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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22화 (22/206)

< -- 22 회: #3 -- >

"왜지?"

"……."

"왜 넌 가만히 있기만 하지?"

"……뭐, 가요?"

크흠. 목이 잠긴 모양이다. 이상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목에 느껴지는 까끌함을 침을 넘겨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역겨운 피 향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몰라서 묻나?"

아니요, 알지요.

나는 눈으로 대답했다. 똑똑한 그는 눈으로 한 내 대답을 읽었고, 내 대답이 맘에 들지 않는지 그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와우. 지금까지 본 그의 얼굴 중 가장 흐트러진 얼굴이다. 고작 저 정도가. 티도 제대로 나지 않을 저 정도가 말이다.

알지요, 잘 알지요. 철없는 영애들의 심술 따위 굳이 내가 받아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돈 저도 잘 알지요. 그런데,

"그래서요?"

"뭐?"

"그래서 제게 남는 건 뭔데요?"

"……."

이 남자의 정부라는 이유로 내가 그녀들의 미움을 받는다는 건, 이 남자의 정부라는 이유로 내가 그녀들에게 오히려 성깔을 부릴 수도 있다는 것과 같다. 무척이나 다를 것 같지만 이 말은 굉장한 진실성을 가지고 있다. 이 잘난 남자의 하나뿐이고 고정적인 정부인 내가, 계속 이 남자의 부름을 받는 이상 나는 그의 총애를 받는다는 뜻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렇단 소린 그의 힘을 등에 업고 얼마든 그녀들의 횡포에 맞서 싸울 수도 있단 말과 다름 아니다. 게다가 내게 함부로 구는 그녀들에게 그의 이름을 들먹이며 오히려 협박을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서? 그래서 뭐가 달라지는가?

"우리 아빠는 점잖은 분이셨지만."

"……."

"그런 아빠에게 조차도 저를 공격하는 사람에게 마냥 당하고만 있으라고 배웠던 기억은 없어요. 우리 엄마는 상냥한 분이셨지만, 그런 엄마에게 전 단 한 번도 저를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무작정 인내하라고 배우지 않았다구요."

"……."

"그건 내가 그분들의 사랑스런 딸이기에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지요. 하지만, 하지만 지금의 저는 뭔데요? 저는 뭘까요?"

물을……마시고 싶다. 까칠해진 목에 통증이 이는 것보다 입에 가득한 피 냄새 때문에 속이 뒤집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나는 속을 내리 눌렀다. 그리고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향해 웃어보였다.

"당신의 이름을 뒤에 업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인정하기 보단 나라는 사람의 이 처량한 위치를 지킴으로써 제 자신을 잃지 않는 걸 택했을 뿐이에요. 제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을 택했기에 머리에 똥밖에 안 찬 저 형편없는 영애들의 짓거릴 그냥 내버려 두고 있는 거라구요. 그걸 모르고 계신 건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아시면서 떠보는 식의 말은 이제 하지 말아주세요. 조금 기분 나빠지려고 하니까."

내 말에 그가 가만히 숨을 들이킨다.

"그리고 아예 무시하실 게 아니라면 애초에 행동을 분명히 해주시던가요."

"……."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는 알아들었을 거다.

내 말에 딱딱하게 굳어진 입모양이 그가 알아들었음을 보여주었다. 늘 그렇듯 웃는 듯 입 꼬리가 올라간 상태 그대로 굳어버린 그의 모습은 어쩐지 무서웠지만 지금은 그런 걸 하나하나 따지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아팠고 아팠고 또 아팠다. 나를 잡으려 하는 그의 손길을 냉정하게 뿌리치고 나는 최대한 당당하게 걸었다. 문 쪽으로 걸어가는 내 앞에 레니의 울음기 가득한 얼굴이 보였지만 지금 내 정신으론 레니조차 신경 써줄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페터 리제도 공자에게만 슬쩍 고개를 숙여보이곤 그대로 걸어 나와 쭉 복도를 따라 걸었다. 다행이 처음 이곳에 왔던 길을 기억하고 있어 저택에서 나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느새 하늘은 제법 깜깜해져있었다. 다행이지. 이런 몰골로 밝은 대낮에 나왔다면 난리가 났을 테니까. 미친 여자 소리 듣기 딱 좋은 꼬락서니 아니겠냔 말이다.

……그것보다 어디로 가야 하나?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내가 갈 곳은 있나? 다들 힘든 일이 생기거나 슬픈 일이 생기거나 할 때는 어딜 갈까? 집?

무의식 적으로 떠오른 답안에 나는 피식 웃었다.

"……나한테 그런게 어디 있어."

내겐 집이 없다. 내겐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 없다. 그런 곳은 8년 전에 사라지고 없다. 배롤린이 내 집일까? 우습지도 않지. 그럼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그 남자의 수많은 별장 중 하나가 내 집일까? 이건 배롤린이 내 집이라는 것보단 조금 덜 우습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내 집이 될 수 있는데? 그 곳에 정하나 붙이지 않았건만 그 곳을 어떻게 내 집이라 부를 수 있을까…….

찬바람이 불어온다. 그 차가움에 몸은 떨려왔지만 활활 타오를 듯 불이난 양 볼은 오히려 시원하기만 하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난 대체……어디로 가야 하지?

정말로 모르겠다. 그래서 그저 조용히 걸었다. 다들 파티장에 있는 모양인지 리제도 백작가(家) 주변인 이 곳은 굉장히 한산했다. 우습게도 그 사실에 위로를 받는다. 이 모양을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저 되는대로 걸었다. 방향도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걸음 닫는 대로 마구마구 걸었다. 높은 구두에 발목이 아파 구두까지 과감히 벗어던졌다. 어차피 꼴이 말도 아닐게 분명할 텐데 구두 하나 더 벗어던지는 것이 대수인가 싶다.

미친년. 골고루 한다, 정말. 기분 좋은 일은 하나도 없는데 왜 웃음이 나오려고 하니?

하지만 여기서 실실 웃었다간 정말 미친 사람이 될 것 같아 웃지 않았다.

얼마를 더 걸었는지 모르겠다. 내 하루 운동량은 이미 초과된 것 같다. 다리도 아팠고 종아리도 아프다. 등도 아프고 무엇보다 발바닥이 아팠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어 멈춰 선 자리에 새하얀 건물이 보였다. 아치형의 새하얀 건물이.

여기가 어딘지는 어린아이들도 다 안다. 나도 안다. 하지만 늘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지 한 번도 들려본 적 없었던 곳, 바로 신전이었다. 누구의 신전인지도 몰랐지만 무언가에 이끌림을 받은 듯 나는 문을 열고 들어섰다.

끼이익-.

밤이라 그런지 예배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깜깜한 공간 속 저 멀리 작은 불빛만이 보일 뿐. 그 빛이 생명인 것 마냥 나는 흐느적거리는 발걸음으로 다독여가며 빛을 향해 걸어갔다.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그만큼 다리가 너무 아팠다. 내일이면 퉁퉁 부어있을 내 다리를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발목을 하나씩 풀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허리 통증도 심하구나.

너무 많이 걸었어.

조금만 걸어도 쉽게 지치는 내가 오늘은 참으로 많이 걸어왔다. 발바닥이 따끔거리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바닥도 까진 모양이다. 나 때문에 신전이 더럽혀졌겠네. 작은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라고 중얼거렸다. 딱히 누구에게 한 말인지는 스스로도 몰랐지만.

"자매님?"

그 때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나를 부르는 것이 맞을 거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분명 나밖에 없을 테니까.

뒤를 돌아보니 사제로 보이는 한 남성이 서 있었다. 이 시간에 찾아온 낯선 여자인 내 모습에도 잔잔한 미소를 보이던 그는 돌아본 내 얼굴이 사정없이 망가져 있는 것을 보고 눈을 조금 치켜떴다. 하긴, 이렇게 멋지게 망가지기도 참 힘들 거다. 나는 고개를 숙여 시선으로부터 얼굴을 피했다.

……창피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이런 꼴, 나도 창피하다고.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는 내 모습이 어떻게 보였는지는 모르겠다. 잠시 동안 이어진 침묵을 깨고 사제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린다.

"다치셨군요.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

정신병원에서 막 탈출한 미친 여자로 보아도 할 말 없을 내 몰골에도 그는 다정했다. 마치 내가 그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지 그는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가만히 내 눈을 쳐다보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내 뺨에 가져다댄다. 나를 배려하는 그 행동이 고마워 조금이라도 웃어 보이려 했지만 상처 때문에 얼굴 근육하나 내 맘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말았다. 그런 내 대신 그가 웃어 보인다. 마치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곧 하얀 빛이 그의 손에서 터져 나왔다. 쓰라리다 못해 눈이 휭 돌만큼 아리던 아픔이 조금씩 사그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눈을 감았다.

빛이 너무 따뜻해서, 생각지도 못한 그 따스함 때문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올 기미가 없었던 눈물이 이제야 나오려는 것 같아서,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숨을 골랐다.

"……심하게 긁히셨습니다."

"……."

"이제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내 인사에 그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다.

"예배가 끝난 시각이라 불을 켜두고 있지 않았습니다."

어둠에 대한 사과라도 하는 걸까? 그렇게 말하며 그가 다정하게 웃어 보인다. 나도 마주 웃어 보이는 시늉을 해보였지만 아마 내 웃음은 무척이나 어색했을 거다.

"댁이 어디십니까? 늦은 시각이니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집이라,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씁쓸하게 웃고 말았다. 원래 내 집이었던 곳은 루노 안에 있었으니 이 신전과 그리 멀진 않았겠지.

"전 집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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