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33 회: #3 -- >
게다가 내가 원한 축소화 마법도구는 정말 비싼 레벨이기 때문에 나는 이 말을 해도 되나 솔직히 고민했더랬다. 그러다가 말하라고 했으니 말하자 싶어 말한 거다. 부담스러우면 알아서 거절하지 않겠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뭘?"
손에 쥔 내 머리칼이 찰흙이라도 되는 것 마냥 주물러대는 그의 손을 무시하고 나는 다시 물었다.
"사줄 거예요?"
"그러지."
"제가 말한 축소화 마법도구는 레벨5짜리인데요?"
전에도 말했다시피 축소화 마법도구는 어떤 물건은 어느 정도의 크기로 축소시키느냐에 따라 그 가격이 천차만별 달라진다. 똑같은 크기의 물건을 똑같은 사이즈로 축소시키는 것도 그 물건의 생김새와 무게에 따라 또 가격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분류한 축소화 마법도구는 레벨1부터 레벨7까지 있는데 레벨이 높아질수록 가격은 어마어마해진다. 따라서 그런 물건을 살 수 있는 것도 돈에 구애 받지 않는 귀족들이나 혹은 부를 일궈낸 몇 안 되는 이들 뿐이었다. 분명 이 물건은 여행객들이나 무거운 짐을 많이 실어 나르는 상인들에게는 유용한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목적이 아니고서야 사실상 실생활에는 그리 필요한 물건이 아니기에 수요가 그리 많진 않다. 즉, 웬만한 귀족들은 별로 쓸모 있어 보이지 않는 축소화 마법도구 레벨5를 살 바에야 그 돈으로 루비나 사파이어 목걸이 6-7개 정도 사는 것을 더 선호할 것이다.
'만약 그걸 사달라고 조르지 않고 이 남자가 내게 주는 대가를 팔아서 내 스스로 산다면, 음, 그래도 한 4개 정도는 팔아야 되겠지.'
이 말은 또 이 남자가 내게 주는 대가라는 것이 일반 보석들에 비해 상당히 질이 좋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질 좋은 보석들을 몇 개 팔아야 살 수 있는 걸, 단지 내 요구에 덜컥 사주겠다고? 진심이에요?
의심 반, 진심여부 확인 반의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의 눈빛은 태평하기만 했다. 마치 왜 자꾸 입 아프게 하느냐는 그의 에메랄드빛에 나는 나름 준비해놨었던 예상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과감히 버렸다.
묻지도 않는데 뭘.
나는 아직도 내 머리칼을 쥐고 괴롭혀 대는 그의 손을 귀찮다는 듯 치우고 팔도 치웠다. 사실 난 베개도 안 베고 잔다. 그런 내게 팔베개가 편할 리 없다. 잠잘 때 낮은 베개도 베지 않는 내 버릇을 이 남자가 모를 리 없건만 왜 자꾸 내 목뒤로 팔을 가져다 놓는 건지 모르겠다.
"까다롭긴."
그는 그의 손을 쳐낸 내게 화를 내는 대신 뒤에서 나를 꼭 안았다. 붙어 자는 것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전에 그의 손길을 다 내쳤다가 그 후폭풍에 죽는 줄 알았으니까. 나름 쉬는 시간을 틈틈이 주던 그가 그 땐 쉴 틈도 없이 나를 마구 몰아붙이는데 눈앞에 별이 보이는 줄 알았다. 그 날 후로도 며칠 동안이나 얼얼했었던 부위를 떠올리면 차라리 조금 불편한 잠을 감수하는 편이 훨씬 낫다. 이 남자, 의외로 쪼잔한 면도 있다.
정수리에서 느껴지는 그의 숨소리를 무시하며 눈을 감고 잠이나 자볼까 했지만 이 대낮에 잠이 올 리 만무. 또랑또랑 정신만 멀쩡하다. 오지도 않는 잠과 내 몸을 여전히 부유하고 있는 그의 손 때문에 결국 잠 자보려는 시도는 실패다. 나는 내심 귀찮아 일으키기 싫었던 몸을 일으켰다.
"할 일 없으세요?"
"왜 없겠나?"
"아니, 한가해 보여서요."
"내 보좌관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겠지."
"귀는 안 간지러우세요?"
"그다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는 그의 모습은 잔득 흐트러졌음에도 꽤나 멋있었다. 넝마를 입고 있어도 이 남자는 빛이 날 테지. 어쩐지 씁쓸하다.
그를 빤히 내려 보다 나는 문득 그의 어깨에 난 상처자국을 발견했다. 손톱에 긁힌 자국. 심하게 긁히진 않았지만 긁힌 지 얼마 안돼서 그런지 그 선 자국이 선명했다.
'설마……, 저거 내가 한 건가?'
내 표정이 어떤지는 나도 모르겠다. 거만히 태도로 누워 날 올려보던 남자가 내 시선을 따라 자기 어깨를 보더니 아아, 의미 없는 소릴 내뱉는다. 그 익숙함에 나는 이번엔 확실히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그런 건가요?"
"음."
"정말로요?"
새된 음성 속에 가득한 말도 안 된다는 내 기색에 그가 한 쪽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기분이 무척이나 나빴지만 그 모습도 섹시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씩 난, 나와 이런 끈적끈적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내 정부가 이 남자라는 사실에 현실감각이 없을 때가 있다. 배롤린 남작이 도대체 무슨 재주를 부려 이런 거물을 잡았는지 아직도 믿겨지지 않기도 하고.
어차피 배롤린 남작이 나를 팔아먹을 심산이었다는 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대놓고 말한 적은 없어도 남작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나도 알 수 있을 만큼 명확했다고.
그래서 도망치기 위해 수없이 시도했었고, 그런 나를 라니가 도왔었다. 사병들에게 막혀 더 이상 도망치지 못하게 되었을 땐 울면서 기도했었다. 그래도 최대한 역겹지 않고 나보다 나이가 세 곱절은 많지 않은 빌어먹을 변태 새끼한테 날 팔지 않는, 그런 최소한의 양심은 배롤린 남작이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하지만 그렇게 기도했다고 하더라도 알브레히트 공작 가(家)를 꿈꿨던 적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배롤린 남작의 능력을 아무리 좋게 평가해 보려 노력해도 배롤린 남작 따위가 알브레히트 공작에게 닿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날 팔아먹은 상대가 변태거나, 나보다 30살 많다거나, 보기만 해도 토가 나올 것 같은 개기름의 소유자가 아님은 정말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다행이지. 정말 다행이지. 배롤린이 날 팔아먹은 상대가 눈앞의 이 남자라는 것은.
"잘 찾아봐. 네 손톱에 긁힌 자국이 한두 개가 아닐 테니."
"예?"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자 그가 나른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침대 머리 판에 몸을 기대앉는다. 들어난 상체가 마치 조각 같다. 그 완벽함에 나는
'아, 맞다. 이 남자 기사였지.'
하는 그동안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동안 업무량이 하도 많아 책상 앞에 앉아 일하고 있다는 말만 들어와서 그런지 그새 그 사실을 잊고 있었나 보다. 그가 기사라는, 그 것도 매우 뛰어나다 못해 검술대회 최연소 우승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님 그가 책상 앞에 앉아 일을 하는 모습이 굉장히 멋있어 보여 그를 문관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 완벽한 상체가 떡하니 눈앞에 보이자 왠지 기분이 껄끄러웠다. 자연스럽게, 내 기분을 들어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는 시선을 약간 밑으로 옮겨보았다.
"……."
밑은 더 껄끄럽다. 가까스로 중요부분은 이불에 가려졌다지만 어째 그게 더 민망하다. 나는 그의 몸에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결국 고갤 숙였다. 물론 내 딴에는 굉장히 자연스럽게 움직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내 눈에 보이는 건, 오, 이런! 확연이 들어난 내 상체와 확실히 이불 속에 가려진 내 하체다. 말세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나는 몸을 일으키면서 이불로 내 몸을 가려줘야 한다는 생각도 이젠 안한 걸까? 이래도 되니, 유니시이나? 언제부터 이렇게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니?
하지만 이제와 슬그머니 이불을 잡아당겨 들어난 상체를 가리는 것도 참 웃긴 일이다. 그렇다고 인지하지 못했다면 모를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슬그머니 누웠다. 누워서 이불을 끌어 내 몸을 가렸다.
"……하, 하, 하."
"……."
"하하하하하."
"……."
나도 꼼지락거리는 내 모습이 얼마나 웃길지 상상이 된다. 그 상상에 어색한 웃음을 터트려 보이기까지 했건만 그는 그저 나를 모자란 사람 쳐다보듯 보고 있다.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새삼 신기하기라도 한 모양이다.
하하하.
하지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웃고 있는 내 얼굴에 욕을 하진 않겠지. 이왕 꼼지락 거린 거 몇 번 더 한다 해서 뭐가 더 웃기겠는가 싶어 나는 어색한 와중에도 온 몸을 완벽하게 이불로 감싸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재빨리 침대에서 벗어나며 그를 유혹하듯 진하게 미소 지었다.
"다 보이네요."
"……."
내가 이불을 통째로 말아 내 몸을 감쌌으니 그를 덮어줄 이불은 없다.
"얼레리꼴레리네요. 그래도 너무 민망해하지 마세요. 공작님은 꽤 봐줄만 하니까요."
"……."
여전히 아무 말도 없는 그에게 놀리듯 한마디 더 해주고 나는 욕실로 들어섰다. 아니 들어서려 했다. 어느 순간 다가온 그 남자에게 이불을 빼앗기고 도로 침대에 눕혀지지 않았다면 나는 내 계획대로 룰루랄라 씻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잠시 후 내 입에는 룰루랄라 노랫소리 대신 다른 소리가 내뱉어져야 했다. 방금 전까지 내가 질러댔던 신음소리를.
그는 약 올리듯 이불을 저 멀리 치워둔 채 적나라한 내 나신을 보고 또 보며 피식 거려댔다.
하여튼 쪼잔한 남자다. 아마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 할 테지만.
============================ 작품 후기 ============================
에구~ 겨우 집에 들어왔네요.
다들 주말 잘 보내셨나요?
ㅎㅎ
* RedHaze님, 재미있다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월하한유님, 원고료 ㅠㅜ 첨 받아보네요 ㅠㅜ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 별빛같은마음님, 쿠폰 투척 감솨합니다ㅎㅎ유나의 행복은.... 저도 모릅니다^^;;
* 페르디엔님 whomi님, 레니 미워하지 마세요. 레니는 겉과 속이 똑같은 캐릭터예요. 여자들의 사교활동에 지극히 약한, 왕따는 아니지만 겉도는 아이죠. 억지로 하하호호 못하는 많이 부족한 아이랍니다. ㅠㅜ 미안하다, 레니야.
* lulullu님, 넵! 응원 감사히 받겠습니다. ㅎ
* 게으른냥님, 치유를 받아야 할 텐데, 그래야 할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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