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3 회: #3 -- >
"진, 진짜 마셔요?"
"빨리 좀 마시지? 술 냄새 고약하니까."
"아."
그 말에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지금 내게서 나는 술 냄새가 얼마나 고약한지는 나도 짐작이 가능하니까. 시녀들이 코를 쥐어 잡았던 그 모습만 떠올려도 충분히 알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생각하니 참 민망하군. 흠흠. 내가 이런 꼴불견을 이 남자 앞에서 내보일 줄이야.
하지만 입에서 나는 술 냄새는 그렇다 쳐도, 실은 속에서 이는 냄새가 내 속을 울렁울렁 뒤집어놓고 있었다. 가만히 손에 쥔 찻잔을 바라보다 나는 조심스럽게 잔을 입에 가져다대었다. 무향의 포션은 물과도 같았지만 이게 물이 아닌 건 나도 잘 안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포션을 한 모금 입에 머금고 넘겼다.
"……."
헐. 이거 뭐야? 이거 포션 중에서도 혹시 상급에 해당하는 거 아냐? 등급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거 진짜 좋은 거다. 그렇지 않고는 한 모금으로 어떻게 몸이 이렇게 상쾌해지고 가뿐해 질 수 있겠는가! 그 뿐만 아니라 울렁이던 속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게다가 정신까지 말짱해지고!
이거 비싼 거다!
그 확실한 사실에 나는 진정으로 마신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남은 포션이 아까워졌다. 이것만이라도 챙겨놨다가 팔거나, 팔지 않는다 해도 나중에 필요할 때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전히 찻잔에 고개를 파묻은 상태로 눈만 굴려 그를 쳐다보자 그가 입술에 웃음기를 머금고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눈치 챈 그가 힐끔 옆쪽을 가리키는 것을 보아하니 마시지 않을 거면 꽃들에게나 뿌리라는 뜻이 분명해 나는 눈물을 머금고 꿀꺽꿀꺽 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마시면서도 나는 생각했다. 미치겠네, 정말.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싹싹 마신 나는 혹여나 찻잔에 묻은 포션이 아까워 혀로 핥아 먹으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아니, 아마 이 남자가 없었다면 혀를 살짝 대 보았을지도 모르겠지만……. 흠흠. 나는 평민이니까. 나 같은 평민은 비싼 거에 예민할 수밖에 없단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이런 생각 정도는 그래, 생각 정도는 그냥 해볼 수도 있지 않겠는……. 크흠.
"몇 병 정도나 여흥으로 즐기셨는지?"
"음, 롱아르 백작께서 138병이라고 하시더라구요."
"하."
기가 찬 듯 나를 쳐다보는 그 시선을 슬그머니 피해 나는 옆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쳐다보았다. 아, 예쁘다. 이 꽃들은 방금 전 자신들이 포션을 마셔볼 기회를 얻었었다는 걸 아려나 모르겠네.
"여자 둘이서 일주일 동안 138병이라."
멋지군. 그가 낮게 읊조리듯 말하며 이번엔 혀를 차댄다. 하지만 이미 백작 가(家)에서 어느 정도 타박을 듣고 왔기에, 물론 레니가 들었지만 서도, 어쨌든 저 정도 타박은 아무렇지도 않다.
"다음에 별장으로 술 150병정도 보내주세요. 특별히 맛있는 걸로 추려서요."
"왜?"
그가 나를 쳐다본다. 쳐다본다고 무섭지는 않다. 하지만 점점 뻔뻔스럽게 그에게 뭔가를 요구해 대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민망해 나는 다시 한 번 슬그머니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목소리만은 태평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연스럽게 내려 최대한 노력해 본다.
"롱아르 백작 가(家)에서 파티를 한 번 벌였으니 그 보답으로 별장에서도 한 번 벌여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롱아르 백작 가(家)에서 마신 술들, 꽤나 좋은 것들이었던 것 같은데 공작 가(家)가 거기에 밀려선 체면이 서질 않지요. 그러니까 좋은 걸로 보내주세요."
"또 마시겠다?"
"원래 술은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거라구요."
"누가 그래?"
"모르겠어요. 그냥 어디선가 그렇게들은 것 같아요."
"술꾼 나셨군."
그다지 맘에 들진 않는 듯 고갤 흔들어댔지만 그래도 술을 보내주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보내주겠다는 뜻이겠지? 사실 그렇게 마시고 또 술판을 벌일 생각이 드느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진심으로 레니와 벌였던 그 술판을 꽤나 맘에 들어 하고 있었다. 장소가 주점이었으면 오히려 그렇게 즐겁지 않았을 거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안전한 장소에서 나름 안전하게 행패를 부렸다 할 수 있겠다.
술판을 한 번 더 벌여?
나쁘지 않지. 레니를 불러 다시 한 번 광란의 술판을 벌이든 아님 그저 기분에 따라 가끔 한잔씩 마시든, 혼자 쓸쓸할 때 한잔씩 마시든 어쨌든 나는 술이란 놈이 제법 맘에 들었다. 그 알딸딸함이 나쁘지 않다. 어쨌든 술 맛 제대로 들어버린 탓에 앞으로도 종종 술을 찾을 것 같다는 확신 아닌 확신이 든다. 그러니까 별장에 술이 넉넉히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산책 좀 할게요. 포션 덕분에 육체는 괜찮아졌지만 정신은 아직 숙취 중이거든요. 바람 좀 쐬고 싶어요."
"아아."
내 말에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는다. 허락하듯 끄덕이는 고갯짓에 찰랑거리는 그의 황금빛 머리칼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환한 햇살아래의 그는 마치 세상의 모든 사랑을 받는 이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저리도 잘난 인간이니 사람들이 그리고 꺅꺅 소릴 질러대는 거겠지. 이 남자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사람들은 집중하고 이 남자가 걷는 그 길조차 사람들은 경외한다. 나는 롱아브 백작 가(家)에서 나와 젠 경이 주고받았던 대화를 눈 한번 깜빡하지 않은 상태로 주시하고 있던 롱아르 백작부인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내 웃음에 그의 오른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지만 굳이 왜 웃는지 묻진 않았다. 그저 보석보다 더 화려한 그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내 얼굴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보세요, 대단하신 공작님. 며칠 전 당신과 나를 주제로 레니가 어떤 질문들을 했는지 아시나요?
아마 당신은 상상도 못할 테지. 아니, 상상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술에 미쳐있던 내 망할 입이 어떤 말을 지껄여댔는지는 꿈에도 모를 거다. 사생활 중에서도 가장 은밀하다는 그 사생활이 누군가에 의해 노골적으로 까발려졌다는 걸 당신이 알게 된다면, 당신은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나는 그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왠지 이 남자 모르게 악질적인 일을 한 것과도 같은 이상한 쾌감이 몰려왔다. 그런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그의 눈빛에 날카로운 이채가 스쳐지나간다. 그 눈빛을 잠시 마주보다 나는 고갤 살짝 숙이곤 남자의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책은-."
"네?"
"산책은 빨리 끝내는게 좋겠군."
무슨 소리?
돌아보자 편안히 의자에 기대앉은 상태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몸짓이 참으로 나른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도 그는 고양이라기 보단 한 마리의 섹시한 표범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품어져 나오는 강렬한 존재감. 그러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남자가 내 입술보다 훨씬 더 예쁜 입술로 씨익 웃었다.
"사달라고 해서 친히 축소화 마법도구도 사주고 내가 준 보석들도 죄다 되찾아줬는데 감사의 표시는 해야 하지 않겠나?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대는 한마디 말도 없이 롱아르 백작 가(家)로 날아가 일주일 동안 나를 내팽개쳤더군. 그런데다 들려오는 소식엔 술판이 벌어져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단 재미난 것들뿐이고 말이지."
"……."
"겨우 찾아와 눈앞에 앉혀 놓으니 술판이 맘에 들었는지 별장으로 술을 보내 달라? 하하. 보내주지. 기가 막히게 좋은 것들로 추리고 추려서 150병이 아니라 그 배로도 보내주도록 하지."
"아, 고마워요."
나는 냉큼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무래도 내가 이 말을 하지 않아 이 남자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 같아서. 하지만 내 인사에 그의 미소는 더 짙어지기만 할 뿐이다.
"감사의 표시 정도는 제대로 해줬으면 좋겠는데."
"방금 말했는데요."
"어린앤가? 난 말로 하는 감사엔 별 관심 없다."
"……."
'그 대가'를 말하는 소리냐? 하여간 나한테 네 놈이 바라는 게 그거 말고 또 뭐가 있겠냐? 징그러운 놈.
이 남자가 계산에 빠삭하단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사달라고 하면 사준다는 그 달콤한 말에 뒤는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는데 그것도 저 남자는 보답을 해야 하는 거라고 말한다. 치사하고도 치사해라. 그럴 거면 처음부터 공짜는 없다고 눈치라도 줄 것이지. 이제와 대가를 바라는 저 심보는 대체 무어란 말인가? 요구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쉽게 사 달라 말하지 않았을 거다. 당연하지. 내가 무슨 능력으로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함부로 나서겠는가? 하지만 고스란히 당할 순 없단 생각에 입을 열었다.
"치사하게 굴지 마세요. 그렇게 나오실 생각이셨으면 진작 말씀을 하셨어야죠. 그러니까 축소화 마법도구랑 술 보내달라는 건 이렇게 치사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 제가 먼저 요구한 거니까 웬만하면 계산에서 좀 빼주세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공작님께서 다시 찾아주신 보석들은 제가 요구한 것들이 아니라 공작님께서 멋대로 찾아서 보내주신 거기 때문에 그것들과 관련된 계산도 옳지 않습니다."
"멋대로?"
"아, 물론, 감사하게 생각해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말은요, 그건 제가 요구한 것들이 아니라는 거죠
이놈아, 이상한 곳에 초점 맞추지 마라. 지금 중요한 단어는 '멋대로'란 단어가 아니라 내가 요구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니까.
"그럼 내가 다시 내어 놓으라 하면 내어 놓을 건가?"
"한 번 준 것을 다시 뺏는 옹졸함은 대체 언제부터 생기셨대요?"
날카롭게 쏘아주자 그가 하하하 웃어댄다.
사실 그가 맘만 먹는다면 지금까지 내게 줬던 모든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가져갈 수도 있을 거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입만 방긋거리며 두 눈 멀쩡히 뜨고 모든 것을 빼앗길 수도 있겠지. 어차피 나는 그의 상대가 되질 못할 테니까. 지금 이런 말들도 내 투정을 그가 받아주고 있는 것에 불과하단 것을 잘 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일이 틀어지기 전에 나는 저 남자에게서 벗어나야 했다. 내게 불리할 땐 도망가는게 최고다. 왜 사람들은 도망가는 것을 비겁하다고만 생각하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다. 때론 도망치는 것이 가장 좋은 공격이 될 수도 있는 건데.
그렇게 도망치듯 다시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내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넌 역시 재밌어."
"공작님이라도 재미있어서 다행이네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하지만 나는 분명히 알고 있는 것, 이 남자가 나를 자기의 곁에 둔 이유. 그건 바로 내 반응이 재미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당신이라도 재미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런 내 뒤로 이젠 제법 멀리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행동을 분명히 하라 했나?"
"……."
"난 앞으로 그리할 생각이야."
"……."
"산책 잘 다녀오지. 가급적 빨리 돌아오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생각했다. 가급적 늦게 가리라고. 이 거대한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를 한 바퀴 돌기만 해도 내 계획은 성공할 수 있는 것이기에 나는 정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돌려 보이지도 않는 성벽을 향해 걸어갔다. 계획 없이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다 보면 아마 날 찾기도 쉽지 않을 테지.
하늘이 참 노랗다.
날이 흐려서 노랗게 보이는 건지 아니면 술의 영향이 머리에까지 미쳐 내게만 노랗게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 이 순간에는 하늘이 저 위가 아닌 내 머리카락에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이 세상에서 파랗게 빛나고 있는 건 오직 내 머리카락, 머리카락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