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7 회: #3 -- >
"자알 해."
"으응?"
"그으 남자, 자알 한다고. 딸꾹."
다른 비교대상이 딱히 없지만 그 남자가 잘하는 건 맞는 것 같다. 어떻게 아냐고 묻는다면 정말 할 말 없다. 그러니까 잘한다면 그냥 잘하는 줄 알아라.
내 말에 게슴츠레했던 레니의 눈동자가 순간 또렷해졌다. 부담스럽게도 반짝이는 그 빛에 나는 웃었다.
아아, 세상의 모든 어리석은 남자들이여! 여자란 종족이 부끄러운 듯 미소 지을 줄 안다하여 진짜 그 얼굴 그대로 순진하다 믿는 바보 같은 중생들이여! 여자들의 겉모습에 속지 말지어다. 청순한 얼굴을 지니고 있는 모든 여자들이 성(性)에 부끄러워하고 무지하며
'아무 것도 몰라요.'
라고 지껄여 대는 말이 정말인 줄 안다면, 그건 완벽하게 속고 있는 것이라.
'몰라요.'
는 몽땅 거짓말이다. 여자들이 뒤에서 얼마나 많은 야한 얘기들을 지껄이고, 그런 얘기를 할 때마다 얼마나 눈을 반짝이는지, 마른 침을 몇 번이나 꿀꺽꿀꺽 삼켜대는지 당신네 남자들은 아는가? 남자들이 여자의 가슴을 보며 침을 삼킬 때 여자들도 똑같이 그대들의 가슴팍을 보며 침을 삼킨다. 킥킥. 너희들은 부드러운 여체를 보며 황홀해 하고 여자들은 단단한 그대들의 남체를 보며 황홀해 하지. 그건 진정 사실이렷다.
나는 검지를 하나 번쩍 들었다. 마치 그것이 위대한 구원의 손길이라도 되는 냥 레니의 고개가 덩달아 손가락을 향해 치솟는다. 나는 그 즉각적인 반응에 만족하며 나름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 심하게 어눌해진 발음과 중간 중간의 사정없는 딸꾹질 때문에 전혀 대단해 보이지 않겠지만, 내 유일한 청자인 레니도 상태가 나만큼이나 나쁘기 때문에 그게 문제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보라! 저 눈빛을! 지금 레니의 눈빛은 위대한 현자의 말씀을 기대하는 중생의 눈빛과 가히 다르지 않으리라.
나는 올렸던 검지를 직각으로 내려 휙! 레니의 얼굴 앞으로 뻗어주었다. 그 박력에 레니가 흠칫! 놀란다.
"키이스 할 때!"
내 말을 반복하는 레니가 참 웃기다. 꿀꺽, 마른 침을 연신 삼켜대는 것도 웃기고. 무엇보다 완벽한 집중도를 보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는 꼴이 가장 웃기다. 하지만 하늘로 솟으려는 입매를 가다듬고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입만 주시하고 있는 레니 때문에 입술이 타오를 것만 같다.
"그으 남자는 길게, 딸꾹, 그리고 수움 막히게 키이스를, 딸꾹. 해. 딸꾹. 웃긴 건, 나아는 수움, 크흠. 숨 막혀 주욱겠는데에, 딸꾹. 그 노옴은 아아주 멀쩌엉 해에에. 대체에 어디로, 딸꾹, 수움, 크흠, 숨! 쉬는 건지이."
나는 계속되는 딸꾹질에 맘에 들지 않은 발음을 교정해가며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머금었다. 그리고 마치 그게 물인 것 마냥 입을 헹군다. 마치 그렇게 하면 술이 좀 깨는 것처럼. 레니가 나를 따라 술을 한 모금 입에 넣더니 똑같이 입을 헹구었다. 그렇게 하면서 도리어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꼴이 되었지만 우리 둘 다 그런 사소한 것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아래엣 입수울-."
"응?"
내가 졸린 듯 고갤 떨구자 레니가 테이블 밑으로 내 발을 제 발로 마구 쳐댔다. 이대로 너 잠들었다가는 내가 미칠지도 모른다는 등의 말을 마구 지껄여 대는 바람에 나는 저절로 감겼던 눈을 애써 밀어 올리며 레니를 쳐다보았다.
어라? 방금 전에 내가 무슨 말을 했지?
그러자 평소에 눈치라곤 쥐뿔도 없는 녀석이 냉큼 내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아래엣 입수울!"
"아, 맞다."
생각났다는 내 반응에 레니가 마구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씨익 웃고 손가락으로 내 아랫입술을 툭툭 건드렸다.
"여기여기. 딸꾹. 여어기가 부어."
"응?"
"딸꾹. 여어기가 부웃는 다구우우."
그 남자, 참으로 이상한 습관이지. 남의 아랫입술을 오징어 씹어대듯 말랑말랑 씹어대니 말이다. 윗입술도 가끔씩 씹어대긴 하지만 빈도수로 따지자면 아랫입술이 압도적이다. 그렇게 그가 맘껏 씹어대는 다음 날이면 당연하게도 내 아랫입술은 심각한 상태가 되어있다. 그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붕어가 되어버린 그 민망스런 꼴에 한숨을 내쉰 적이 대체 몇 번이었던가.
키스 한 번 제대로 못 해봤을 것이 분명한 레니가 그 동안 보아왔던 로맨스 소설 덕분인지 내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나 보다. 레니의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나는 배를 쥐어 잡고 떼굴떼굴 웃어댔다.
"킥킥킥."
"푸히히히히히. 아응, 좋아 좋아."
"바아보 레니. 하하하하하. 딸꾹. 하하하. 딸꾹."
"그리고오, 딸꾹. 또오? 응? 또오? 딸꾹."
"또오?"
나는 퍼질러진 자세 그대로 누워서 어지러움 때문에 잘 굴러가지도 않는 머리를 마구 굴려대며 또 뭐가 있나 생각했다. 그러자 레니가 궁금했던 것이 있는지 냉큼 입을 연다.
"딸꾹. 애, 애……딸꾹. 무는 어떻게에……."
목소리가 사정없이 작아진다.
힐끔 레니의 얼굴을 쳐다보니, 맙소사. 이건 정말 맙소사다. 레니가 저렇게까지 얼굴을 붉힐 수 있는 아이였다는 사실에 놀라고 또 놀란다. 완전 불타는 고구마가 따로 없다. 안 그래도 붉은 머리칼 때문에 레니는 빨개 보이는데 얼굴까지 붉어지자 답이 없었다.
레니의 호기심을 자근자근 곱씹으며 나는 열심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니까 그 남자와 내가 어떻게 했더라? 실은 내가 하고도 나 역시도 실감이 잘 나지 않는 터라 뭐라 해줄 말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사실대로 그리 말하면 레니가 지랄할까봐 생각하는 척이라도 해본다.
이런 내 본심을 안다면 다들 놀랄 테지. 그와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의 밤을 보낸 내가 아직도 그와의 관계가 믿겨지지 않는다고 표현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사실인데 뭘. 그와 관계를 갖긴 하지만 뒤돌아서면 아직도 이 말도 안 돼는 상황이 마치 거짓말인 것 같았다. 아, 내 누누이 얘기하지만 나는 다른 이상한 변태 새끼가 아닌 그나마 그 남자와 이런 관계가 된 것을 내 불운 중에서나마 나름 괜찮은 운이라 생각한다. 진심으로.
아, 얼굴 뜯기겠네.
나는 나를 노려보며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레니의 시선에 해줄 말을 골랐다. 뭐라고 해주지? 뭐라고 말해주지? 끝까지 무시하거나 대답을 안 하려 한다면 왠지 큰일 날 것만 같다. 내 안위가 걱정스러워진다고나 할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뭐라 말해줘야 좋을지 모르겠다. 아니 사실, 취해서 머리가 빙빙 돌고, 세상도 돌고, 내 눈도 돌고, 내 속은 뒤집어 질 것 같고, 눈은 사정없이 감기려 하고……. 생각이고 뭐고 할 기운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내 손을 들어보였다.
"응?"
그 양 손으로 나는 내 볼을 감싸 쥐었다.
"그으 남자느은, 이렇게에 하고오, 키이스하는 걸, 딸꾹. 좋아해에."
"어머머! 딸꾹."
그 다음으로 내 목덜미를 가리켜보였다.
"여어기에, 자아주우, 딸꾹. 그 노옴, 얼구울을 박아."
"어머머머! 딸꾹 딸꾹."
레니는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다음으로 나는 옷깃을 살짝 내리고 쇄골 약간 밑 부분을 손가락으로 콕 짚었다. 내 손가락으로 따라 레니의 불과도 같은 시선이 냉큼 내리 꽂힌다.
"키이스으 마크. 딸꾹."
"아! 키이스으 마크!"
"딸꾹. 여어어긴! 그 노옴이 두우 번째로 좋아하는, 딸꾹. 장소."
"딸꾹. 그, 그, 그, 그, 그러엄 첫 번째는?"
이제 레니는 숨조차 제대로 쉬고 있지 못했다. 헐떡이며 숨을 고르는 그 모습이야 말로 막 사랑을 나누고 난 후의 모습처럼 색정적으로 보였다. 날이 저물어 캄캄해진 배경에 은은한 마법램프 뿐인 이곳에서, 게다가 술기운 때문에 발개져 왠지 모르게 퇴폐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는 상황에 꺼내어 놓은 화제가 이런 색정적인 종류의 것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레니는 유독 색정적으로 보였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 손가락의 움직임을 단 한시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과도 같은 레니의 시선에 손가락 끝에 머문다. 나는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들어 공중에서 몇 번 돌려보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감아보기도 했다. 슬슬 찡그려지는 레니의 인상에 재빨리 쇄골 밑 부분에 손가락을 놓자 레니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다시 시작된다. 나는 거기서 조금씩 조금씩 손가락을 밑으로 내렸다. 밑으로 내릴 때마다 레니의 집중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해졌다.
"요오기."
"헉!"
이제 레니는 숨 쉬는 법을 완전 잊어버린 모양이다. 저게 하얗게 질린 건지 아님 혼란에 빠진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한건 레니는 지금 자극받았다는 것! 네가 진정 처녀인지 의심스럽다, 레니야.
내 손가락이 머문 곳은 내 가슴 봉우리가 시작되고 분홍 정점을 이루는 곳 그 사이, 그 중간쯤이다. 아니, 사실은 정점에 더 가깝지만.
그와 관계를 가지고 난 후 이 장소엔 항상 붉은 빛의 자국들이 새겨져 있는데 세 개는 필수요 많게는 여러 개다. 일일이 새어보지 않아 몇 개라고는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가 이곳에 흔적을 남기는 걸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
레니는 숨조차 멈춘 그대로 내 손가락이 놓인 그 곳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 재밌어라. 이런 즉각적이고 삼삼한 반응에 재미를 붙여버린 나를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아무래도 심각하게 취했나보다. 제정신의 상태였다면 절대 나는 이런 짓을 하지 않을 텐데 말이지. 역시 술은, 함부로 마시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야 만다. 하지만 이미 알콜의 영향력 아래 무릎 꿇어 뚫려버린 내 입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빌어먹을 알콜같으니.
이번엔 내 손으로 내 허릴 감싸듯 쥐었다. 이젠 입까지 벌린 채 마치 주술에 걸린 사람마냥 자동적으로 내 손에 따라 시선을 옮기는 레니의 반응이 나는 너무나도 재밌어 결국 미친 소릴 지껄이고 말았다. 오, 신이시여, 제발 저의 주둥이를 좀 닥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