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41 회: #3 -- >
"설마, 백삼십 병?"
"정확히 138병이다!"
"헉."
"……."
참을 수 없다는 듯 터져 나오는 롱아르 백작의 목청에 우리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너를 대체 어쩌면 좋니, 라는 시선으로 레니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랑살랑 저어대는 롱아르 백작부인의 얼굴도 보이고, 정말 어이없어 죽겠다는 시선으로 제 누나를 쳐다보는 레이준 공자의 얼굴도 보이고, 그리고 지금까지 용케 냉정을 유지했다 싶을 정도로 울긋불긋 열이 달아오른 롱아르 백작의 얼굴도 보인다.
나는 눈을 떼구르르르 굴렸다. 138병이라……. 그 기막힌 병수에 나 역시 놀랐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놀라지 않을 수 없지. 138병이라니, 138병. 비록 하루 만에 마신 것이 아니고 일주일동안 마셨다지만, 게다가 혼자 마신게 아니라 둘이 마셨다지만 또한 술 취한 사람들답게 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테이블 위라던가 베개에 널브러진 양도 장난 아니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138병이면 한 사람당 69병이요 하루 평균 9.8병이다. 어떤 사람은 9.8병이 뭐가 그리 대수냐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린 술을 처음 마셔본 사람들이다.
레니야, 넌 좀 혼나겠구나. 그런데 미안하다. 나는 가련다.
아무리 적당한 타이밍을 재보려 해도 도무지 그런게 뭔지 모르겠다. 평소에도 그리 똑똑하지 못했던 내가 이 순간 갑자기 똑똑해질 수 있을 리는 없다.
그냥 일어서자.
다 집어치우고 일어날 심산이었다. 물론 상당히 예의 없는 행동이기는 하겠지만 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가주는 편이 이들에게도 편할 것이 틀림없다고. 때문에 그런 내 무례한 행동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내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뭣 하러 술을 그리도 퍼마신 게야? 응?"
"아니, 그게."
"이제 곧 시집갈 아이가 왜 이런 철없는 짓을 하는 게냐? 응? 대체 왜?"
"그러니까 시집가기 전에 기념으로."
내가 봤을 때 롱아르 백작은 아직까진 화를 참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눈썹을 봐도 알 수 있다. 더는 고민 끝. 이제 진짜 일어나자. 더 이상 같이 있을 수 없을 것 같음을 짐작하고 내가 입을 열었다.
"저기 백작님-."
"백작님. 젠 류우신 부단장님께서 오셨습니다."
하지만 집사에 말에 막혀버려야 했다. 꺼내려던 말을 꿀꺽 집어 삼키고 나는 집사를 쳐다보았다.
대체 언제 들어온 거야? 아니 지금 그것보다 집사가 방금 뭐라고 했지? 지금 누가 왔다고? 젠 류우신 부단장? 젠 류우신 부단장이면 젠? 젠 경? 젠 경이 왔다고? 왜? 젠 경이 이곳에 왜?
물론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와 롱아르 백작 가(家)의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다. 아, 물론 레니가 알려준 일이다. 난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가 어느 가문과 친분이 있는지 등의 여부 따윈 잘 모른다. 레니에게 그 사실을 전해 듣고 내가 생각한 것은 단 한가지였다.
아,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와 롱아르 백작 가(家)의 사이가 좋은 편이라면 레니와 내가 어울리는 것에 대해 백작이 심하게 제재하지는 않겠구나, 다행이다, 라는 것. 그 뿐이었다.
그 뒤로는 그저 두 가문 사이는 좋은 편이다, 정도만 내가 알고 있는 전부다. 그렇기에 왕래가 있다 해도 그게 놀랄 일이라던가 이상한 일이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휴가 갔다 온 백작 가(家)를 바로 찾을 만큼 돈독한 줄은 몰랐더랬다.
"모시게."
갑자기 찾아온 알브레히트 가(家) 사람의 방문에 롱아르 백작도 의아해하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백작은 힐끔 나를 쳐다보고, 레니에게 폭발시키려던 화를 가라앉히고는 자리에 일어섰다. 백작의 명에 집사가 조용히 나가더니 곧 젠 경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앉아있던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연히 나도 덩달아 일어섰다.
"부단장님을 뵙습니다."
젠의 모습에 레이준 공자가 즉시 인사를 건넨다. 그 절도 있는 모습에 나는 레이준 공자가 황실 기사단에 입사한 능력 있는 기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자기와 더 비교해가며 롱아르 백작이 자꾸 못살게 군다며 구시렁거렸던 레니의 모습도.
레이준 공자의 인사에 젠 경이 가만히 고갤 끄덕였다. 그런데 젠 경이 부단장 이였나? 황실 기사단의? 황실 무슨 기사단? 사실 나는 젠 경이 부단장이었단 것도 몰랐다. 그저 그 남자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방금 전 집사가 그리고 레이준 공자의 인사가 아니었다면 내가 루스벤 제국을 떠나는 그 날까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젠 경은 귀족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단의 부단장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건 그만큼 그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툭하면 나를 데리러 오는 일 따위를 하는지 모르겠다. 비록 공작이라는 그 남자의 심부름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심부름은 젠 경이 할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귀족은 아니라 해도 기사가 된 이상 그만한 작위를 받았을 사람이 일개 심부름이나 하고 있다니. 대체 그 남자는 사람을 어떻게 써 먹는 거야?
이런 내 궁금증과는 무관하게 젠 경은 들어오자마자 롱아르 백작 부부에게 절도 있는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실례하겠습니다, 롱아르 백작님. 롱아르 백작부인."
"아니, 실례는 무슨."
젠 경은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의 사람이다. 그것도 아주아주 밀접한 최측근.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백작이 젠 경의 방문을 꺼리거나 싫어할 리 없지.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상관없다는 듯 호쾌한 웃음을 짓고 있는 백작의 얼굴에 방금 전까지 레니에게 가득 품었던 역정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런 백자의 환대에 젠 경이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여기 앉게나."
롱아르 백작이 비어있는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젠 경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공작님의 명을 받고 아가씨를 모시러 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롱아르 백작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를 쳐다보았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점심을 함께 하시자 하십니다."
그 말에 이제 응접실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로 향했다.
"……."
설마 설마 했던 것이 사실일 줄이야. 사실 젠 경이 왔다는 말에 설마 나 때문에 온 것은 아니겠지 생각하고 있었더랬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여기가 별장도 아니고, 저렇게 대놓고 나를 찾을 리는 없어.
하지만 그는 날 찾았고 그 증거로 젠 경은 이곳 롱아르 백작 가(家)로 날 데리러왔다.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남의 시선 따위 의식할 여유도 없이 내 기분은 사정없이 망가져갔다.
그 남자,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 남자가 나를 부르는 목적이란 단 하나뿐이건만 점신은 무슨 얼어 죽을 점심이란 말인가. 대놓고 정부 일을 해라, 라고 말할 수 없으니 그럴싸한 점심식사로 포장해 대는 걸까? 그게 그렇게도 급해?
급할 수는 있다 쳐도. 대체 왜 별장도 아닌 이 롱아르 백작 가(家)까지 젠 경을 보내는 짓 따위를 하는 건지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 집에까지 사람을 보내 자기의 정부를 찾는 공작? 사교계의 개들이 떼거리로 몰려들 것이 분명한 소식이었다. 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슈거리란 말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이는 건데?'
날 골탕 먹이고 싶었다던가, 창피를 주고 싶었다면 그 의도는 참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화가 났다.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가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대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댔다. 젠장. 욕 하고 싶을 땐 맘껏 욕해야 스트레스가 풀리는데!
하기야 그 남자가 사람들이 뭐라고 지껄여 대든 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상관없어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신경도 안 쓰지. 그래서 이런 망할 짓을 하는 건가?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다르지 않겠느냔 말이다. 나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그 것도 재수 없는 날벼락. 고래 장난에 혼자 등까지 터진 새우란 말이다. 아아, 이래서 잘난 인간들이 싫다니까.
평소 같으면 그의 단 한명 뿐인 정부답게 군소리 않고 그냥 갔을 거다. 그게 이곳에서의 내 역할이니까. 하지만 지금 나는 속도 안 좋고 머리도 아프고 아무리 깨끗이 씻었다지만 속에서 올라오는 알코올 냄새 때문에 어질어질하다. 쉬고 싶다. 별장으로 가서 맘껏 자고 일어나고 싶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공작성에까지 가서 당신의 욕구에 맞춰줄 상태가 아니라고!
나는 고개를 휙 돌려 레니를 쳐다보았다. 레니는 갑작스런 내 시선에 놀란 듯 눈을 뜨며 입을 열려했지만 내가 더 빨랐다.
"레니. 나 마차 빌려줘."
"으응?"
"마차 좀 빌려달라고."
"아, 그래. 그런데, 그치만……."
마차를 빌려달라는 내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대체 그게 너한테 왜 필요하냐는 눈치다. 하긴, 젠 경이 공작 가(家)의 마차를 끌고 왔으니 롱아르 백작 가(家)의 마차는 필요 없어 보이긴 했다. 적으로 겉으로는 말이지. 하지만 나는 그런 레니의 시선은 무시하고 이번엔 젠 경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공작께는 점심은 다음에 했으면 좋겠다고 전해주세요. 저는 그냥 롱아르 백작 가(家)에서 빌린 마차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
"지금 제 상태가 심각하게 메롱이거든요."
"크흠흠."
내 말에 롱아르 백작이 과도하게 헛기침을 해댄다. 하긴, 내가 그 남자에 관한 무슨 말만 하면 주위 남자들은 대개 롱아르 백작과도 같은 반응을 보이곤 했었다. 억지로 하는 저런 헛기침이나 혹은 시선을 돌리거나 그도 아니면 멍하니 나를 쳐다보거나. 가끔은 그런 내게 건방지다며 화를 내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하지만 여자들의 반응은 남자들과는 사뭇 다르다. 대부분 여자들은 내가 공작과 무슨 얘기라도 하면 눈빛을 과도하게 빛내거나 안보는 척 하며 힐끔힐끔 쳐다본다거나 나를 죽여 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쏘아보거나…….
대부분의 미혼 여자들은 쏘아보는 쪽이겠지만 또 대부분의 유부녀들은 눈빛을 과도히 빛내는 쪽이다. 지금도 봐라. 백작부인 역시도 나를 쳐다보며 과도하게 눈빛을 빛내고 있지 아니한가. 저 반짝이는 눈빛은 젠 경과 내 대화를 유추하여 나와 공작의 관계를 마음껏 그리고 있는 중이라는 소리. 레니야 말할 것도 없지. 저 기집애는 밤 이야기까지 낱낱이 해달라고 조르기까지 하는 앤데. 아니 협박하는 앤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