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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42화 (42/206)

< -- 42 회: #3 -- >

하아.

나는 일부러 그런 그 둘을 모른 척하며 젠 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레니의 어머니한테 신경을 곤두세울 수도 없는 일이고 무엇보다 나는 진심으로 공작성이 아닌 별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젠 경은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공작님께서 포션을 준비해 두라 명하셨습니다. 가시면 아가씨의 상태에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치 내 상태가 메롱 이라는 것을 알고 준비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젠 경의 말에 백작부인이 저도 모르게 어머! 소리 내더니 자기 소리에 자기가 놀라 손으로 재빨리 제 입을 가렸다.

하지만 내 귀에도 들린 것이 다른 사람들 귀에 안 들렸으랴. 숙취로 고생하는 나를 위해 공작이 포션을, 그것도 무려 그 비싸다는 포션을 준비해 두었다는 말은 이제 곧 사교장에 새 이슈로 떠올라 사람들의 입 사이로 널리널리 전파될 거다. 물론 백작부인의 입이 조금만 무겁다면 조용히 가라앉을 수도 있는 이야기고.

포션,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단어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포션 얘긴 못들은 척 해야 했다.

"전 별장에 가서 편하게 쉬고 싶어요."

"별장보다는 공작성이 여기서 훨씬 더 가깝습니다, 아가씨."

"그래도 맘 편한 별장으로 가고 싶다고요."

"공작님께서는 아가씨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 하십니다. 아마 아가씨께서 멀쩡하다는 걸 확인하신다면 그 땐 아가씨 뜻대로 해주실 겁니다."

"어머머."

이번엔 대놓고 백작부인이 감탄해 주신다. 나는 씰룩대려는 입가에 힘을 줘 꾹 참으면서 젠 경을 노려보았다.

당신도 참 눈치 없어. 안 그래?

"……."

하아. 그래, 애초에 내가 말로 저 남자를 이긴다는 건 말도 안 되지. 말 수 없는 사람이면 말 수 없는 사람답게 굴면 좋을 텐데 젠 경은 말 수가 없는 대신 한 마디 한 마디가 논리정연, 반박불가다. 나는 여기서 계속 버티다가는 백작부인에게 재미난 이야기 거리만 제공하겠다 싶어 어쩔 수 없다는 듯 거칠게 고갤 끄덕였다. 내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사교계에 내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거리는데 이야기 거리를 제공해준다면 그 시끄러움이 배가 될 것은 자명한 일. 이럴 줄 알았으면 공작 가(家) 마차에 올라선 뒤에 반항 할 걸 싶다.

어쨌든 내가 고갤 끄덕이자 젠 경은 내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롱아르 백작을 쳐다보았다. 젠 경의 시선에 롱아르 백작이 다시 한 번 크흠, 크게 어색하기 짝이없는 헛기침을 해댔다. 나는 롱아르 백작 역시 백작부인 못지않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으며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실례 많았습니다, 롱아르 백작님, 롱아르 백작부인, 롱아르 공자."

이곳을 조금이라도 빨리 뜨고 싶었다. 내가 재빨리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며 마지막으로 레니를 쳐다보았다.

"나중에 봐, 레니."

"으응. 그래. 내가 찾아갈게."

더듬거리며 말하는 레니에게 고갤 끄덕여주고 나는 젠 경에게 얼른 떠나자고 눈치를 팍팍 주었다. 융통성은 완전 제로지만 눈치는 괜찮은 젠 경이 재빨리 롱아르 백작 가(家)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우린 서둘러 응접실을 나왔다. 마차로 걸어가는 내내 젠 경의 뒤통수를 쏘아보았지만 내 시선 따위에 젠 경이 겁먹을 일은 없겠지. 그래서 나는 마차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반항을 해보았다.

"정말 별장으로 가면 안 되나요?"

"……."

나는 마차에 올랐다. 조용히 마차 문이 닫히고 곧 부드럽게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공작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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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나의 짜증을 그 남자 말고는 어디에 풀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성격이 못돼졌어, 유니시이나. 하지만 그 남자가 자꾸 이상한 짓을 하는 걸 어떡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그런 내 상태에서 그 남자에게 좋은 소리가 나갈리 만무하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평소와는 다르게 정원으로 안내된 나는 티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절로 이가 갈리는 심정이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내 얼굴을 보자 씨익 웃는데 그 얼굴이 얼마나 얄밉던지. 웃을 때마다 살짝 접히는 고운 눈매가 환상적으로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과 비례해 내 짜증은 한 폭 더 상승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불만이 가득한 걸음걸이로 그에게 다가가 앞에 놓인 의자에 거칠게 앉았다. 다행이 좋은 의자라 그런지 엉덩이가 아프진 않았다. 내가 앉자 시녀 한 명이 내 앞에 냉큼 차를 내려놓는다. 하지만 이미 롱아르 백작 가(家)에서 차를 마시고 왔기 때문에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았다.

"마시지."

"차 마시고 왔어요."

"차 아니야."

"그럼요?"

"포션."

날씨가 참 맑다고 말하는 것처럼 태평한 어조로 그가 말했기 때문에 나는 몇 초간 그냥 멀뚱멀뚱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 몇 십초 후에 입력된 단어에 화들짝 놀라자 그가 반응이 늦군, 이라고 중얼거린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말하건 말건 지금 중요한 건 내 반응 따위가 아니잖아! 이게 대체 뭐라고? 나는 절로 높아진 목소리를 채 가다듬지 못한 상태로 소리쳤다.

"포션이요?"

새된 내 목소리에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긁어댔다. 어쩜 저 남자는 저런 모습도 괜찮은지……아니, 이게 아니고. 나는 고개를 숙여 내 앞에 놓인 말간 액체를 쳐다보았다. 미친. 절로 욕이 나온다. 욕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이건 완전 돈지랄이다. 이 말 밖에는 할 수가 없다.

"차에다 포션을 조금 섞은 거겠죠?"

"아니."

"섞은게 아니라고요? 이게 다 포션이라고요?"

"말 많군."

"돈이 그렇게 많아요?"

"많아. 그러니까 걱정 말고 마시지."

"……."

이보세요, 당신 돈 많은 거 모르는 사람 없거든요? 지금 그런 긍정의 대답을 듣고자 제가 물어본게 아니란 걸 알면서 왜 그러세요?

하고픈 말은 많지만 속도 안 좋고 머리도 어지러운 관계로 나는 가만히 화를 다독거렸다. 진정하자, 유나야. 진정하자. 이 남자 앞에서 흥분해봤자 너만 손해다. 상태가 최상일 때도 당해내질 못했는데 지금 이 상태론 말할 것도 없잖아. 안 그래?

애써 내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는 그런 내 귀로 여전히 태평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젠이 이미 말하지 않았나?"

무슨 말? 당신이 날 위해 포션을 준비했단 말?

"……듣기야 들었죠."

하지만 그는 준비했다고는 했지 이렇게까지 돈지랄을 할 거라곤 말하지 않았다.

"그럼 얼른 마셔."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문제될 것 없다는 표정으로 친히 내게 잔을 밀어주시기까지 한다. 내가 대놓고 기가 막힌다는 시선으로 쳐다보든 말든 어쨌든 그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내게 내밀어진 잔을 내려다보았다.

"……."

정말 심장 떨려서 못 마시겠네.

이 남자가 포션을 준비했다는 말에 롱아르 백작부인이 놀란 대에는 이유가 있다. 숙취로 포션을 사용하는 사람은 황족이나 극소수의 고위관직인 사람들, 그러니까 눈앞의 이 남자와 같은 사람들을 제외하곤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방울 한 방울이 금덩이의 가치를 지닌 포션을 고작 숙취 해소 따위로 사용하기는 너무너무 아깝기 때문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지독한 숙취 때문에 견디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포션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차에 한 두 방울 정도 떨어트려 마시는 방식을 취하지 이렇게 찻잔 가득 포션을 담아 마시진 않는다. 아마 이렇게 포션을 마시고 숙취를 해소했단 소리가 퍼지면 사람들은 뒷목을 잡고 쓰러질지도 모르지.

나는 찻잔 가득 넘실거리는 포션을 질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게 대체 얼마야? 차라리 이 포션 그냥 이대로 나주면 안 되려나? 그럼 지금 마시는 대신 고이 간직해서 나중에 돈이 급할 때 팔아버리리라. 오히려 이건 마셨다간 체할 것이 분명하다. 금덩어리를 그냥 마셔버리다니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냔 말이다.

그런 내 심정을 눈치 챘는지 웃음기 가득한 그의 목소리가 내 귀를 강타했다.

"그냥 마시지 그래? 안 마실 거면 옆에 수두룩하게 핀 네가 좋아하는 꽃들에게나 뿌려주던가."

"하."

뭐, 뭐라고? 꽃들에게나 뿌려?

이제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말문이 다 막힌다. 나도 모르게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얼이 빠져 멍하니 그저 그를 쳐다보고 있는 내 꼴에 그가 정말 이 황금덩어리 포션을 꽃들에게 뿌려버릴 심산인지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채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그의 마수로부터 포션을 지켜내기 위해 잔을 들고 몸을 뒤로 휙 뺐다. 그러자 그가 웃겨죽겠다는 듯 웃어댔다. 그래봤자 겉으로 봤을 땐 입가의 미소가 좀 더 진해지고 웃음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을 뿐이겠지만.

그건 그렇고. 아무리 내가 꽃을 사랑한다 해도 이건 아니지 않나. 그 정도 이성과 판단력은 상태가 메롱인 지금 이 순간에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옆에 핀 사랑스럽고 향긋한 꽃들은 이미 충분히 싱싱하기 때문에 굳이 포션 따위가 필요해 보이지 않는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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