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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40화 (40/206)

< -- 40 회: #3 -- >

"레니, 이쪽으로 오너라. 배롤린 영애도 여기로 오시게나."

흐음, 베롤린 영애라.

나는 오랜만에 듣는 그 호칭에 잠시 눈을 굴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긴, 법적으로 나는 그 남작의 양녀가 맞다. 그러니 배롤린 영애라 부르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팔아먹기 위해들인 양녀. 새삼 그 사실을 절절히 깨닫게 만들어주는 그 호칭에 나는 처음으로 레니의 가족들이 오기 전에 롱아르 백작 가(家)를 떠나지 않은 내 행동을 절실히 후회했다.

"네."

레니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하며 내 손을 잡은 채 소파로 이끌었다. 우리는 비어있는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가 앉자 롱아르 백작 가(家)의 집사가 재빨리 우리 앞으로 차를 가져다주었다.

아, 히비스커스다!

집사가 가져온 차가 뭔지 안 나는 그 차에 반색했다. 루비 빛 아름다운 색의 히비스커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개운하게 만들어주는 상쾌한 차다. 나는 재빨리 잔을 들어 히비스커스 한 모금을 입 안에 머금었다. 신맛이 강하게 올라온 것을 보아 꿀을 섞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허브 차에 다른 것을 섞어 마시는 것보다 원색 그대로를 즐겨 마시는 편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맛이 더 좋았다. 하지만 레니는 그런 내 입맛과는 다른 모양인지 슬그머니 눈썹을 일그러트린다. 술은 벌컥벌컥 잘도 마시면서 고작 차가 쓴 정도로 저렇게 인상을 찌푸리는 레니가 참 웃겨보였다.

"지난 일주일간 둘이 마신 술병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그런 우리를 가만히 쳐다보던 롱아르 백작이 입을 열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딱히 대답을 내게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나는 가만히 앉아 히비스커스만 홀짝여댔다. 어째 방금 전까지 술 마시다 와서 그런지 차를 마시는 데도 술을 마시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반면 레니는 자신의 아버지의 말에 어깨를 흠칫 떨더니 애써 배시시 웃어보였다. 그냥 좀 넘어가 주셨으면 하는 애교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백작의 표정은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아마 그냥 넘어가진 않으려나보다. 레니도 그렇게 깨달았는지 곧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열 병정도요?"

"열 병?"

……레니야. 암만 그래도 너무 적게 잡았다. 우린 잠자고 씻는 시간을 제외하곤 심지어 식사를 안주로 때울 만큼 술을 거나하게 마셔댔단 말이다. 웃기지도 말라는 듯 백작의 반문에 레니도 자기가 내뱉은 말이 어이없었는지 다시금 입을 여는데 처음 불렀던 것보다 현저히 높은 숫자가 레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50병……정도?"

"50병?"

나름 많이 올렸다 생각하고 답한 레니의 말에도 백작이 코웃음을 치자 레니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그러더니 고개를 휙 돌려 나를 쳐다보는데, 똑같이 술에 취한 내가 레니도 모르는 술병 개수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당연히 나는 나도 모른다는 제스처를 취해주었다. 그러자 레니의 눈에 잠깐 떠올랐던 기대가 사르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순 없지 않은가. 게다가 어른 앞에서 거짓말을 할 만큼 난 대담한 여자는 아니다.

"6……60병이요?"

"……."

"7……70병?"

"……."

"8……80병?"

"……."

10병 단위로 술병 개수가 올라가는데 여전히 백작은 코웃음만 쳐댔다. 우리 맞은편에 앉은 백작부인과 레이준 공자의 얼굴도 점점 험악해져갔다. 그런 그들의 얼굴엔 믿기지도 않는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9……90병?"

"……."

이젠 레니의 얼굴도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레니는 우리가 그렇게 많이 마셨어? 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사실 나도 술병 개수가 점점 올라갈 때마다 좌불안석이었기 때문에, 레니야, 너한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난 도망가련다. 그래도 넌 친 딸이고, 곧 있으면 시집 갈 거고 그러니까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아. 내가 없어도 넌 무사할 거라고.

그런데!

'아, 젠장. 여기 올 때 롱아르 백작 가(家) 마차타고 왔잖아!'

그제야 나는 이곳에 내가 쓰는 마차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불어 별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면 롱아르 백작 가(家)의 마차를 빌려야 한다는 사실도.

'아니, 그냥 나가서 마차를 잡을까?'

그래,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귀족가의 마차보다 훨씬 불편하고 소파도 딱딱하겠지만 마음은 그게 더 편할 거다. 그렇게 결정하자 어떻게 이곳을 벗어날지 다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고민하는 동안에도 레니의 입에선 술병의 개수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9……95병이요?"

"……."

이제 10병 단위가 아닌 5병 단위로 늘어났다. 아무래도 심각한 수준으로 병 개수를 올려놓았기 때문에 거의 우리가 마신 술병 수에 근접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나는 곰곰이 첫날 내가 여기 왔을 때 레니가 으싸으싸 자랑해댔던 방을 머릿속에 떠올려보았다. 테이블에 3병 있었고, 오른쪽 베개 옆으로 술병이 늘어서 있었지. 대략 몇 병 정도였더라?

……그걸 알 리가 없잖아.

나는 곧 포기했다. 단순히 그 날 있었던 술병 개수가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에 시녀들 손에 의해 술을 들여 온 것이 또 몇 번이고 우리가 잠들었을 때 새로 채워졌던 병수가 또 몇 병이었던가. 심지어 시녀들이 몇 번이나 방을 치워줬는지 그조차도 모르겠는데 무슨. 레니나 내가 술병 개수를 맞추는 건 무리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건 방에 들어섰던 시녀들이 한결같이 방 안에 가득한 지독한 술 냄새에 코를 쥐어 잡았다는 것.

"9……97병이요?'

"……."

"9……98병?"

"……."

설마 100병 넘게 마시지는 않았겠지.

레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힐끗 롱아르 백작의 얼굴을 보았다. 펴질 생각이 없는 그 모습에 나는 확신했다.

이런 맙소사, 믿을 수 없어, 제기랄. 100병이 넘었구나!

확연히 느껴지는 술병의 개수에 갑자기 속이 쓰려왔다. 꾸물거리는 뭔가가 속에서부터 올라와 토기가 이는 기분이었지만 히비스커스를 마시며 가라앉혔다. 히비스커스의 신 맛은, 다행이도 내 속에 충분한 도움을 주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은 열기를 잠시나마 잠재워줬으니까.

레니야, 그냥 100병 넘는 개수를 불러라. 그게 더 빠르겠다. 네가 그렇게 천천히 개수를 올리다간 오히려 더 크게 혼날지도 모른단 말이다.

찔끔찔끔 술병 개수를 올리는 레니의 모습에 롱아르 백작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갔다. 자신의 아버지 기분이 점점 더 다운되어가는 걸 레니도 느낀 모양인지 눈을 감고 확 술병 개수를 올려버렸다.

"백, 백십 병이요!"

"……."

"헉!"

하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침묵. 레니의 단말성이 응접실을 울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나조차도. 실은 나 역시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백작 때문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역시도 우리가 마신 술병 개수가 백십 병을 넘겼으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 사실보다 나는 이곳에서 벗어날 방법에 더 골몰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자연스러울까?

내가 빨리 돌아가 주는 편이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더 나을 거라는 건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일 터. 이 어색하고 난처한 분위기 속에서 더는 남아있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어쩌면 내가 간다고 지금 당장이라고 입을 연다면 백작부부는 좋아 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미 호통을 쳐도 벌써 쳤을 롱아르 백작이 아직까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건 나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내가 그들의 눈치를 보듯 그들 역시 내 눈치를 보며 서로가 불편하게 마주 앉아있는 걸지도 모르고. 힐끔 백작부인의 얼굴을 보아하니 역시나 그녀는 내 존재가 심히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 사실이 딱히 상처가 되진 않는다. 내가 레니의 친구이기는 하지만 내 위치는 상당히 애매한 것이기 때문에 백작부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레니와 같이 잘못을 저질렀다지만 레니를 혼내듯이 나를 혼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럴 친분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내 위치라는 것은, 그래, 다시 말하지만 내 위치라는 것이 상당히 애매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오랜만에 뵙는데 이런 상황이라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런 적당한 인사면 되려나?

그래, 그거면 충분하겠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물론 점점 더 사색이 되어가는 레니에겐 조금 미안하지만……솔직히 그만큼 부럽기도 하다. 그래서 사실은 그렇게까지 미안하진 않다.

"백, 백이십 병?"

"……."

"까악!"

이제 레니는 거의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설마, 백삼십 병?"

"정확히 138병이다!"

"헉."

"……."

참을 수 없다는 듯 터져 나오는 롱아르 백작의 목청에 우리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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