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5 회: #4 -- >
일탈은 짜릿하다. 일탈이 왜 일탈이겠는가. 평소와 다른 짓을 하니까 일탈인거다. 평소와는 다른 짓을 하기 때문에, 그런 내가 나 같지 않아서 짜릿한 거지. 그렇다. 나는 지금 일탈 중이다. 따라서 지금 나는 굉장한 짜릿함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불과 2주일 전만해도 내가 이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재밌고 웃겼다. 그래서 맘껏 깔깔거리며 웃어보았다. 그런 나의 행동을 본 별장 시녀장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던 것이 떠오르자 가라앉았던 웃음이 다시금 터져 나온다. 그래서 나는 또 깔깔거리며 미친 듯이 웃어버렸다.
시녀장은 이런 내 갑작스런 행동에 어디가 아프다고 생각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눈빛이 딱 그랬다. 혹시 어디가 잘못된 건 아닌가? 하는. 그리고 고민하겠지.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로 연락을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이미 숙지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별장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 말은 즉 이곳에서 일하는 시녀들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는 거다. 그들의 주인은 엄연히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의 공작이고, 그렇기 때문에 공작과 나를 동일선상에 놓고 보았을 때 그들이 충성해야 할 존재는 당연히 공작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 내가 한 행동들이라던가, 이곳에 방문한 사람들이라던가, 그런 모든 정보들이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로 전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네들이 전해주는 그 정보가 알브레히트 공작에게 있어서 얼마만큼의 중요성이 있겠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남자의 집무실에 버려지는 쓰레기들보다 더 값어치 없는 것일 테지. 내가 이곳에 다른 남자를 초대하거나 하는 등의 짓만 하지 않는 한, 그 남자는 내 생활에 터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어느 정도 맞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내 활동이라던가, 내 손님- 그래봤자 레니가 전부지만, 어쨌든 그런 것에 대해 그 어떤 간섭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음, 이건 순전히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가 배롤린 남작과 론 자식이 내게 접근하는 것을 차단해 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이곳으로 터전을 옮기고 난 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배롤린 남작이 날 찾아와 얼토당토하지도 않는 요구를 당당히 해대며 그 역겨운 얼굴을 비칠 거라 예상했었기에. 하지만 그런 내 예상과는 다르게 배롤린 남작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이곳을 찾아오거나 내게 편지를 보내거나 하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론의 그림자조차 난 본 적이 없다. 그건 내게 참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내겐 큰 피해가 없는 일이니 시녀장이 내 어떠한 정보를 공작성으로 올려 보내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맘껏 전해라, 맘껏.
"움하하하하하. 아아, 조오타아-."
이렇게 좋을 수가! 나는 지금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이런 좋은 기분은 2주일 전 레니와 광란의 술판을 벌이지 않았다면 맛보지 못했을 즐거움이요, 일주일 전 나의 정부라는 남자에게 별장으로 좋은 술을 보내 달라 말하지 않았다면 절대 이뤄질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일주일은 롱아르 백작 가(家)에서, 그 뒤 일주일은 공작성에서 보내고 2주 만에 별장으로 돌아왔더랬다.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그는 이곳으로 술병을 잔득 보내 논 상태였다.
지하에 가득한 술병들의 향연에 내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해졌다는 사소한 정보는 시녀장에 의해서 이미 그 남자 귀에까지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정말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몰랐던 사실이지만 이 곳 별장 지하창고에도 갖가지 음식창고와 술 창고가 있었다. 물론 웬만한 저택에는 다 있는 거라 하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까지 몰랐던 사항 아닌가.
지금까지 텅텅 비어있었던 술 창고가 이번 일로 완벽하게 채워졌단 말을 시녀장에게 전해 들으며 나는 고개를 마구마구 끄덕여댔다. 술로 가득 메워진 창고가 너무너무너무 맘에 들었다. 가슴이 뿌듯할 정도로.
그리고 지금 나는, 내가 정성스럽게 꾸미고 심은 엄마의 꽃 '텔' 정원에 마구잡이로 누워있었다. 내 등에 깔린 텔들이 조금 불쌍하기도 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이 정원 한쪽 부분에 피아노를 놓고 축소화 마법을 풀었다. 그리고 준비한 술병 중 한 병을 따 병째로 퍼 마시며 피아노를 치고 정원을 구르고 맘껏 노래를 불러댔다. 그런 내 모습은 시녀장이 보았을 때 거리의 미친년과 다름없었으리라.
"조~~~오타!"
술 취한 내 목소리가 정원을 쩌렁쩌렁 울렸지만 어떠랴. 이 별장 안에서는 그런 내 행동을 터치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난 이 알딸딸함이 미치도록 맘에 들었다. 이게 현실도피성 증상이라 해도 상관없다. 이렇게 좋은 술 고급스러운 술을 이곳을 떠나게 되면 언제 또 마셔볼 수 있겠는가? 다시 평범한 평민으로 돌아갔을 때 내 돈 주고 사 마실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 즐길 수 있을 있을 때 맘껏 즐기자 싶다.
혼자 꺅꺅 거리고 꿀꺽꿀꺽 술을 마셔대고 다시 또 꺅꺅 거려대고. 저 멀리서 그런 내 상태를 확인하러 왔던 시녀 한 명이 고개를 저으며 돌아가는 뒷모습이 얼핏 눈에 잡혔다. 그 모습이 웃겨 나는 또 깔깔거리며 웃고 말았다.
이렇게 웃어본 것이 얼마만인가 싶다. 대자로 뻗어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풀어놓고 마음껏 자유를 만끽했다.
"정말 좋다."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노란 피아노가 옆에 있고, 사랑하는 꽃들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다. 위에는 사랑하는 엄마의 색인 하늘색이 펼쳐져 있고, 그 색과 같은 향기가 내 몸 가득하다. 지금 난 완벽히 행복한 상태였다. 이토록 사랑하는 것들에게 둘러싸여 충만해진 감정을 행복이 아니면 뭐라 부르겠는가?
"아, 그러고 보니, 아빠……아빠의 것이 없네."
아빠가 들으면 서운해 하겠다.
나는 작게, 내게도 들리지 않을 말을 중얼거렸다.
"아빠, 아빠, 아빠."
미안해, 아빠. 나한테 아빠의 흔적은 정말 거의 없구나. 엄마도 아빠도 닮지 않은 나. 그나마 아빠보다는 엄마를 닮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건 순전히 엄마와 같은 머리색 때문이다.
"그럼 피아노로 해야겠다. 아빠의 것은 앞으로 피아노야."
엄마와 함께 치던 피아노. 소파에 앉아 그런 엄마와 나를 바라보던 아빠의 얼굴. 그게 전부일 지라도 앞으로 난 피아노를 보면 아빠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갑작스럽게 모든 걸 빼앗기고, 미처 소중한 추억을 챙겨오기도 전에 배롤린 남작에게 휘둘려야 했던 내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고 난 후 엄마 아빠와 살던 집으로 찾아가 보았었다. 하지만 그 곳엔 이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살았었던 집은 이미 허물어지고 없었다. 대신 새로운 집이 그 곳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세상에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사라졌다는 지독한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아, 날씨도 좋고 바람도 좋고 기분도 좋다."
바람결에 전해오는 텔의 향기도 좋고 술 냄새도 좋고. 갑자기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아름다운 기분이 되려한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삼키고, 떼굴떼굴 구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그대로 누워있었다. 아마 맘껏 떼굴떼굴 굴러댔다간 그동안 내가 정성껏 가꾼 '텔'들이 사정없이 망가질 테지.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들뜬 정신을 애써 가라앉혀야 했다. 이미 내 등에 깔린 텔들아, 너희들에겐 미안하구나. 등에 깔린 가엾은 텔의 새싹들도, 싹을 틔어보지도 못하고 스러진 종자들도, 모두모두 미안하다. 그래도 이 언니가 지금 무척이나 행복하니 좀 봐주지 않겠니?
"킥킥."
"미친."
그렇게 생각하며 혼자 음흉한 웃음을 흘려대고 있는 내 귓가에 그런 내 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해주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만 슬쩍 돌려 내가 대자로 누운 곳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나를 삐딱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는 레니를 발견하고는 술병을 쥔 손을 격렬히 흔들어주었다.
"내가 술꾼을 만들어 놨구만."
"킥킥. 이 술 맛있다."
"정말 미쳤니?"
"이 술 진짜 맛있는 거라니까. 그 남자가 최고급으로 보낸 거야."
"그 남자? 공작님?"
레니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쪽으로 조심스레 다가온 레니가 내 손에 든 술병을 가만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 퍽 주저앉아 머리를 잡고는 끙끙거려대는 것이 아닌가! 그 일련의 작태를 보아하니 레니 저 계집애는 지금 술에 대한 유혹을 떨쳐내기 위해 발악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레니의 고뇌에 나는 악마의 미소를 흘리며 슬쩍 레니의 손에 술병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유혹을 참고 있는 어린양에게 금단의 과실을 꺾을 수 있도록 달콤하디 달콤한 말을 건네었다.
"레니야. 한 모금만, 한 모금만 마셔봐."
"……아, 안 돼."
"아이참. 딱 한 모금만 마셔보라니까. 그 정도는 괜찮잖아, 안 그래?"
"……안, 돼."
"안되긴 뭐가 안 돼. 한 모금, 그 정도는 티도 안 날 것을. 딱 한 모금, 응?"
"딱……한 모금?"
"응. 딱 한 모금. 네 손에 든 그거, 그 술 진짜 맛있어. 끝내줘. 달콤해. 아주."
"정……말?"
멍해진 레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더욱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레니와 마주보고 앉는다.
"딱 한 모금만 마실 건데 뭘 그렇게 망설여. 딱 한 모금만 마실 건데."
"한……모금."
"응. 한 모금. 그 한 모금으로는 취하지도 않아. 물론 이따 집으로 돌아가서 나서 롱아르 백작께 혼날 일도 없고. 걱정하지 마. 딱 한 모금 마시는 건 티도 나지 않을 테니."
"그렇겠……지?"
"물론."
그렇게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어여 마시라는 듯 술병을 쥔 레니의 손을 슬며시 들어 술병이 그녀의 입에 닿게끔 가져다주었다.
"향기를 맡아봐. 정말 끝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