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는 아름답다-18화 (18/206)

< -- 18 회: #2-2 그 남자 -- >

처음 그녀를 안고난 그 후.

뮤는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자주 그리고 많이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그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도 과감히 치러냈다. 배롤린 남작 가(家)에 있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그녀를 위해 그의 별장을 내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가 소유한 많은 별장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지금까지 뮤는 다른 사람에게 이정도로 배려했던 적이 없었다. 그게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하지만 뮤는 그녀의 거처를 자신의 별장으로 옮긴 것이 꽤나 맘에 들었다. 그녀가 배롤린 가(家)에 계속 머무는 건 뮤에게도 상당히 불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행동은 사교계에 엄청난 가십거리를 불러왔다. 온 사교계에 그녀의 존재가 알려진 것이다. 사람들은 공작의 여자가 된 그녀에 대해 폭발적인 관심을 가졌다. 일거수일투족 그녀와 관계된 모든 것들이 쉴 새 없이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여인들은 대부분 질투에 불타 있지도 않은 일들을 만들어 그녀를 욕보였지만 그나 그녀나 그런 것에 대해선 무관심했다. 어떤 말이 돌아도 신경 쓰지 않았다. 뮤는 그런데 일일이 신경 쓸 만큼 한가하지 않은 남자였고 또 딱히 신경 써야 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가십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딱히 그녀와 관련된 일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뮤는 사교계가 뭐라고 떠들어대든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었다. 어차피 사교계에 떠도는 대부분의 소문은 다 거짓말들이다. 그 거짓말이 대부분인 소문은 또 다른 거짓을 만들어내고 또 다른 거짓을 만들어 내고. 사교계는 그런 거짓들로 웃고 즐기는 이들의 모임 아니던가.

그의 여자가 된 그녀 역시 사교계의 행보에 대해선 그다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뮤보다 더 무심했다. 그녀는 사교계를 아예 무시하고 있었다.

그의 예상대로 그녀는 조금도 그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귀찮게 하기는커녕 그가 먼저 찾지 않으면 아예 그를 찾아오지도 않았다. 깔끔해도 너무 깔끔한 그 행동에 뮤는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자기가 친히 여자를 찾아가다니.

그녀를 안기 위해 마차를 보내다니.

그 웃기지도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지만 워낙에 깔끔을 떠는 여자를 안으려다 보니 별 짓을 다한다 싶었다. 그리고 그 별 짓이 생각보다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가끔, 뮤는 너무나도 미련 없다는 듯 구는 그녀의 차가운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알브레히트 공작의 여자' 혹은 '알브레히트 공작의 정부'라 불렀다. 모두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녀의 호칭엔 그녀의 이름 대신 뮤의 이름이 들어갔다.

"누굴 닮았지?"

어느 날 관계를 마치고 거친 숨을 고르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가 물었다. 아직은 많이 벅차하는 어린 그의 여자를 배려하기 위해 뮤는 연달아 그녀를 취하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조금 쉬게 해주고도 싶었고 그리고 하얀 얼굴에 피어오른 붉은 기운을 내려다보는 것도 꽤 뮤의 맘에 들었기 때문에. 늘 단단하고 꼿꼿하게만 굴 것 같은 그녀가 거친 숨을 어찌하지 못하고 이렇게까지 흐트러져 버리다니.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은 묘한 즐거움을 뮤에게 주었다. 또 새하얀 그녀의 살결에 피어난 자신의 붉은 흔적들도 뮤는 맘에 들었다. 뻣뻣하게만 구는 그녀를 조금이라도 더, 더 흐트러뜨릴 수 있다면 온 몸에 키스마크를 만들어 줄 의향도 있다.

"네?"

"누굴 닮았냐고."

딱히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그저 생각나서 물어본 것일 뿐. 하지만 그의 질문에 그의 여자의 얼굴은 한순간에 냉랭해졌다. 격렬한 관계로 인해 떠올랐던 나른함을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쓸데없는 질문 따윈 하지 말아요."

"쓸데없는 질문?"

생각지도 못한 격한 반응에 뮤의 미간이 슬며시 좁아졌지만 그의 여잔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의 보좌관들이 봤다면 불쾌해진 그의 심사를 눈치 채고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을 테지. 하지만 그의 여잔 입을 다물지도 그렇다고 자기보다 더 냉랭한 얼굴을 풀지도 않았다.

"월권이란 말 알지요?"

"……."

"지금 당신이 나한테 한 행동이 그 것과 똑같아요."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깊게 관여하지 말라는 자기 여자의 말에 뮤는 좋았던 기분이 급속도로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본심을 숨기고 얼굴에 웃음을 띠운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다정한 목소리로 자신의 여자에게 물었다.

"월권? 내 행동이 월권이라고?"

굳이 그녀에게 묻지 않아도 뮤가 알고자 한다면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는 남자다. 그만한 능력이 있고, 힘이 있고, 또 경제력을 갖췄다. 그 누구도 그에게 건방지게 굴지 못했다. 이토록 냉랭하게 굴지도 않았다. 아니 굴지 못했다. 모두 그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뮤는 자기가 조금만 힘을 줘도 툭 하고 부러질 것 같은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냉정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녀를 죽이는 것쯤은 우스운 일이다.

피식.

뮤는 갑자기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그녀의 목덜미에서 시선을 돌려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곧고 바른 하늘빛의 눈동자가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형형하게 빛이 났다. 그런 그의 생각을 비웃듯 매혹적으로 올라가는 그녀의 입술을 보는 순간 뮤는 일그러지는 입매를 애써 다잡으며 웃었다. 속에서 이는 살기를 내려 누르기 위해서 더욱더 활짝. 그 때 뮤는 깨달았다. 어린 그의 여자는 죽음 따위는 조금도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어째서 너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월권이라는 건지 모르겠군. 너는 내 여자가 아니던가?"

뮤의 질문에 그의 여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당신의 여자가 아니라, 정부죠."

"정부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정부라는 단어를 입에 담고는 했다. 딱히 그 단어가 틀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건만 지금 이 순간엔 정부의 '정'자만 들어도 욕지기가 이는 기분이다.

"단순한 정부치곤 대접이 후하다 생각지는 않고?"

"제가 그 대접을 해달라 요구한 적 없어요."

"……."

"그거 알아요? 꽃은 가장 만개할 때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요. 시들고 난 뒤에는 사람들의 사랑은커녕 시선도 받지 못하죠. 하지만 꽃이 시들고 난 그 뒤부터가 새로운 위대한 탄생이라는 걸 아무도 모르죠. 아니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들과 상관없는 일이니까."

아하. 원래 사랑받을 때 가장 대접이 후하다 이건가? 사랑이 시들면 버려지는 것이 순서요, 이치고?

당연하다. 맞는 말이다. 굳이 이 여자가 정부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보더라도 모든 사람들의 사랑은 똑같지 않느냔 말이다. 사랑할 때 가장 불타오르고 사랑이 져버리면 그 불꽃이 모두 사그라지는 건.

그러니 그녀는 지금 뮤 자신에게 그가 지금 그녀에게 후한 대접을 하는 이유는 그가 멋대로 그녀에게 그리 대접한 것이니 그것에 대해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 따위는 바라지 말라-는 참으로 오만한 말이었다.

건방진 것.

하지만 뮤는 그녀의 말에 가장 화가 나는 부분은 따로 있다는 것을 제대로 직시했다.

<시들고 난 뒤부터가 새로운 위대한 탄생이죠.>

"재미있군."

뮤의 입가에 비틀린 웃음이 걸렸다.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누워있었기에 그녀는 다행이도 그런 그의 모습을 보진 못했다. 보았더라면 아무리 담담한 그녀라 해도 마냥 뻣뻣하게 굴진 못했을 것이다. 다른 영애들처럼 두려움에 울기까지는 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녀는 이미 그와의 이별 뒤의 삶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냉정한 눈으로 그녀의 하얀 등을 쳐다보았다. 이불 위로 쏟아져 있는 하늘빛 머리칼을 붙잡아 키스하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냉랭했다. 그녀의 꼿꼿한 등처럼.

탁.

뮤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육체를 확인하곤 미련 없이 침대에서 벗어났다. 그녀를 안고 싶은 욕망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욕실로 들어온 그는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생각했다.

너 따위 것, 얼마든지 버려줄 수 있노라고.

♠♠♠♠♠♠♠♠♠♠♠♠♠♠♠♠♠♠♠♠♠♠♠♠♠♠♠♠♠♠♠♠♠♠

"앞에 잠복한 이들이 있습니다."

호세가 뮤의 곁에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아아."

호세의 말에 뮤가 가만히 고개를 끄떡여 보인다. 무심해 보이기까지 한 뮤의 행동엔 긴장은커녕 귀찮음만이 가득했다. 사실 호세는 자기보다 자신의 주군이 이미 먼저 그 사실을 눈치 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세와 루이 등이 비록 주군의 보좌관으로 있기는 하나 사실상 그들 중 주군보다 더 강한 이는 없기 때문이다.

"일곱."

뮤가 숨은 자들의 정확한 수를 짚어냈다.

호세의 예상대로 뮤는 이곳에 다다르기 훨씬 전부터 잠복한 이들이 있다는 걸 눈치 채고 있었지만 모른 척 했다. 그리 큰 피해를 입을 것 같지도 않고 어차피 피해봤자 귀찮은 것들은 어디든 들러붙기 때문에 애초에 그 싹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 가장 편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 근래엔 서류 업무가 많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고. 이렇게 한 번씩 몸을 풀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리석기는. 감히 저 정도로 날 어쩔 수 있으리라 생각한 건가?"

내용에 비해 한없이 가벼운 뮤의 말투에 곁에선 루이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딱히 암살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탐색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주군의 실력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무니까요. 은둔에 능한 자만 일단2명입니다."

"탐색은 무슨 탐색. 죄다 죽어서 돌아갈 것을."

어차피 자신의 목숨을 노린 자는 살려둘 필요가 없다. 뮤는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잠복하고 있는 이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짚어내 쳐다보았다. 그 흔들림 없는 시선에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인영들의 사이에 작은 동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인영들은 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죽어라."

"고전적이군. 진부한 대사기도 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