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9 회: #3 -- >
"잘- 한다!"
"아, 깜짝이야!"
나와 레니가 방금 전 짠! 하고 부딪혔던 잔을 원샷하고 난 직후였다. 레이준 공자의 고함소리가 들린 것은. 목구멍으로 넘어간 황홀한 그 맛에 감탄하며 캬악~하고 있는 바로 그 때 말이다.
레니와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방문을 쳐다보았다. 언제 열린 건지 모르겠지만 그 곳엔 굉장히 어처구니없단 표정의 레이준 공자가 서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보아하니 그는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장면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니와 나는 누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주위를 힐끔 둘러보았다. 우리가 잠든 사이 시녀들이 열심히 청소하고 치워 줬나보다. 어느새 깨끗하게 치워지고 다시 새롭게 깔린 베개들은 조금도 개판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 물론 이 곳이 늘 깨끗했다는 건 아니다. 나도 양심이 있지. 분명 어제 저녁까지 무척이나 더러웠고 경악스러웠으며 차마 귀족 영애의 방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끔찍했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지금은, 다행이도 지금은 멀쩡해 보였다. 적어도 내 눈에는 말이다.
레니도 나는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레니의 표정에도 이 정도면 무척 괜찮은데 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게다가 아직 시작한지도 얼마 되지 않아 레니와 내 상태는 멀쩡했다. 이것도 물론 우리 기준이겠지만.
"벌써 왔어?"
그런데 어째 말이 어눌하네?
레니는 참 이상하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아직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왜 몇 시간은 퍼부어 마신 사람처럼 억양이 저러하느냔 말이다.
하지만 사실 나는 잘 알고 있다. 내 말도 틀림없이 어눌할 것이라는 것을. 이건 요 며칠 내내 계속 술을 퍼부어 마셔댄 일종의 부작용이라고나 할까? 음, 그래. 일종의 대가라고도 할 수 있겠다. 덕분에 우리는 막 자고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술을 마셔댄 사람들처럼 발음이 어눌했다. 다행인건 딸꾹질은 자고 일어나면 일단은 없어진다는 거다. 그래봐야 술 마시다보면 어느 순간 다시 시작될 것이 뻔했지만. 그래도 딸꾹질마저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어딘가? 잠에서 깨고 나면 딸꾹질 하나는 고쳐져 있다는 것이.
"벌써어? 벌써어?"
레니의 말이 어이없었나보다. 그 얌전하고 얌전하다던 레이준 공자가 이를 갈듯 말을 씹어뱉는걸 보니. 그 억눌린 말에 담긴 노기를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레니와 나는 둘 다 움찔! 놀라고 말았다. 특히 나는 더 놀랐다. 아이고 깜짝이야. 레이준 공자가 이렇게 성질낼 때도 다 있구나.
"아니, 벌써 일주일이 지났나 하고……."
레니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암만 레니라 하더라도 찔리는 것이 있는 이상 마냥 당당하지는 못하리라.
벌써 일주일이란 시간이 지난 모양이다. 처음 레니가 그러지 않았던가. 자기를 제외한 식구들이 라페에 있는 별장에 일주일간 휴식을 취하러 갔다고. 휴식을 취하러 갔던 레니의 가족이 돌아왔다? 그 말은 즉,
"……우리가 일주일 동안 술만 퍼 마셨다는 소리네."
"……그러게."
"……정말 일주일 동안 술만 퍼마실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그러니까."
"난 너희 가족들이 돌아오기 하루 전에는 별장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고."
"응, 나도 보내줄려고 했어."
맙소사. 정말? 믿겨지지 않아. 우리가 일주일동안 단 한 번도 이 방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술만 퍼마셔댔다고?
내가 한 짓이지만 내가 놀란다.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상황을 정리해 보려고 애써보았다. 하지만 정리는 무슨. 이렇게 명확한 것을.
졸릴 때까지 퍼마시고, 졸리면 잠시 기절하듯 잠자고. 다시 일어나서 술 마시며 주정 부리고. 술 냄새가 역겨우면 씻고, 씻고 난 후에는 또 마시며 주정 부리고. 그러다 졸리면 또 자고. 자고 일어나 씻고, 씻고 난 후 또 술 마시고! 지금 이 생활을 일주일동안 했다는! 세상에!
"씻고 응접실로 오시지. 아버지, 어머니께서 기다리시니까."
그 말을 끝으로 레이준 공자는 문을 쾅! 닫고 나섰다. 닫힌 문을 가만히 쳐다보던 나는 고개를 돌려 레니를 쳐다보았다. 레니도 나를 쳐다보았다.
"……."
"……."
"몇 병이나 마셨을까, 우리?"
"글쎄."
딱히 세어보며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겠다. 세어보았다 해도 그 정신에 제대로 세었을 리도 만무하다.
"우리 대단하다."
"응."
인정한다. 우린 대단하다. 진심으로.
"멋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런 미친 짓을 할 수 있는 귀족 영애는 앞으로 쉬이 나오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기에 나는 레니의 감탄에 가만히 동조해주었다.
"……."
"……."
"풋!"
"큭!"
그렇게 가만히 서로를 쳐다보던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하하하하."
아직도 술기운이 가득한 상태라 그런지 웃음소리도 무척이나 우렁찼다. 우린 둘 다 술 취했던 때 했던 것처럼 떼굴떼굴 구르며 마음껏 웃어댔다. 뭐가 이렇게도 웃긴 건지 딱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너무 너무 웃겼다. 너무 너무 신이 났고. 내 인생에 이렇게 웃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나는 웃을 수 있을 때 맘껏 웃자 생각했다.
그래서 정말 맘껏 웃었다. 신나게, 재밌게,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낄낄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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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신나게 웃고 있을 때 시녀들이 들이쳤다. 무척이나 흉흉한 기세였다. 그 맨 앞에는 롱아르 백작 가(家)의 시녀장이 서 있었는데 그녀는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비장해 보였다. 한 치의 반항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매우 단단한 목소리로 그녀는 시녀들에게 우리를 씻기라 명령했다. 시녀들의 다급한 손길을 받으며 나는 고민했다.
이제 나는 돌아가야겠구나, 하고.
레니 혼자 혼나라고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 비양심적이고 치사한 짓은 하지 않는다. 다만 네가 레니와 친하게 지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레니의 가족들과도 친하고 지내고 있는 건 아니라서.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난 레니의 가족들이 불편했다. 나와 가까이 지내고 있다는 이유로 레니가 역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레니의 가족을 보기가 더 면목 없다고나 할까. 레니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건 당사자니까 그리 말할 수 있는 거다. 레니가 있기에 나는 좋았지만 사실 난 나와 가깝게 지내는 것이 레니에게 좋지 않다고, 나와 만나지 않는 편이 레니에게 더 좋을 거라고 여러 번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을 레니에게 말 한 적은 없지만.
무서워서.
정말 앞으로는 날 찾아오지 않을까 무서워서 말하지는 못했다. 또 무서워서 레니 너희 가족들이 날 어찌 생각하는지도 묻지 못했다. 지나가는 말로도 묻지 못했다.
바삐 손을 움직이는 중간 중간 시녀들의 마사지가 무척이나 시원했다. 아무래도 계속 앉아서 술만 퍼 마셔댔던 것이 몸을 많이 찌뿌둥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시녀들의 노력으로 인해 엄청난 속도로 준비를 마칠 수 있었던 우리는 곧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응접실로 향하는 중 레니는 몇 번이나 비틀거렸었는데 내가 술 기운이 남아있는 것 때문이냐고 묻자 고개를 도리도리 친다.
"아니, 긴장해서."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몇 번 정도 비틀거렸었는데 이 어지럼증은 단순히 긴장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장 탓도 있긴 있는 모양이다. 응접실에 들어선 순간, 소파에 앉아 우아한 자세로 차를 마시고 있는 롱아르 백작 부부와 레이준 공자가 보이는 순간 우리도 모르게 긴장해 버린 것을 보아하니 말이다.
아니, 긴장은 레니만 했고 나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사실 나는 긴장한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이 무척이나 난처했다. 그렇다고 인사도 없이 별장으로 무작정 돌아가 버릴 수도 없어서 일단 같이 오긴 했는데, 이 험악한 분위기 어느 틈에 돌아가겠다고 말을 전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레니와 친하게 지내긴 하나 그렇다고 레니의 가족들과 친분을 쌓은 건 아니다. 만난 것도 손에 꼽는다. 특히나 백작 부부와 만난 건 이번이 겨우 두 번째에 불과했다.
슬슬 빠지고 싶은데. 하지만 일주일 동안 술판을 벌였다는, 남들이 알게 된다면 경을 치게 될 사건을 같이 저질렀기에 그냥 빠져나갈 수만은 없고.
레니 옆에서 같이 죄송하다고 잘못을 빌어야 하나? 그 말은 하고 빠져나가야 레니의 후환이 없으려나? 백작부부가 내게까지 벌을 줄 것 같진 않다. 오히려 레니를 혼내는데 내가 있는 것을 더 불편하게 여길 가능성이 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지금 바로 인사하고 나갈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타이밍을 재본다.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런 내 눈에 내가 무슨 고민을 시작했는지 알아챈 눈치 빠른 레니가 배신자라고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 거려댔지만 충분히 무시할 수 있었다.
같이 있어봐야 어차피 너 혼자 혼나, 안 그래? 내가 네 곁에 있든 없는 무슨 상관이야? 오히려 네 부모님은 좋아하실걸?
시끄러워.
너 혼자는 절대 못 빠져나간다는 듯 내 손을 꾹 잡는 레니의 손아귀에 놀라 손을 빼내려 했지만, 이런 무서운 녀석! 어쩜 이리도 손아귀의 힘이 세단 말인가!
롱아르 백작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렇게 우리가 소리 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던 바로 그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