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9 회: #3 -- >
미친년. 이런 얘기를 사람들 많은 곳에서 주둥일 함부로 나불거려?
나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레니를 노려보았다. 어제 사건은 그냥 덮으려했건만! 잠재웠던 분노가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려 하고 있었다.
"미, 미안해."
그런 내 시선에 레니가 삐질 웃는다. 난처함이 줄줄 흐르는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으드득 이를 갈아주었다.
"……너 너무 빨리 용서 받았지? 그지?"
"하, 하하. 미안해."
"간이 부었구나."
"미안해에."
어느새 거추장스러운 겉옷은 모두 벗겨져 있었다. 나는 속옷만 입은 채 여전히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욕실로 향했다. 그런 내 뒤를 레니가 졸졸 쫓아온다.
"그런데 너 정말 어제 어디서 잤어? 응? 어디서 뭘 하다 이제 들어온 거야? 혹시, 공작님하고 같이 있었어?"
"신전. 화원. 아니."
욕실에 들어와 속옷마저 벗으며 내가 대답했다. 욕조에 미리 물을 받아둔 모양이다. 계속 물을 갈았는지 물은 적당히 따뜻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천국이 따로 없다 싶다.
"금방 돌아갈 거야?"
"응? 아니."
"그럼 뭐라도 하면서 기다려. 나 몸이 너무 아파서 마사지 좀 받게."
"알았어."
때마침 들어온 시녀군단의 출현에 레니가 욕실에서 나갔다. 시끄럽게 구는 레니마저 나가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향긋한 향기가 끝내줬다. 몸이 나른해졌다.
"아가씨."
가만히 누워 부드러운 손길을 느끼고 있는데 조심스런 음색이 나를 부른다. 나는 만족스러움에 절로 감겼던 눈을 뜨려다 그냥 감은채로 입을 열었다.
"예?"
"……발바닥에 상처가 심합니다."
"아."
알고 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통증만으로도 충분히 심각성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물속에 들어갔을 때의 그 따끔거림이란!
"발목도 심하게 부었습니다. 종아리와 허벅지도 근육이 뭉쳐져 있구요. 등도 경직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오래 걸어서 그래요. 제가 원래 조금만 많이 움직여도 온 몸에서 비명을 질러대거든요."
평소엔 그렇게 걸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내 몸 상태가 이렇게 망가진 꼴은 아마 그녀들도 처음 보았을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별장에서 내가 과하게 움직일 일이 뭐 있겠는가. 내가 집안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심지어 이곳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정원을 가꾸는 일도 내 지시에 따른 그녀들의 몫이다. 물론 내 정원이기에 내가 직접 가꾸기도 하지만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된 어느 날, 날 찾아온 그 남자 때문에 그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그 날 이후부터 내가 정원에서 일을 좀 하려하면 시녀들이 난리를 부려댔다. 내가 일을 하면 자기네들이 잘린다나 어쩐다나. 그래도 마냥 지시만 할 순 없어 조금씩 하고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습니다."
"……심각한 건 아니에요. 정말 평소보다 과하게 움직인 탓이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내 몸은 상당히 곤란한 체질이었다. 선천적인 탓이었기에 내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조금만 힘들다 싶으면 뛰어 놀다가도 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다음날 움직이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몇 번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몸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는 놀이들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런 놀이들보다는 마구 뛰어다니며 다 같이 하는 술래잡기가 가장 재미있었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더 꽁꽁 숨어야했다.
어제처럼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함부로 몸을 굴려본 적도 정말 오랜만이었지. 나도 이렇게까지 내 몸이 망가질 줄은 몰랐는걸.
"……몸을 이리도 함부로 다루시면 안 됩니다, 아가씨."
가만히 한숨을 내쉬던 시녀는 곁에선 누군가에게 뭐라고 작게 속삭였다. 약간 잠이 몰려오기도 했고 또 지시를 내리는 소리가 너무 작아 그녀가 뭐라 했는지는 모르겠다.
따뜻한 수증기로 가득한 욕실 문이 잠시 열리고 곧 닫혔다. 그 잠깐의 순간일 뿐이었음에도 그새 밀려들어온 차가운 기운에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자 내 몸을 마사지 해주던 손길들이 더욱 빨라졌다. 몸을 덥히기 위해서다.
기분 좋다. 잔득 굳었던 신경들이 하나씩 풀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금 욕실 안에 찬 기운이 밀려들어왔다. 나는 방금 전 나갔던 시녀가 되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톡!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난 발바닥에 닿는 시원한 감촉에 만족스런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발바닥의 아픔을 조금씩 없애주었다. 곧이어 발목에도 그 시원한 감촉이 느껴졌다. 퉁퉁 부은 발목의 상처 역시 곧 사그라졌다. 찌릿 거리며 통증을 호소해대던 종아리와 허벅지의 긴장도 이완시켜주었고 덕분에 나는 한결 살 것 같았다. 온 몸이 상쾌해졌다. 나는 힐끔 시녀가 들고 있는 병을 쳐다보았다.
역시, 포션이구나.
설마 설마 했는데 역시나 포션이다. 포션이 얼마나 좋은지 말하자면 입 아플 정도다. 그런데 저거 무지 비싼데. 설마 나중에 나보고 갚으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장장 두 시간이라는 시간동안 마사지를 받고나자 온 몸이 개운해지는 반면 졸음이 몰아쳤다. 나는 욕실에서 나와 새로 갈아입은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기어들어갔다. 몸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이제 대신 너무 피곤하다. 자고 싶었다. 어쩌면 푹신푹신한 내 침대가 그리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신전에서 잤다고? 어떻게? 신전에서 숙박업도 했었던가? 또 화원엘 갔어? 잘 거야?"
내가 침대에 눕자마자 레니가 쪼르르 달려왔다. 테이블 위에 던져진 빨간색 표지의 책을 보며 나는 내가 마사지를 받는 2시간 동안 레니가 무얼 하며 얌전히 기다렸는지 알아챘다.
"로맨스 소설 읽고 있었어?"
"대답해봐. 정말 신전에서 잤어? 그리고 지금 또 잘 거야?"
하여간 쫑알쫑알, 내 질문에 대답은 않고 이상한 질문으로 되물어보는 건 대체 무슨 심본지 모르겠다. 나는 귀찮다는 뉘앙스를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한번 까딱여 주곤 그대로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레니가 곧 어물정어물정 조심스럽게 침대로 기어들어온다. 그 모습을 한 쪽 눈만 뜨고 지켜보다 내가 툭 한마디 던졌다.
"나 레즈 아니다."
"……지랄."
레니의 입이 귀족영애 답지 않게 걸걸하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나는 놀라지 않았다. 사실 내 입도 그렇게 깨끗하지 않다. 때문에 저런 단어 기겁해대거나 어떻게 저런 단어를 입에 담을 수 있는 거냐며 호들갑 떨지도 않는다. 아, 통탄할 노릇이도다. 아빠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슬퍼하셨겠는가. 아니, 살아계셨다면 내가 이런 성격이 되지도 않았을 테지.
레니는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침대에 들어와 내 옆에 누웠다.
"내 잠옷으로 갈아입든지."
"됐어."
"됐음 말고."
굳이 자기가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데 내가 말릴 이유는 없다. 하지만 저 부담스런 시선은 좀 말리고 싶다. 눈감고 가만히 누워있는 내 얼굴을 빤히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얼굴이 뚫어질 것만 같다.
"어젠 진짜 미안."
"됐어."
사실 레니의 잘못이 아니다. 신기한 건 내가 그 곳에 있다는 걸 어떻게 영애들이 알았느냐는 거다. 만약 롱아르 백작 가(家)였다면 레니의 통제 아래 시녀들은 내 이름을 입도 벙긋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겠지만 어제는 안타깝게도 롱아르 백작 가(家)가 아니 리제도 백작 가(家)였다. 아마 한 시녀가 아무 생각 없이 내 이름을 내뱉었을 거고, 정말 내게는 최악의 운으로 그걸 듣고 그녀들이 나를 찾아온 거겠지. 그것을 모조리 다 레니의 잘못으로 돌리기엔 레니에게 억울한 면이 없다 할 수 없는 거다. 내겐 지나치게 운이 없었던 거고, 늘 나를 벼르고 또 벼르고 있었던 그들에겐 지나치게 운이 좋았을 뿐이다. 정말 단지 그 뿐이다.
"정말로 그런 표정할 거 없어. 간만에 행복한 꿈 꿔서 기분이 무척이나 좋으니까."
"행복한 꿈?"
"엄마 아빠 꿈."
"아."
이상하게도 그렇게 꾸길 바라는 엄마 아빠 꿈은 잘 꿔지지 않는다. 꿈에서나마 보고픈 내 소망을 들어줄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멀리, 멀리 있는 걸까? 잠들기 전 했던 생각이 꿈속에서도 나온다는 그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내 꿈속엔 항상 엄마 아빠가 나와야 맞다. 하지만 꿈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거란 걸 난 엄마 아빠를 잃고 몇 년에 걸쳐 철저히 알게 되었다.
배롤린 가(家)에서 아무리 울고 싶은 일이 생겼어도 엄마 아빠를 부르며 울고 또 울어도 엄마 아빠는 꿈에서조차 볼 수 없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뜻하지 않은 날,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그런 날 가끔 한 번씩 엄마 아빠의 꿈을 꾸면, 그 날은 내게 행복한 날이 되었다.
"페터 오빠가 그 영애들에게 충고했어. 리제도 백작 가(家) 내에서 그런 일을 한 것에 대해 추궁하겠다고."
"아아. 추궁당해도 싸지. 자기네 집에서도 아니고 감히 다른 곳에서 그런 행패를 부려댔으니. 어떻게 보면 리제도 백작 가(家)를 무시한 꼴인데."
"우리 집에서도 그들 가문에 서신을 보낼 거야. 아주 유감스럽다는 둥의 내용이 들어갈 테지. 내가 데리고 온 손님에게 그런 짓을 했으니 그들은 또한 롱아르 백작 가(家)를 무시한 거지. 아, 완전 재수 없어."
"영광이야."
"비꼬지 마."
"안 비꽜어. 정말이야. 오히려 불편할 정도로 과분한 처사야. 난 오히려 조용히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내 말에 가만히 날 응시하던 레니가 손을 들어 내 볼에 손등을 가져다댄다. 그 조심스런 행동에 나는 감았던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넌 가끔씩 네 스스로를 너무 내팽개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할 때가 있어."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