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 회: #1-1 그 남자 -- >
"처녀?"
"오늘 성인식 치렀다니까요."
"성인식 치루기 전의 모든 귀족영애가 순결하지 않다는 건 알 텐데?"
어쩌면 모욕적이기까지 한 그의 말에도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저을 뿐이다.
"뭐,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겠네요. 전 처음이에요."
"……무섭지 않은 건가?"
그 말에 소녀는 빤히 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곧고 바른 시선에 뮤가 오롯이 새겨진다. 왠지 그 사실이 맘에 들었다. 더불어 뮤의 호기심이 무럭무럭 커져갔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무사히 나간다 해도 조만간 다른 곳으로 팔려갈 거예요. 저를 팔아먹기 위한 순간만을 기다려왔을 텐데 당연한 일이죠. 그 전에 탈출을 해야겠다 싶어서 여러 차례 시도도 해보았지만 아직 제 힘으론 배롤린 남작 가(家)를 탈출하는 건 불가능했어요. 철통같이 감시하는 사병들을 뚫지 못했으니까요. 운이 좋아 사병들을 따돌리고 저택에서 탈출했다고 하더라도 가다가 잡힐게 뻔했구요. 그물망이 의외로 이중삼중으로 되어있더라구요. 뭐, 어쩌겠어요. 제 힘이 미력한 탓인 걸요. 이 정도 힘밖에 못 길러 놨으니 질질 짜고 울어봤자 소용없는 일이겠죠."
그녀는 생각보다 더 냉정했다. 분노를 터트리지도 않았고 자신의 신세에 한탄을 하지도 않았다. 마치 타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만 누구보다 정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안겠다하면 순순히 안기겠다?"
뮤의 직설적인 질문에는 소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단단해보였다. 대체 저 어려보이기만 한 아이의 어느 부분이 그리도 강한 건지 뮤는 다시금 호기심이 동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 이 또한 얼마 만에 가지는 인간다운 감정이란 말인가.
뮤는 오랜만에 재밌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 이유만으로도 그녀를 도와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고는 어이없다는 듯 고갤 내저었다. 언제부터 자기가 이렇게 너그러운 사람이었는지 웃길 뿐이다. 처음 계획대로 당장 저 아이를 이곳에서 내치고 자기를 기만한 배롤린 남작의 목을 베기만 해도 저 아이에게는 의도하지 않은 도움을 준 것일 테다. 자기를 팔아먹은 남자를 대신 죽여준 셈일 테니까.
하지만 뮤는 어차피 배롤린 남작을 죽이려 했다는 말 대신 그리고 소녀에게 나가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 대신 본인도 의도치 않은 말을 내뱉었다.
"이름이 뭐지?"
"……유니시이나."
"유니시이나 배롤린이라."
"그냥 유니시이나요. 그 웃기지도 않는 성은 빼주세요."
불쾌함으로 일그러진 소녀의 얼굴을 보며 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간만에 만난 호기심이 드는 사람에게 역겨운 성 따위 붙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처음이라."
무엇에 관한 처음을 언급하는지 알만도 할 텐데 힐금 본 소녀의 얼굴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그의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초연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와 관계를 맺어도 그 뿐이라는, 절대 그에게 속하지 않겠다는 그 꼿꼿한 모습에 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성격이라면 귀찮게 매달리지 않을 것 같다. 그와 밤을 보냈다고 난리쳐댈 것 같지도 않고.
어떤 여자는 그와 인사를 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으쓱거려대기도 했었다. 뮤는 분수를 모르는 사람들과 주제파악 못하고 나서는 부류를 무척이나 싫어했기 때문에 지금 보이는 그녀의 저런 태도가 상당히 맘에 들었다. 누구보다 펄펄 뛰어야 할 이 상황 속에서 저렇게 홀로 우둑하니 서 있을 정도라면 그녀의 성격도 보통은 아닐 것이다. 그가 끝이라고 말하면 그녀는 아마 두 번 묻지도 않고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이리라.
뮤는 피식 웃었다. 처음 이 방에 들어서고 저 소녀를 보았을 때 느꼈던 분노와 짜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저 소녀는 짜증스런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느꼈던 짜증스러움이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그는 지금 소녀가 취하고 있는 저 태도가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참 묘한 일이지.
"이리 와."
결정을 끝낸 뮤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위처럼 단단하게 서 있던 그녀는 잠시 뮤가 내민 손을 그저 가만히 바라볼 뿐, 쉬이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다 천천히 걸어와 그의 손을 잡는다. 그 잠시의 기다림이 나쁘지 않았다 생각하며 뮤는 손에 잡힌 그녀의 손을 끌어와 그녀의 얼굴을 바로 앞에 두었다.
새하얀 목덜미.
그 목덜미를 보는 순간 뮤는 뜻하지 않았던 욕망이 불꽃처럼 이는 것을 느꼈다. 하늘이 펼쳐진 것만 같은 하늘빛의 머리카락이 새하얀 목덜미를 지나 가슴 밑까지 찰랑거린다. 머리카락의 끝자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뮤는 제법 봉긋하게 솟은 가슴 선에 만족했다. 다시금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보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늘빛의 눈동자다. 그 곧은 시선이 맑은 하늘과도 같이 정직하다. 오밀조밀 붉은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가 쓱 훑어보았다. 그 촉촉한 감촉도 맘에 들었다.
뮤는 웃으며 얼굴을 내려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댔다. 장난스럽게 시작한 키스는 생각지도 못한 달콤함으로 뮤를 흥분시켰다. 그 입술을 마음껏 탐하며 뮤는 재미로 해보려했던 관계가 꽤나 마음에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뮤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는 그가 더 이상 그녀를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실소를 터트렸다. 그녀는 그의 손길에 순순히 따라주었다. 침대에 눕히고 가만히 자기를 내려다보는 뮤의 시선조차도 담담히 받아낸다.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뮤는 자신의 옷가지를 벗어 내리기 시작했다. 하나씩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지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겠다는 듯이 그렇게. 그의 옷가지가 하나 둘 떨어지고 그녀의 옷가지가 모조리 벗겨질 때까지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적어도 뮤의 눈엔 그리 보였다. 아까부터 탐이 났던 새하얀 목덜미가 완벽히 드러나고 그녀의 목덜미처럼 눈부신 나체까지 모두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저 담담하고 단단하다.
"흐음, 더 이상은 기회가 없다."
"……."
무슨 기회인지도 그녀는 묻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뮤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목덜미에서는 이름 모를 희미한 꽃향기가 그녀만의 체취와 섞여 있었다. 그 향이, 뮤는 꽤나 맘에 들었다.
그리고 곧 그는 온 몸으로 그녀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어리석은 것."
아니, 어쩌면 그녀는 너무나도 운이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었더라면, 그리고 쓸데없이 아무 말도 지껄이지 않았더라면, 그의 눈앞에서 그리 당돌하게 굴어 그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녀는 그에게 쫓겨난 뒤 그토록 원했다 말하는 그 자유라는 것을 얻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틀림없이 배롤린 남작의 목을 베어버렸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도 모르게 그녀는 그를 도발했고 그로써 그녀의 자유는 멀어져버렸다.
이미 늦었다. 이미 판단은 내렸다. 그녀를 안겠다고 결심했으니 안을 것이다. 어리석은 배롤린 남작은 잘릴 뻔 했던 목이 한동안 더 붙어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하악. 하악."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몸을 꽉 껴안으며 뮤는 품속에 품은 여자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를 맡았다.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그는 자신의 몸을 그녀에게 묻었다.
그리고 그녀의 순결을 취했다.