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는 아름답다-24화 (24/206)

< -- 24 회: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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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여인이 사제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 정중하고도 정중한 인사에 사제는 안절부절 못하다 결국 한숨을 길게 내쉬고 말았다.

"라니양께서 그렇게 감사해 하실 만큼 제가 딱히 한 일은 없었습니다."

"노아 사제님의 방을 양보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답니다. 저는 그저 하룻밤 다른 사제님 방에서 함께 지내면 되는 것을요."

"그래도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 번 더 깊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라니를 보며 노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늦은 시간. 어떤 여인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말에 놀라 나가보자 어렸을 적부터 가끔씩 신전에 방문해 기도를 올리곤 하던 그 소녀가 아니던가. 이제는 소녀라 부르기엔 어엿한 여인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노아가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소녀 적의 그것이었다.

소녀는 늘 울고 있었다. 기도를 할 때마다 흘렸던 소리 없는 그 눈물에 노아는 가슴이 아리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정말 아프게, 아프게 우는 법을 아는 소녀였다. 하염없이 흘리던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 정도로 삶이 힘겨워보이던 그 소녀의 성(姓)이 배롤린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노아는 무척이나 놀랐었다. 배롤린 남작의 평판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건 사제인 노아조차도 잘 알고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예상하지 못한 시간에 갑자기 찾아온 그녀에게 노아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노아가 놀라건 말건 그녀는 무척이나 다급해 보였다. 재빨리 노아에게 다가온 그녀는 다짜고짜 지금 신전 예배당에 자기 또래의 여자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아프다며 치료해 달라 부탁했던 것이다.

"제발, 제발 치료해주세요. 빨리요. 네? 지금 많이 아플 거예요. 피가, 피가 잔득 났었던 것 같은데. 멀어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많이 아파보였어요. 제발요, 노아 사제님. 빨리 치료해주세요. 부탁드려요."

눈물 흘리며 아주 간곡하게 하는 그 부탁에 노아는 무슨 일인지도 묻지 못한 채 먼저 예배당으로 서둘러 가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 곳엔 라니가 말한 대로 한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흔들리는 등을 주체하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는 소녀가-. 그런 소녀의 뒷모습은 라니의 절박한 눈물과도 많이 닮아있었다.

노아는 그 여자아이가 울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부름에 뒤돌아본 여자아이의 눈은 그저 말갰다. 하얗고 푸르게. 아픔을 꼭꼭 숨기고 그 위에 덤덤함을 덧칠한 그 눈은 울음을 애써 참아내던 라니와 또 닮아 있는 것이었다.

날카롭게 긁혀 여기저기 핏자국이 선명한 볼의 흉터에 노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노아는 저게 무슨 자국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노아는 여자아이의 뺨을 치료해주고 그리고 자신의 방을 내주었다. 라니의 부탁이 아니었어도 아마 그는 이리 했을 거다. 모르는 척 넘어가기에 여자아이는 금세라도 쓰러져버릴 듯 위태로워보였으니까.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휴. 인사는 그만 됐답니다. 라니양."

"……."

"그리고 그만 우세요."

많이 안쓰럽습니다.

노아는 그 뒷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단지 마음을 담아 방금 전 여자아이의 뺨을 치료해준 것처럼 라니의 눈가를 신성력으로 감싸줄 뿐이다. 그 치료 덕에 눈물로 부어오른 눈덩이가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보자 노아의 마음은 한결 차분해졌다.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겠지. 이런 작은 것이라도 제가 해줄 수 있는게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한지,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라니는 울고 나면 늘 두통에 시달렸다. 그것도 심하게. 그 통증에 무척이나 힘겨워했던 것을 노아는 자주 보아왔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라니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티 나지 않게 꾹꾹 눌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노아가 신성력을 써주자 라니가 또 한 번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온다. 한결 나아진 모습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마차를 가져 오셨습니까?"

"……."

사실 물어보나 마나한 이야기다. 라니는 늘 걸어서 이곳에 왔으니까. 배롤린을 알리는 그 어떤 것도 라니는 하지 않았다. 그런 라니가 배롤린 가(家)의 문양이 딱하니 달린 마차를 타고 올 리 만무하다.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럴 수 없습니다.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라니의 거절은 단호했다. 그 단호함에 노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마차를 잡아타십시오. 마차를 타는 것까지 배웅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노아는 말한 대로 마차를 잡아주기 위해 나섰다. 여자 혼자 집으로 돌아가기엔 늦은 시간이긴 했어도 그렇다고 마차를 쉬이 잡지 못할 만큼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노아는 직접 라니의 마차를 잡아주고 타는 것을 봐야만 마음 편할 것 같았다. 손쉽게 마차를 잡은 노아는 마부에게 배롤린 가(家)라고 말하며 차비를 먼저 쥐어주었다.

"안전하게 모셔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사제님."

그리고 마차 문을 열고 라니를 쳐다보았다. 라니는 항상 그렇듯 차분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노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는 듯 끊임없이 흔들렸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

하지만 라니는 쉬이 입을 열지 않았다. 노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라니는 분명 그에게 뭔가를 묻고 싶은 눈치였다. 평소 라니는 아예 입을 다물면 다물었지 이렇게 망설였던 적은 없었기에 노아는 라니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더 궁금해졌다.

"라니양?"

노아가 라니를 불렀다. 그 부름에 잠시 더 머뭇거리던 라니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습니까?"

"네?"

"그 아이가 울었습니까?"

"……아."

바로 알아듣진 못했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노아는 라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슬퍼보였다. 지금이라도 다시 눈물을 떨굴 것처럼.

"아니요. 울지 못하고 계셨습니다."

울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울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차이를 노아는 알았다. 바로 눈앞의 소녀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노아의 말에 기어코 라니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써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떨궜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감추지 못한 채 라니가 마차에 올랐다. 노아는 자기도 모르게 라니의 어깨로 올라가려던 손을 끌어내리고 문을 닫았다.

"조심히 가십시오."

곧 마차가 움직였다. 그 마차의 뒤를 노아는 오랫동안 지켜보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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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미워하는 사람한테는 어떻게 해야 해요?>

<응? 누가 우리 유나를 미워하는데?>

내 말에 아빠가 책을 보던 시선을 떼고 날 쳐다보았다. 나는 힐끔 아빠 손에 들려있는 책표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히죽 웃었다. 지금 아빠가 읽고 있던 저 책은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그런 책을 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말 한마디에 책에서 눈을 떼고 모든 관심을 내게로 향해주는 것이 나는 너무 너무 좋았다. 아빠는 늘 그랬다. 언제든 최우선은 엄마와 나였고 늘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 느껴지는 사랑받음이 행복했다. 나는 분명 사랑받는 아이였다.

<옆 집 토나가 날 미워하는 것 같아요.>

<토나가? 널?>

토나는 옆집 빵가게 아들내미다. 나랑 나이도 비슷하고 그래서 옛날부터 같이 놀곤 했었는데 요즘 들어 나한테 계속 이상한 심술을 부려대고 있었다.

흐음, 그 심술이 대체 언제부터 시작됐었더라. 그래, 몇 주 전 베스의 생일잔치에서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 날은 베스의 생일이었는데 베스는 나랑 토나 말고도 마이클이라던가 쿤 등등 베스와 자주 같이 노는 다른 아이들도 많이 초대했더랬다. 그날 나는 베스의 선물을 준비한답시고 조금 늦었다. 파티가 먼저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평소에 자주 놀던 토나 옆자리가 아닌 비어있는 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게 쿤의 옆자리였던 것 같다.

<안녕?>

<어, 안녕.>

사실 나는 대부분의 아이들과는 친하게 지냈었지만 쿤과는 그렇게 친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쿤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뛰어노는 것보다 책 읽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쿤은 밖에 나와서 잘 놀지 않는 아이였다. 나는 몸은 약하지만 밖에서 노는 것을 좋아했다. 열이 오른다던지 근육이 많이 뭉쳐 엄마가 밖에서 노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날에는 집에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쿤과는 그동안 함께 뛰어 논다든지 같이 앉아 이야기를 한다든지 등등의 그런 기회가 많이 없었다.

내가 가진 쿤의 이미지는 조용함이었다. 아이답지 않게 차분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그런. 나는 남자아이가 저렇게 부끄러움을 탈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쿤을 보며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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