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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15화 (15/206)

< -- 15 회: #2 -- >

라니를 보았다. 화원에 가는 길목에서. 언제나 반듯한 자세로 라니는 서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저 하릴없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라니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딘지조차 모르고 있는 듯 보였다. 거의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이는 그런 라니의 위태로운 상태에 불현듯 불안감이 온 몸을 감싸온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그런 라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시선을 돌리는 일 없이 그렇게 라니만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라니는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한 채 그저 앞만 보고 서 있을 뿐이다.

나는 안다. 지금 이 순간 라니의 시선 속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라니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니가 나를 돌아보지 않는단 것을.

얼마 전에 사건은 나도 전해 들었다. 배롤린 남작이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시녀를 겁탈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시녀가 자살했다는 것을 말이다. 시녀의 자살 사건은 시끄럽다면 시끄러운 하지만 관심 없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별 볼일 없는 사건 중 하나에 불과했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시녀의 행동에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그 배후를 몰래 알아보자 그 시녀는 결혼을 앞둔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서 배롤린 남작의 짐승 같은 짓에 더 큰 상처를 받았다고. 아마 자살 전 결혼이 취소되었다는 사실 역시 여자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사실 그런 더럽고 역겨운 일은 내가 배롤린 남작 가(家)에 살고 있었을 때에도 여러 번 일어난 적 있는 것들이다. 배롤린 남작과 론이 번갈아 가며 사건을 터트렸었더랬지. 세상에 알려진 그런 배롤린 부자들의 더러운 행동에 사람들은 경악해댔지만, 그들은 알까?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그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라니는 가슴에 품은 단도를 손에 꺼내 쥐고선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잘 다려진 시퍼런 날을 보면서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던 라니의 모습. 그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단도를 빼앗은 사람은 나였다. 우정이 두텁다 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지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서로를 가장 이해하는 건 라니와 나였다. 웃기게도 서로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기에 우린 서로를 친구라 부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사실을 나는 그 지옥을 벗어나고서야 깨달았다.

역시 그날, 너도 함께 나왔어야 했어.

심장이, 누군가가 내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 아파왔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 진부한 표현이 가장 정확할 때가 있다. 지금의 나처럼.

아프다는 말은 어떻게 해야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라니의 모습을 아프게 바라보았다. 누군가 나보고 얼마나 아프냐고 묻는다면 나는 라니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라니의 모습 자체가 아픔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도 그런 것 따윈 묻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아픈지 또 얼마나 상처 받았는지에 대해서.

그 때였다. 누군가 라니에게 다가간다.

내가 모르는 귀족영애다. 하지만 내가 아는 귀족영애가 원체 드물기 때문에 내가 모른다 해서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 영애는 바람에도 사그라질 것 같은 라니의 위태로운 모습에도 아랑곳없이 다가와 라니를 상념에서 끌어냈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라니가 영애에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그 둘은 귀족영애가 타고 왔던 마차에 함께 올랐다. 나는 힐끔 그 마차를 보았다. 그 영애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마차에 새겨진 가문의 표식은 알아볼 수 있다.

노르젠 후작 가(家)라.

그 마차는 노르젠 후작 가(家)의 마차였다. 나는 마차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라니의 모습이 계속 아른거려댔다.

화원에 가려는 계획은 취소했다. 그냥 쉬고 싶었다.

배롤린 남작 가(家)에서 나오고 난 뒤 라니를 따로 만난 적은 없었다. 오늘처럼 우연히 라니를 발견하고 그 모습을 멀리서 쳐다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하지만 오늘과 같은 만남을 만남이라 부를 수는 없지 않을까? 짧은……대화조차 나누지 못했는데.

역시 너와 함께 나왔어야 했어.

머리가 지끈거려댔다.

그 날, 별장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 손을 놓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곳에 너를 혼자 두지 말았어야 했다고.

라니의 모습을 멀리서나마 훔쳐보고 나면 나는 한동안 우울해하곤 했다. 그렇게 며칠을 우울해하고 있는데 레니가 나타났다. 품속에 이제 갓 태어난 듯 보이는 새하얀 새끼고양이를 안고서.

"이게 뭐야?"

"고양이잖아. 보면 몰라?"

"그러니까 웬 고양이냐고."

내 말에 레니가 좋아 죽겠다는 듯이 히히 웃어댄다. 그 웃음에 나는 조금이나마 우울했던 마음을 위로받았다.

"키아라가 데리고 온 얜데, 그 재수 없는 계집애가 하도 잘난 척 해대서 몰래 데리고 나왔어. 아마 지금쯤 찾는다고 난동을 부려대고 있을 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며 킥킥거려대는 레니의 모습은 악동 그 자체였다. 치렁치렁한 레이스며 긴 머리칼이 아니었더라면 남자아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렇다고 남의 고양이를 막 데려오면 어떻게 해?"

"몰라 몰라. 잔소리 하지 마. 그 계집애가 얼마나 짜증나게 구는지 네가 몰라서 그래. 정말 잠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아. 그리고 사실 이 고양이도 그 악독한 키아라 년한테서 잠깐이라도 떨어진 것에 대해 좋아할 걸. 여기 봐봐, 여기."

레니는 새끼 고양이의 귀 뒷부분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 곳엔 생긴 지 얼마 안돼 보이는 상처가 나 있었다. 그것은 분명 날카로운 무언가에 찢긴 상처였다.

"이 상처의 원인이 뭔지 알아?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말도 안 나와. 내게 잘 안겨 애교를 부려댔다는 것이 이 고양이가 상처를 입어야 했던 원인이라는 것이 믿겨져? 내 품에 안겨있는 고양이가 짜증난다면서 순식간에 빼앗아 던져버리더라고. 그 끔찍한 행동을 다른 사람들도 봤어야 하는 건데! 하여튼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내숭이 구단이지! 정말 얄미워 죽겠어. 이 귀엽고 앙증맞은 새끼고양이를 어떻게 그리도 무식하게 던질 수 있는 거야? 이해할 수 없다니까 정말. 못된 계집애, 나쁜 계집애, 성격 더러운 걸로만 따지면 세상 최고의 계집애! 악독하고 악랄한 계집애!"

레니는 한껏 인상을 쓰고 있었다. 레니의 말에 나도 눈썹을 찌푸렸다. 세상엔 상대하기조차 싫은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상대하기는커녕 얼굴조차, 눈조차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

키아라는 레니의 사촌이었지만 무척이나 이기적인 아이였다. 안하무인에다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한숨 나오는. 그래, 딱 아를랜디 영애와 같은 스타일이다.

정말 놀라운 일들이 아닐 수 없지. 그런 사람과 레니가 조금이라지만 같은 피가 이어졌다는 것이. 배롤린 남작 같은 사람이 라니의 친부라는 것이. 그토록 사랑스런 라니에게…… 배롤린 남작과 같은 피가 반이나 흐르고 있다는 것이.

나는 아기고양이를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귀여웠다. 몸짓이 작은 걸로 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생겨버린 모양인지 레니의 품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가 가만히 손을 내밀어 보았지만 새끼고양이는 내 손을 가만히 쳐다만 볼 뿐 여전히 레니 품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리 오렴, 텔."

"텔?"

갑작스럽게 불린 이름에 레니가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얘 이름이 뭔데?"

"……몰라. 하지만 키아라 계집애도 얘를 그냥 고양이, 고양이라고만 불렀어. 지금 생각하니까 그것도 어이없네. 자기 애완고양이면서도 이름 하나 지어주지 않았단 말야? 정말 주인 자격이 없다니까."

레니가 다시금 구시렁구시렁 거려댄다. 사촌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맘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 카이라라는 영애가 왔었을 때도 같이 있기 싫다면서 여기 별장으로 도망쳐 왔었던 레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 어차피 이름 없네. 주인도 안 지어줬다면."

"그래서 꽃 이름을 얘한테 붙이겠다고?"

"뭐 어때? 어울리면 됐지."

"텔은 너한테 어울리거든?"

"텔은

'하늘의 사랑을 받는 꽃, 즉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자.'

란 뜻이야."

"그래서?"

"이 새끼고양이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뜻이지."

그 한마디로 나는 모든 것을 결정했다는 듯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 새끼고양이에게 집중했다. 영롱하게 빛나는 눈동자에 언뜻 상처가 엿보인다. 무엇을 경계해야 하고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지 모르는 순수한 아기고양이는 이미 받아버린 상처 때문에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처음부터 상처에 익숙한 존재는 없어. 그것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다르지 않으리라.

"이리 와, '텔'."

내가 다시 한 번 '텔'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텔'의 바로 앞까지. 하지만 거기서 더 움직일 생각은 없다. 나는 '텔'이 스스로 내게 안겨올 때까지 기다릴 심산이었다. '텔'은 판단한 거다. 레니를 '믿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듯이. 그렇게 안심되는 품에 안겨있는 '텔'을 억지로 끌어올 생각은 추호도 없다.

"뭐, '텔'. 나쁘진 않네.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니. 하긴 이 새끼고양이를 누가 미워할 수 있겠니? 누구라도 말야. 정말 나는 키아라가 싫어. 제발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라는 웃기지도 않는 명목으로 우리 집에 오지 좀 말았으면 좋겠어."

"친목을 다진대? 너와? 너는 그 영애가 올 때마다 여기로 피신 오는데 웬 친목?"

"그러니까. 내가 그토록 친해질 마음이 없다고 온 몸을 표현하는데 말이지. 흥."

흥분한 레니가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레니가 흥분해 있는 도중에도 나는 묵묵히 텔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나하고의 친목이 아니라 레이하고의 친목을 다지기 위한 것이겠지. 꼴에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레이를 좋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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