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7 회: #3 -- >
"전 바로 안 갈 거라구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다시 앞서 걸었다. 너무 아파 절로 걸음걸이가 절뚝거려댄다. 다시 구두를 벗을까 고민해 보았지만 그냥 신고 있기로 했다. 근육통도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발바닥도 만만치 않게 아팠으니까.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이 뒤에서 느껴졌지만 돌아가서 일 보든 따라오든 알아서 하겠지 싶다. 난 그저 내 계획대로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오기로 화원에 갔다. 오랜만에 들린 그 곳에서 천천히 꽃을 구경하고 앉아서 꽃 차도 좀 마시고. 라일락이 너무 향기로워 라일락도 좀 사고 꽃씨도 좀 샀다.
중간에 앉아서 쉬어주었는데도 너무 힘들어 근처 카페에 들어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도 들어가자마자 바로 보이는 의자에 거의 쓰러지다시피 앉은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긴 치마를 이용해 다리를 완벽하게 가린 나는 치마 속에서 조심스럽게 구두를 벗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가.
정말이다.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단지 구두를 벗었을 뿐인데도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다. 그렇게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내가 방금 전에 산 꽃이며 씨앗을 정리해 보자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는 차를 마셨다. 더는 움직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카페에 앉아있는데.
"아, 맞다."
까먹고 있었구나. 우연히 쳐다본 유리창 너머 기사의 모습을 보기 전까지 나는 그 기사의 존재를 아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뒤따르고 있었던 건가?'
따라오는 소리를 못 들어서 그냥 가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하여튼 훈련한다는 사람들은 참 대단도 하다. 어떻게 저렇게 소리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건지. 그러고 보니 뮤아르노와 그 남자도 발자국 소리 하나 내지 않았었더랬다. 그래서 어느 순간 방에 들어와 내 옆에 서있는걸 뒤늦게 알아차렸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었지. 나는 흉내도 못 낼 대단한 능력이었다.
"다시 신발 신기는 진짜 싫은데."
사실 앉아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발바닥은 열이 나듯 뜨거웠고 온 몸은 욱신거려댔다. 서서 걷는 것보다 낫다는 거지 지금 이 상황이 좋다는 건 아니다. 게다가 다시 구두를 신어야 한다는 사실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래도 맨 발로는 갈 수 없기에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구두를 신어야 했다. 발이 퉁퉁 부어버린 탓에 구두는 신기도 어려웠고 신고 나서는 더 아팠다. 억지로 껴 맞춘 기분이랄까.
괜한 오기를 부린 걸까? 한심한 유니시이나. 반항 한번 해보려다 오히려 네 몸을 더 망가트리는 구나.
잠시 반성. 이래서 쓸데없는 자존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건가 보다.
나는 앉은 상태 그대로 이곳에서부터 마차정거장까지의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그곳까지 걸어갈 수나 있는 걸까? 이 다리로? 생각만으로도 찌릿 아파오는 발의 통증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무리라는 소리구나.
나는 여태껏 존재감 없이 나를 호위했던 기사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던 것일까? 오래지 않아 기사가 즉각 내게로 다가온다.
"무슨 일이십니까?"
"부탁이 있어서요."
그 남자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다소 냉정하게 대했던지라 부탁이라는 말을 하기 상당히 민망하고 껄끄러웠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끄덕엿다.
"말씀하십시오."
"마차정거장까지는 못 갈 것 같아요. 지금 제 다리가 너무 아파서 거기까지 걸어가는 건 무리거든요. 마차정거장으로 가셔서 이곳으로 마차를 불러와 주세요."
결국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은 이곳으로 마차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는 힐끔 내 발쪽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뭐, 쳐다봐봤자 치마밖에 보이지 않을 테지만 아무래도 내 뒤를 계속 따랐다면 내가 계속 쩔뚝거리며 걸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보다.
"부탁드릴게요. 얼른 다녀와 주세요."
그러자 기사가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나는 내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는 뜻인가 싶어 다소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이미 공작 가(家)의 마차가 근처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공작 가(家)의 마차가 준비되어 있다고?
놀란 나머지 눈을 떼구르르 굴려댔다. 이게 대체 웬 떡이냔 말인가! 몸 상태가 최악인 지금, 딱딱하기 그지없는 일반 마차의 의자보단 푹신푹신한 솜이불 같은 공작 가(家)의 마차가 당연히 더 땡긴다. 몸에 아무런 무리가 없었을 때도 그러하건만 엉망인 지금은 말할 것도 없지. 공작 가(家)의 마차를 떠올리자 몸이 행복하다는 반응을 보여 왔다. 일순간 나른해진다.
"……혹 마차가 계속 제 뒤를 따르고 있었던 건가요?"
"네."
"……."
이런 젠장. 진작 알았더라면 화원 갈 때도 타고 갈 것을!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그냥 못이기는 척 별장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텐데.
앞으로 쓸데없는 고집은 부리지 말아야겠다. 어쩔 수 없지. 이미 몸은 망가졌고 돌이킬 순 없으니까.
나는 기사가 밖으로 나가 손을 들어 올려 어딘가로 신호를 보내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혀를 차댔다.
고지식한 아저씨, 진작 좀 말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준비되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나보다. 오래지않아 익숙한 알브레히트 공작성의 마차가 카페 바로 앞에 대령되었다.
마차까지 힘내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쩔뚝거리며 마차를 타기 위해 천천히 걸어갔다. 가까스로 내가 마차로 다가서자 그가 냉큼 내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와준다. 푹신푹신한 의자에 몸을 누이자 그 안락함에 만족스런 숨이 터져 나왔다.
앉자마자 구두부터 벗어던졌다. 갖가지 꽃과 씨앗 주머니는 앞자리에 고이 놓고 나는 옆으로 길게 앉았다. 다리를 쭉 뻗자 두둑 소리가 난다. 비명을 질러대던 온 몸이 이 푹신푹신함을 절절히 반겨댔다. 어젯밤 내내 구부리고 잤었던 것 때문에 무릎뿐만 아니라 발가락조차 뻐근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정도면 나도 참 둔하지. 아니 너무 아파서 몰랐던 걸 수도.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내 허락이 떨어지자 곧 마차가 움직인다. 움직임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게 이동하는 마차 안에서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라일락 꽃향기가 마차 안에 가득 메운다. 그 기분 좋은 향에 지친 몸을 위로받으며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고 다리를 주물렀다. 다리를 주무르기 위해 상체를 숙이자 이번엔 등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참으로 빌어먹을 몸뚱이구나.
이건 절대로 십 대의 몸이 아니다, 절대.
아픔에 종아리 힘줄이 꿈틀거리고 덜덜 떨릴 정도로 아팠지만 애써 꾹 참고 나는 다리를 팍팍 주물러댔다. 그래봐야 손아귀의 힘이 약해 별 효과는 없을 테지만. 그렇게 몇 번 주무르다 곧 기운이 딸려 그조차도 그만두었다. 나는 의자에 널브러지듯 누웠다. 송골송골한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온 몸의 기운을 소진한 탓이다. 정말이지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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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 남자친구였던 쿤은 참 괜찮은 아이였다. 그 아이의 어머니가 많이 아파서 어머니의 친정이 사는 곳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우리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때 나는 헤어진다는 개념이 어떤 건지 쿤만큼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었던 것 같다. 쿤은 무척이나 다정한 아이였고 하얀 피부와 곱상한 외모 때문에 언뜻 보면 연약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사실 나는 쿤이 누구보다 의젓하고 고집 세고 당당한 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쿤은 스스로 판단했을 때 옳지 않은 일이라면 그 누구 앞에서라도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아이였다. 하지만 그 용기가 만용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늘 세심한 관찰과 직관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줄도 아는 아이였다. 친해지기 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쿤의 그런 모습들은 내가 그를 의지할 수 있을 만큼 그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 어느 순간 나는 쿤을 내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더 의젓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던 쿤이 헤어지기 전 날, 그러니까 쿤이네 가족이 이사하기 전 날 밤 나를 찾아와 눈물을 보였을 때, 나는 굉장히 당황했고 또 놀랐었던 것 같다.
<이사 가고 싶지 않아.>
<그치만……그치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안 그래?>
나도 쿤이 이사 가는 걸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랬기에 생각보다 더 쿤과의 헤어짐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쿤도 나와 같을 거라 생각했다. 쿤은 나보다 훨씬 똑똑한 아이니까. 하지만 쿤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힘들어했고, 훨씬 더 아파했고, 훨씬 더 슬퍼했다.
<난 어린 게 싫어.>
<…….>
같은 말을 두 번, 쿤이 강조하듯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줘야 좋을지 몰라 그저 발을 동동 굴려댔었다. 이렇게 어리광부리듯 슬퍼하는 쿤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줘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있지, 유나야. 난 너한테 약속 받고 싶은 것이 참 많아. 하지만 그 약속이 이뤄지지 않을 거란 걸……알아. 그러니까 내 욕심을 위해 약속하자고 너에게 요구하진 않을 거야. 나중에 내가 더 아플지도 모르니까.>
<쿤.>
<난 어머니를 사랑해.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걸 나도 알아. 사실 이사 얘긴 오래전부터 계속 나오던 것이어서 갑작스런 일도 아니야. 하지만 말야, 나는 솔직히 이사 따위 가고 싶지 않아. 내가 얼마나 슬픈지 유나, 너는 알까?>
마치 넌 몰라, 라고 말하는 쿤의 말에 나는 버벅 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 나도 슬퍼, 쿤. 나도 많이 슬프다고.>
나는 내가 이 말을 하면 쿤이 웃어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쿤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눈에 맺힌 눈물방울이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