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 회: #2 -- >
레이는 레이준 공자의 애칭으로 레이준 공자는 롱아르 백작 가(家)의 후계자이자 레니의 남동생이다. 사촌간의 결혼은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고 또 심심치 않게 있어왔기 때문에 키아라 영애가 자신의 사촌인 레이준 공자를 좋아한다는 건 사회적으로 딱히 문제가 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사자의 누나인 레니에게는 큰 문제였던 모양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대로 된 정신을 가지고 있는 남자라면 그런 여자는 선택하지 않을 걸? 그렇지 않아?"
"나도 레이가 키아라를 선택할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하지만 고 계집애가 레이에게 알짱거리는 것만 봐도 짜증이 나는 걸 어떻게."
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해 못해줄 것도 없다. 내가 만약 레니와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 역시도 짜증이 났을 것이 틀림없으니까. 되먹지도 못한 사촌이 자신의 올케가 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내 손가락 끝에 따뜻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
시선을 그곳에 가져다 대자 '텔'이 작은 혓바닥으로 내 손가락 끝을 핥아대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마치 독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처럼.
"어라? '텔'이 너한테도 마음을 주려나 보다. 처음 나한테 다가왔을 때도 이랬거든. 근데 좀 속상하네? 나는 하루 종일 달래고 또 달래서야 겨우 '텔'을 안을 수 있었는데. 너한테는 너무 쉽게 간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레니의 목소리는 오히려 무척이나 신이나 있었다. 아무래도 '텔'이 키아라 영애에게 당했던 것들이 어지간히 속상했던 모양이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건 아니라고 알려주려는 것 같은 레니의 행동에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꾹 참아야 했다. 갑작스런 웃음에 텔이 놀랄까봐.
나는 기다려주었다. '텔'이 더 안심하기까지. '텔'은 한참을 내 손가락을 핥다 조심스럽게 레니의 품에서 나와 내 손바닥 위로 올라선다. 나는 손이 작은 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 손바닥에 완벽히 올라설 수 있을 만큼 '텔'은 더 작았다. 나는 내 손바닥 위에 주저앉은 '텔'이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천천히 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야옹~.
가냘프고 청아한 '텔'의 울음소리는 누가 들어도 갓난아이의 것이었다. 나는 품에 안은 '텔'이 편히 있을 수 있게 한 팔로 몸을 지탱해주고 나머지 손으로 작고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자 '텔'이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내 품에 얼굴을 비벼댔다.
"'텔'. 이젠 안심이 되니?"
내 품안에서?
그런 내 질문이 바보스럽게 느껴질 만큼 '텔'은 편안한 표정이었다. 호기심 많은 고양이답게 그제야 주위를 휙휙 둘러보기도 한다. 처음 레니의 품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텔'은 이제 확실히 안심하고 있었다.
"키아라 때문인지 우리 집에서는 꼼작도 하지 않으려 했는데. 다행이다."
아직 품 안에서 벗어나 방 여기저기 둘러보는 건 불안한 듯 보였지만 꾸준히 사랑받는다면 차차 나아지겠지.
꾸준히 사랑받는다면 나아지겠지.
사람도, 사람도 그럴까? 그럴 수 있을까? 나아질 수 있을까? 라니야, 너도 그리고 나도 나아질 수 있을까? 응?
'라니 너를 데려와야 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너와 함께 이곳에 와야 했어.'
배롤린 가(家)에 라니가 사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 곳은 라니의 집이니까. 하지만 라니는 그곳에서 살 수 없었다. 편히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러기에 라니는 배롤린 남작과도 또 그녀의 오빠인 론과도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어쩌면 라니는 혼자 도망치듯 이곳으로 와 버린 내게 화가 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곳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지 알고 있는 라니 외의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바스락 거리며 내 품에서 빠져나가려는 '텔'을 놔주었다. 적응력 빠른 '텔'은 이제 이 장소에 대한 불안감마저 이겨냈는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자신의 호기심을 채워나갔다. 쿠션을 밟아보기도 하고 쿠션에 달린 레이스를 물어뜯기도 한다. 소파 밑으로 내려가 여기 저기 킁킁거리며 돌아다니는 그 모습에 나는 웃었다. 왠지 행복했다. 요 며칠 동안 계속됐던 두통이 사라졌다.
텔은 나아졌다. 금새.
이상하게도 그 사실은 눈물이 날만큼 내게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정말 눈물이 날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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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고양이지?"
자던 도중에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뜨자, 언제 온 건지 모르겠지만 그가 내 곁에 누워있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씩 그는 이렇게 늦은 시간, 내가 자고 있을 때 찾아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 비명을 지르는 불상사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이 말은 처음 그가 이런 늦은 시간에 찾아왔을 땐 내가 꺄악~! 비명을 질렀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내 탓만도 아니다. 한참 잠자고 있는데 침대에서 다른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면 누구라도 놀랄만한 일이었을 테니까.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늦은 시간에 내가 왜 왔겠나?"
"……."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려댔다. 하긴, 그도 그렇다. 이 남자가 나를 찾은 이유를 '그것' 외에 다른 무엇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나는 힐끔 고개를 돌려 '텔'을 보았다. 나는 레니에게 '텔'을 하루만 데리고 있을 수 있도록 부탁했고, 자신의 고양이도 아니면서도 레니는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텔'이 없어져서 골탕 좀 먹어보라지. 아니, 어쩌면 없어졌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년이긴 하지만."
집에 돌아가기 싫어하는 레니. 그런 레니의 심보를 뻔히 안다는 듯 친히 롱아르 백작이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면 아마 레니는 이곳에서 하룻밤 머물렀을 거다.
'만약 그랬다면 이 남자와 조우했을 테니 돌아가는 편이 더 나았다, 레니야.'
나는 가기 싫다는 뜻을 대놓고 표현하던 레니의 얼굴을 떠올리고 살포시 웃었다.
'텔'에겐 '텔'의 몸보다 훨씬 큰 베개를 침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꺼내주었다. 그 위에서 기분 좋게 눕던 '텔'을 바라보며 나는 그 베개를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하지만 내가 두었던 곳에 베개가 보이지 않아 몸을 일으키자 언제 베개를 저쪽으로 옮긴 건지 베개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다.
"공작님께서 저기다 '텔'을 옮겨놓으셨어요?"
"'텔'?"
"고양이 이름이요."
그 말을 하고 '텔'을 살펴보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가 두 팔로 내 몸을 끌어당긴다. 제법 강한 힘이었다. 적어도 내 몸이 더는 움직이지 못할 만큼.
"어딜 가?"
"텔 좀 보려고요."
"왜?"
"잘 자고 있나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그리고 목소리 좀 낮춰요."
"왜?"
"텔이 깨잖아요."
"하."
그가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찬다.
하지만 나는 '텔'이 깰까 봐 한껏 목소리를 낮춰서 말하는데 그에 반해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니 그런 내 타박은 당연한 거였다. 물론 내 기준에서는.
다시 한 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는 내 몸을 놔주지 않았다. 좀 놔달라는 듯 꿈틀거려보았지만 오히려 그는 내 어깨를 잡아 누르고 내 몸 위로 올라선다. 점점 가까워지는 얼굴을 멀뚱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내 귀에 그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내 권고를 받아들인 듯 낮은 목소리였다.
"걱정 마라. 아마 저 고양이가 깬다면 그건 내 목소리 때문이 아니라 다른 소리 때문일 테니까."
"다른……뭐요?"
그러자 그가 입술 끝을 묘하게 올리는데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그 미소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내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 남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 없다. 하지만.
"설마 고양이가 있는데도 하겠다는 말씀은 아니시죠?"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
"아기고양이라구요."
"……."
그는 어딘가 부족한 사람을 쳐다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제정신인지 심히 의심된다는 적나라한 시선 앞에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진심인가?"
"진심이 아닐 건 또 뭔데요?"
내가 반박하자 그는 잠시 몸을 일으켜 테이블 위 고양이를 쳐다본다. 갸르릉 거리는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사랑스런 숨소리에 나는 미소 지었다. 다행히 아직은 깨지 않은 모양이다.
"웬 고양이지?"
"레니가 가져왔어요. 너무 귀여워서 하룻밤만 데리고 있게 해달라고 제가 부탁했구요."
"고양이가 가지고 싶은 건가?"
고양이가 가지고 싶은 거냐고? 지금 나에게 애완동물을 원하는 거냐고 묻는 건가?
의도를 알고자 내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지만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을 확인할 능력이 내겐 없었다. 설령 대낮처럼 밝았다하더라도 그의 뜻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나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분위기를 풍기는 그에게 입을 열었다.
"애완동물을 가지고 싶은 게 아니에요. 고양이를 딱히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