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 회: #2 -- >
"그럼?"
"그냥 '텔'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에요. '텔'이요. 애완동물이여서가 아니고 아기고양이여서가 아니고 그냥 '텔' 자체가 마음에 들었어요."
그랬다. 나는 '텔'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평소 꽃을 무척이나 사랑하긴 했지만 애완동물에 대해서는 딱히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렇군."
그가 싱긋 웃는다. 그렇게 웃는 모습은 이 어둠을 밝힐 만큼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지만 간혹 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그런 웃음에 알 수없는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처럼.
"왜……그러세요?"
"글쎄."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내 속살을 향해 파고들고 있었다. 그 움직임에 얼음도 잠시, 나는 가슴께로 올라오려는 그의 손을 옷 위에서 움켜쥐고는 재빨리 말을 내뱉었다.
"'텔'이 있다니까요. 아기 고양이예요, 아기 고양이."
내가 유독 아기라는 단어에 강세를 줘 말했지만 그는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다. 사실 나도 내 말이 완벽히 이해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상하게도 '텔'이 마음에 걸리는 걸 나보고 어떡하란 말인가.
"그만 좀 튕기지?"
"이건 튕기는 게 아니라, 아, 정말 그런 게 아니라구요."
이젠 억울할 지경이다. 그런 내 표정이 그는 맘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순간 그의 눈에 사나운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정말 한순간이었다. 마치 내가 헛것을 본 건 마냥 그의 눈빛은 평소의 것으로 돌아왔으나.
"……."
꿀꺽. 마른 침을 삼켜보았다. 반짝반짝 아름다운 에메랄드빛의 눈동자가 내게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 빛에 나는 차마 고개조차 돌릴 수 없었다.
그의 입술이 가만히 내 입술 위로 내려앉는다. 말랑말랑한 내 아랫입술을 한참이나 깨물어대던 그가 어느 순간 쏙 자신의 혀를 내게 집어넣었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스할 땐 눈을 감는게 어떤가?"
"왜 저 혼자 감아요? 먼저 감으세요."
"고집은."
"이건 고집이 아니-, 히힉!"
갑자기 그가 내 가슴을 세게 움켜쥐는 바람에 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의 손을 피해보고자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댔지만 그런 내 작은 반항은 그의 몸이 내 위에 딱 달라붙어 있어 오히려 그를 더 자극시키는 것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 남자가 방금 전 했던 내 말은 다 어디로 내동댕이쳤는지 모르겠다. 그는 오늘도 기어코 자기의 욕심을 채울 생각인가 보다.
나쁜 놈! 한번은 내 말도 좀 들어줄 것이지. 그동안 내가 잠자리를 하기 싫다는 이유로 거부한 적 있었니? 꼬박꼬박 잘 받아줬잖아!
그런데도 이 남자는 오늘 처음으로 해본 내 반항 따위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이래서 약자는 서러운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냥 몸에서 힘을 뺐다. 어차피 내 힘으로 그를 막는다는 건 어불성설이고 끝까지 반항이라도 해보겠다는 심산으로 버둥거려봤자 나만 힘들 테니까. 내가 순순해졌단 걸 안 그의 동작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내 등을 따라 야하게 내려가는 손자국을 느끼며 나는 슬쩍 '텔'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누워있는 상태로는 '텔'이 보이지 않았다.
"집중하지?"
"……집중하고 있어요."
"이젠 거짓말까지 하는 군."
하여튼 귀신같은 남자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는 내 어설픈 연기에 그는 속지 않았다. 어쩜 그렇게도 날카로우신지 모르겠다.
그가 몸 안으로 들어왔을 때, 이상하게도 조금, 아니 꽤 많이 아팠다. 아무래도 자꾸 다른데 신경이 쓰이다 보니 그의 몸을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된 모양이다. 안 그래도 벅찬 그가 오늘따라 더 벅차 나는 숨을 헐떡여야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런 나를 배려해 잠시 쉬어주었을 그가 오늘은 그조차 하지 않을 듯 보여, 나는 재빨리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꼭 끌어안았다. 모든 힘들 동원해 있는 힘껏!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고?"
웃음이 가득한 그의 목소리가 가까이, 아주 가까이에서 들린다. 그 달콤하고도 쌉쌀한 소리에 순간 오도독 소름이 돋았다. 나는 그에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내 의중을 다 파악한 모양인지 그제야 내 뜻대로 잠시 멈춰주었다. 사실 그의 움직임을 멈추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끌어안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는 내 뜻을 너무나도 잘 알아챈다. 항상. 무서울 정도로. 그래도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하지만 마냥 잠자코 나를 배려해 준 것은 아니다. 움직이는 대신 그는 내 귓불을 자글자글 씹어대고 있었으니까. 아프진 않았지만 기분이 묘했다. 너무 가깝게 들려오는 그의 숨소리도 어색했고 예민하게 느껴지는 뜨거움도 어색하고. 그러던 그가 한순간 내 귓불을 조금 강하게 깨문다. 나는 아얏! 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어둠속에 익숙해진 눈에 그의 형상이 어렴풋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길게 한숨을 내쉬던 그가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최대한 통증을 덜어주기 위해서인지 천천히 움직여주는 배려에 나는 서툴지만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몸을 움직였다. 움직이다 지치면 최대한 몸에 힘을 빼고 그의 것을 얌전을 받다 또 그의 동작에 맞춰 움직이고.
참 이상하지. 내가 아주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도 전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그가 느껴지니. 한 두 번이 아닌 관계에 낯설 것도 없을 텐데도 순간 소름끼치도록 느껴지는 그 낯섦에 깜짝 놀라 그의 목에 감았던 두 팔을 풀어버리고야 말았다. 그랬더니 그게 맘에 들지 않았는지 욕망에 짙어진 사나운 목소리가 내게 낮고 강렬하게 명령했다.
"둘러."
그 명령 아닌 명령에 나는 바로 그의 목에 다시 팔을 둘러야했다. 그리고 다시 그를 끌어당겼다.
부담스러운 그의 눈길을 내내 받아야하는 것보다 차라리 살과 살이 닿는 편이 더 나아.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린 그의 아름다운 금발이 무척이나 간지러웠다. 긁고 싶었지만 목에 두른 손을 풀면 그가 또 화를 낼 것 같아 애써 참아야 했다.
"하악. 하악."
몸이 달뜬다. 나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사실 우리 둘의 관계에서 내가 하는 건 별로 없다. 그저 그를 무사히 받아내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의 몸이 오를 때면 내 몸도 함께 올라간다. 그의 몸이 내려올 때면 내 몸도 함께 내려온다. 그렇게 맞부딪히는 마찰력으로 인해 일어나는, 아직까지도 내게는 낯선 기묘한 느낌에 가만히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렇게 나는 그가 동작을 멈출 때까지 가만히, 오늘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가 움직임을 한 차례 멈췄을 때 나는 바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늘은 더는 무리다. 다른 때보다 긴장을 더 많이 한 탓이다.
"쯧쯧."
어쩐지 불만스러운 그의 목소리가 들린 듯도 했지만 차마 확인할 기운이 내겐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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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날로부터 며칠 뒤.
나는 라니로 인한 우울함에서 일단 벗어나기로 했다. 우울은 파고들면 끝없이 이어지는 경향이 있어 어느 선에선 단호하게 끊어내야 한다.
"잘 부탁드려요."
"걱정 마세요, 아가씨. 정확히 그 분 손에 전해드리고 돌아오겠습니다."
나는 '텔'을 시녀에게 건네주었다. '텔'의 목에는 하얀색에 잘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은 목걸이가 걸려 있다. 그 목걸이에는 고양이의 이름을 알려주듯 '텔'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텔'을 하룻밤 내게 맡기고 갔던 레니는 그 다음날 키아라는 고양이가 있든 없든 신경도 쓰지 않는다면서 그냥 나보고 가지라고했다. 그래서 나는 며칠 동안 '텔'과 쭉 함께 지냈다. '텔'은 그동안 내게 익숙해진 덕분인지 이제 다른 사람을 봐도 처음처럼 경계하지 않았다.
"'텔'. 그녀라면 나보다 더 너를 잘 보살펴 줄 거야. 그리고 나보다는 그녀에게 네가 더 필요할 것 같아. 널 버리는게 아니야. 널 더 좋은 주인에게, 너를 더 필요로 하는 주인에게 보내주는 거야."
"야옹~."
나는 '텔'을 라니에게 보냈다. 라니라면 '텔'을 잘 기를 것이다. 그리고 '텔'은 라니의 공허한 마음에 어느 정도 위안을 줄 것이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라니야……. 네가 텔에게 애정을 준다면 텔을 두고 쉽게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겠지……. 그렇지? 난 그렇게 믿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