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7 회: #4 -- >
"아까 말했던 내 의견과 존엄성은?"
"아까도 말했지만 그런 건 없어."
"멋지네."
"응."
이 순간 레니의 저 얄미운 얼굴을 한번만 꼬집어 볼 수 있다면 피아노 위에 올려두었던 내 피 같은 술병들을 모조리 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앞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는 내 모습 따윈 보이지도 않는지 레니는 그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레니가 내 친구라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는다. 저렇게 뻔뻔하고 무지막하고 얄미운 걸 보니 우린 친구가 맞다.
"정말로 꼭 나야?"
"응!"
"진짜? 진심?"
"응. 응."
"하아."
절로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마음 한 편으로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까악~! 히히. 고마워. 감사합니다."
발랄한 표정으로 레니가 내게 먼저, 그리고 내 뒤에선 남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기집애. 사람 대놓고 차별한다. 나한테는 고개 한번 끄덕거린 게 전부면서 왜 이 남자한테는 치맛자락 들어 올리며 무릎 인사란 말인가. 단 하나 뿐인 친구한테도 받는 차별의 서러움에 울컥대는 나와 달리 공손한 인사를 받은 그는 그저 아아, 라는 등의 별 의미도 없는 소릴 내뱉을 뿐이다.
그래, 너한텐 저런 식의 인사가 당연하다 그거냐?
힐끔 고갤 돌려 그를 올려다보자 방금 전까지 보았던 미소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는 꽤나 무료한 표정이었다. 나른하기까지 한. 꽤나 지루하고도 나태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그 모습도 그다지 나쁘진 않다. 역시 사람은 일단 잘나고 봐야 한다. 그래야 어느 각도로 보건, 어떤 표정, 어떤 감정을 얼굴에 띄우든 용서가 되고 예뻐 보이니 말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그는 자신의 부모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 한다. 자신의 외모가 세계 상위 1%내에 들어 갈만한 그런 외모란 걸 본인이 뿌듯해한다면 말이지.
뭐, 이런 말 해줘봤자 벽에 얘기를 하는 게 더 낫겠지만.
"왜?"
내가 너무 오래 그를 쳐다보고 있었나보다. 하루 종일 쳐다봐도 신경은커녕 관심도 갖지 않을 것 같은 그가 영광스럽게도 내게 아량을 베풀어 주었다.
"왜 왔어요?"
그래, 나는 이 말을 물어보고 싶었다.
레니와 페터 리제도 공자가 온 이유는 분명히 알겠다. 그들의 약혼식 날 나를 화동으로 삼고 싶은 거겠지.
화동이라니, 화동이라니! 그처럼 나와 어울리지 않을게 어디 있단 말인가!
게다가, 솔직히, 내가 화동으로 나선다면 분명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가볍고 가벼운 주둥아리로 끊임없는 수다들을 떨어대겠지. 내가 진짜로 한 행동보다 훨씬 부풀어지고 더 부풀어져 거대한 거품처럼 이루어진 거짓된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입속에 가득 차고 넘치고 결국엔 흘러내릴 거다. 그만큼 나는 사교계에 뜨거운 감자였다. 눈앞의 바로 이 남자 때문에.
그런 나를 거리낌 없이 화동으로 삼겠다 소리치는 레니에게 실은 고마운 맘도 없지는 않다. 그걸 허락한 페터 리제도 공자에게도. 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그렇다고 내가 레니의 화동이 되는 것을 반기다거나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어쨌든 그들이 나를 화동으로 삼은 이상, 예의상 내게 옷 한 벌쯤 해주는 건 그냥 일종의 관습에 불과한 것이다. 실제로 옷이 아닌 보석이라든가 다른 것으로 보답하는 경우도 있었고 식사를 대접하는 간단한 방식으로도 고마움을 표현하기도 하니까. 그런 면에 있어 둘이 함께 나를 찾았다는 건 내게 무척이나 정중한 예를 표했다고 할 수 있겠다.
옆에 서 있는 잘나디 잘난 이 남자가 내 정부이기 때문에, 그래서 현재 내 소속(?)은 이 남자에게 속해 있기에 그 둘이 알브레히트 공작에게 예의상 허가를 받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배롤린 남작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은게 어디란 말인가? 물론 레니가 실제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했다면 화동이고 뭐고 그 날로 레니와 대판 싸우는 날이 되었을 테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이 남자가 레니와 페터 리제도 공자와 함께 여길 찾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우린 어제 아침까지 같이 있었단 말이다. 난 고작 어제 오후가 돼서야 이곳에 돌아올 수 있었다. 즉, 벌써 나를 다시 찾을 리는 없다 이 말이다.
"네? 왜 오셨어요?"
"겸사겸사."
"겸사겸사?"
그 겸사겸사가 대체 뭔데? 적나라한 내 표정이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코 곱지 않은 그의 손이 내 머릴 마구 헝클여댔다. 어차피 생머리인데다 잘 헝클어지지도 않는 편이기 때문에 난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는 관계를 나눌 때도 내 머리칼을 자주 헝클이곤 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스킨십은 익숙한 편이다.
"옷이나 갈아입고 와."
그의 말에 나는 힐끔 내 옷을 내려다보았다. 일단 외출복은 아니다. 오히려 페터 리제도 공자에게 보이기엔 조금 민망한 것이었다. 다른 게 민망한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묻어있는 텔의 진액과 흙과 그리고 군데군데 술 자국 때문에 그렇다.
그의 말에 가만히 고갤 끄덕였다. 그러자 레니가 내 손목을 잡고 냉큼 집안으로 나를 끌고 가듯 이끌었다.
방으로 들어와 내 대신 열심히 외출복을 고르는 레니의 입술을 타고 끊임없는 수다가 쏟아져 나왔다.
"내 화동으로 널 삼기 위해 며칠 전에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로 서신을 보냈었거든. 물론 페터 오빠가 말이야. 그런데 너 우리 집에서 바로 공작성으로 가고 난 뒤 언제까지 그 곳에서 머물렀었던 거야?"
"어제 아침."
"흐음. 역시."
레니가 알겠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하나도 모르겠다.
"무슨 반응?"
"응? 아아. 공작께서 오늘 아침에야 방문을 허락하셨거든. 그 전엔 계속 거절하셨어."
"왜?"
"바쁘다고."
바쁘다고? 레니의 말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항상 바쁘다. 그의 모습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자면 내가 숨이 막혀올 만큼 그는 바빴다. 다행이 뛰어난 기사답게 체력도 뛰어나 모든 일을 무난히 소화해 내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과로사로 죽었을 지도 모르지.
"계속 바쁘다고 그러셔서 마냥 기다려야 했거든. 그러다 오늘 아침에서야 방문을 허락한다는 서신을 받고 페터 오빠랑 부랴부랴 서둘러서 바로 찾아뵀지. 그리고 너를 화동으로 삼고 싶다 말씀드리고 허락받았어."
"그래?"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다, 그 남자는. 그렇게 바쁘심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내내 내 이 몸을 흐물흐물 녹여주셨으니. 괴물과도 같은 그의 체력에 질려 고개를 흔들고 있는데 조심스러운 레니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음, 화난 거 아니지?"
"응?"
레니를 쳐다보자 레니는 베이지색 상의에 스커트가 블랙으로 이어진 드레스를 들고 서선 힐끔힐끔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왠지 조심스러워 보이는 그 기색에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레니를 쏘아보았다.
너, 뭘 잘못 먹었냐? 아니면.
"빨리 불어. 너 무슨 짓을 저질렀어? 응?"
"……하여간 내가 너한테 뭔 말을 못하지."
내 반응에 레니의 얼굴이 삽시간 일그러진다. 아무래도 감당 못할 그런 사건을 터트린 건 아닌 모양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어여 말해보라고 재촉하자 입을 열 듯 말듯 하다 결국 조심스럽게 사죄 말을 내게 건넨다.
"너한테 먼저 얘기하지 않아서 미안."
"응?"
"화동말야."
"아아."
그제야 나는 레니의 미안함을 눈치 챘다.
당연히 미안해해야지. 하지만 관대하게 용서하자. 사실 별일도 아니지 않은가. 실제로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괜찮아."
"정말?"
"응."
고개를 끄덕거리며 나름 자애로운 얼굴로 레니를 쳐다봐 주었다. 그런데 그런 내 표정을 레니가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모르겠다. 합!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서둘러 변명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정말로 너한테 제일 먼저 물어보고 동의를 구하려고 했었어. 신에게 맹세코 정말로."
"그래, 알았어."
"물론 말할 기회가 많았다는 건 알아. 그 기회를 계속 미룬 건 분명 내 잘못이야."
"알았다니까."
"우리 둘 다 술에 푹 절어버렸잖니. 난 단순하게 자고 일어나서 말해야지 생각했지만 솔직히 그럴 정신이 남아있었니, 우리가? 시작하기 그 직전에만 어느 정도 제정신이었지 그 다음부턴 완전 해롱거려댔었잖아."
"……."
고만해라, 이 계집애야. 내가 알았다고 하지 않니.
점점 내 눈빛이 사나와 지는 걸 느꼈는지 레니의 목소리가 점점 쪼그라들었다.
"있잖아. 실은 술판을 벌일 계획을 한 것도 화동 얘기를 꺼낼 겸 준비한 거야."
어라? 이 거짓말은 그냥 못 넘어가겠다.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술판을 준비했었다고?"
"뭐, 이유 중 하나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