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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아름답다-11화 (11/206)

< -- 11 회: #2 -- >

"유나."

"아, 레니."

그래, 네가 왜 안 오나 했다.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레니가 온 이상 더 이상의 독서는 무리다.

나는 과다한 레이스로 온 몸을 무장한 채 나풀나풀 내게로 뛰어오는 레니를 쳐다보았다. 아, 눈이 끔찍하다. 하지만 이 루벤스 제국에서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다 준 사람이 있다면 바로 저 이상한 아이, 레이스를 심각하게 사랑하는 저 소녀 롱아르 백작 가(家)의 여식 레니아 롱아르 뿐이다. 그녀는 또한 이곳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 중 한명이고, 그리고 내 애칭을 허락받은 아이이기도 하다.

내 이름은 유니시이나다. 유니시이나.

아빠와 엄마는 나를 유나라고 불렀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나를 유나라고 부르는 사람은 라니와 레니를 만나기 전까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지금도 그 둘 외엔 없다. 서류상으로 나는 배롤린 남작 가(家)의 양녀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유니시이나 배롤린이라 말해야 옳겠지만 개뿔. 그 딴 성은 쓰레기통에나 처박으라지. 쓰레기도 괜찮은 건 재활용이라도 한다지만 이 이름은 재활용할 값어치도 없다. 배롤린이란 성을 다는 것보단 성이 없는 평민이 훨씬 낫다. 아빠의 성을 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빠가 버린 성을 내 맘대로 쓸 수는 없겠지.

하펜젤러. 아빠의 성(姓).

아, 물론 이제서 찾아가, 몇 십 년 전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뛰쳐나갔던 그 사람의 딸입니다-하고 나설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사실 아빠가 귀족이었다는 건 우연히 발견하게 된 아빠의 일기장을 보고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하펜젤러라는 성(姓)이 루벤스 제국의 귀족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재 내가 아는 한 루벤스 제국의 하펜젤러라는 귀족 성(姓)은 없다. 아무리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

'아무래도 아빠는 다른 나라에서 엄마랑 함께 이 루벤스 제국으로 온 것 일지도 모른다.'

는 거다. 다시 말하지만 이 성(姓)은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 발견한 일기장에서 알게 된 것으로 아빠는 살아생전 그 이름을 내게 알려준 적도, 또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 의지하라 일러준 적도 없다. 그리고 그건 홀로 남겨진 나를 걱정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휴.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일찍 내 곁을 떠나버리고 말았으니까. 아마 엄마 아빠도 생각조차 못했었겠지. 그렇게 일찍 나를 두고 떠날 줄은. 내 신랑 될 사람은 반드시 철저한 검증을 통해 고르겠다고 장담하신 아빠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내 손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을 거다.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키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가 되고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되고 여자가 되길 바란다고 속삭이셨던 엄마도-, 내 곁을 이렇게 일찍 떠나게 될 줄은 모르셨을 테고.

너무나도 슬프게 두 분의 다짐은 절대 이뤄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나는 가장 아름다운 소녀가 되지도 못했고 가장 아름다운 신부가 될 수도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결혼은커녕 나는 누군가의 정부가 되어버렸다.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받는 결혼식 따윈, 내겐 없을 일이다.

"유나, 왜 갑자기 그런 표정?"

"……그냥. 내 이름을 부르는 네가 감격스러워져서."

"……뭔 소리야?"

"몰라."

뭔 소린지 나도 모르겠다. 이젠 낯설어진 내 이름을 오랜만에 들어서 감성적이 되버렸나보다. 아니, 사실 난 이렇게 감성적인 아이인데 사람들은 왜 그걸 몰라주는지.

"유나, 유나."

"왜?"

"어제 공작성에 갔다 왔다며?"

내 앞 소파에 풀썩 앉으며 레니가 묻는다. 미처 주저앉지 못한 레이스가 하늘거리며 허공에 맴돌다 뒤늦게 가라앉았다. 그 모양을 가만히 쳐다보며 나는 응, 이라고 대답했다.

"아직도 너한테 질리지 않았대?"

"그런가봐."

남이 상처받을지도 모르는 험한 말을 마구 뱉어내는 레니의 입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대답하자, 저 녀석은 오히려 그런 나를 질린다는 듯 쳐다보았다.

웃긴 녀석. 누가 더 심했는데 나를 저리 쳐다 봐?

하지만 저런 레니의 표정에 오히려 이겼다는 생각이 드니 어쩌면 나 역시 보통 성격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는 테이블 한 구석에 박혀있던 상자를 들어 레니에게 휙 던졌다.

"뭐야?"

"아직 질려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까지 쥐어주던데?"

"이게 뭔데?"

"딱 보면 몰라? 보석 상자잖아."

"……누가 그걸 몰라?"

낮게 깐 목소리 하나도 안 무섭다. 나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며 맛을 음미했다. 내 태연한 모습에 레니가 쳇쳇 거리며 상자를 열었다.

"우와~. 이거!?"

놀랐지, 놀랐지? 놀랐을 거다. 나도 놀랐으니까. 나도 내 몸 값이 그렇게 높았는지 정말 상상도 못했더랬다.

"이거 '눈의 결정'아니야?"

"맞을 걸?"

"……맞을 걸?"

어이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표정이 웃겨 나도 모르게 킥 웃고 말았다. 레니 본인은 모르겠지만 저렇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으면 상당히 웃기다. 아주 상당히. 스스로는 그런 표정이 귀엽다고 여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런 식의 놀라운 표정은 눈이 큰 아이한테나 잘 어울리는 걸. 레니는 귀여운 것을 추구하지만 실상 레니의 외향은 귀여움보다는 섹시함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저렇게 섹시하게 째진 눈동자를 애써 동그랗게 말아 뜨려하니 웃기지 안 웃고 배겨? 왜 저리도 어울리지도 않는 귀여운 것만을 추구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자기가 좋다니 그 언밸런스를 애써 받아주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비싼 걸 너한테 툭 던져줬단 말이야?"

조금씩 떨리는 레니의 목소리에도 나는 무심히 고갤 끄덕였다.

"그 남자한테는 넘쳐나는게 돈인가 보지."

"그건 그럴지도."

"그 남자한테는 그 것도 별거 아닐 거야."

"그것도 그럴지도."

"아마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대충 하나 골라 준 걸지도 모르고."

"흐음, 그럴지도."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 준비한 것을 속 내용도 보지 않고 그냥 나한테 던져준 걸지도 모르지."

"그것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사실로 말하면 던져준 것이 아니라 눈떠보니 머리맡에 있었지만.

가만히 그 날 아침을 떠올려 보았다.

나 혼자 그 곳에 남겨져 있었지. 격렬했던 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침대에 새겨져있었다. 처음 몇 주 당황해하며 어쩔 줄 몰라 했었던 그 흔적들을 이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누가보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그랑 나랑 그렇고 그런 관계란 것을 이 루벤스 제국에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서……봤어?"

눈을 가늘게 뜨고 내 표정 하나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강렬하게 나를 주시하는 레니의 얼굴에 나는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레니가 오늘 올 것이란 걸. 그도 그럴 것이 레니는 내가 공작과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이면 항상 나를 찾아왔으니까. 그런 그녀가 알고 싶은 건 단 하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에도 못 본 거야?"

"응. 눈 떠보니 혼자였어."

"괴물."

아, 그 인간이 진정 사람이란 말인가. 딱 그 표정으로 레니가 입을 벌리고 앉아있다. 그 웃긴 모습에도 나는 더는 웃음이 나오지 않아 그냥 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아무렴 어때. 나는 정부인걸."

"아니!"

아무렇지도 않은 내 말에 레니의 표정이 급격히 얼어붙었다. 내 얼굴표정을 살피는 모양새가 퍽이나 조심스럽다. 혹시 화가 났나? 아니면 상처를 받았나? 어쨌든 레니는 그리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맹세코 화도 나지 않았고 상처도 받지 않았다. 사실 난 그 누구보다 '정부'라는 단어를 실질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 중 한명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잠든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을 수 있지?"

흐음, 그 남자가 잠든 모습이라.

아마 모든 사람들이 들으면 놀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수없이 그와 몸을 섞고 밤을 같이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그 남자의 잠든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말한다면. 그랬다. 나는 그 남자가 내 옆에서 잠든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본 적이 없다 해야 하나, 아니면 그가 보여준 적이 없다 해야 하나 모르겠지만. 그는 나와 몸을 섞고 또 다시 섞기 전, 잠시 내게 쉬는 시간을 준다. 아직까지도 그의 몸을 많이 벅차하고 있는 나를 나름 배려하는 행동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마구잡이로 몸을 섞어 대는 것에 비한다면 고마운 배려이긴 하지. 그 시간에 나는 지친 몸으로 짧은 잠에 빠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와 대화라는 것을 나누기도 한다. 대화는 가끔, 아주 가끔일 뿐이다. 그렇게 그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어느 정도 쉬었다 싶으면 또 몸을 섞는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기준으로다. 절대 내 기준이 아니다. 그렇게 또다시 몸을 섞고 나면 나는 완벽하게 지쳐버린다. 지쳐 기절하듯 잠이 들고 아침에 잠에서 깨면, 그곳엔 늘 혼자 남아있었다. 내 옆자리는 사람의 온기가 전혀 없었다는 듯 서늘하기만 하고.

그렇다. 우린 밤은 함께 보내지만 아침을 함께 맞이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사전에 딱 들어맞는 '정부'라는 정의였다. 다른 목적 없이 오로지 관계가 전부인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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