을 채워주겠다는 듯 재잘거리며 말을 속사포마냥 쏟아냈다.
"너도 그랬어?"
"응?"
"너도 그러니까, 음, 공……작님이 주물, 아니 만져……크흠. 어쨌든 관계 맺고 난 후에 커진 거야?"
============================ 작품 후기 ============================
*천상유하라님, 잠을 주무세요. 요즘 제 소원은 잠입니다 ㅠㅜ
* lulullu님, ㅋㅋ뮤는 나쁜시키 맞습니다. ㅎㅎ 성격이 제 취향의 남자 스타일이 아니라 제 친구 취향의 남자 스타일이죠.... 네 맞습니다. 제 친구는 아직 철이 없어요. 쯧쯧
* M.
K님, ㅋㅋ뭔가 의미심장하게 댓글 쓰셨네요
* 페르디엔님, 뮤의 시점을 기다리셨나요? ㅎㅎ 일부러 뮤의 시점은 길게 쓰지 않으려 하고 있는데^^;;슬쩍슬쩍 엿보이게만 ㅎㅎㅎ
* 월하한유님, 유나의 속내가 괘씸해서 내버려두는게 아닐까요? ^^;;;;;;
* 정유규리하님, ㅋㅋ 뮤는 약혼녀 후보가 누군지도 몰라요 ㅎㅎㅎ 관심도 없음.
* 게으른냥님, 네ㅠㅜ 저도 정말 자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 팔톤님, 재밌다니 감사합니다^^
* 애플사이다님, 누구요???? 쟤가 누군가요???
* 말궁님, 아이참. 저 애인 있스범외뫼하ㅚ나ㅗ히ㅏ ㅎㅎㅎㅎㅎㅎㅎㅎ
추천 선작 코멘트 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좋은 꿈 꾸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